61화 즉위식(1)
왕성의 중앙 홀.
장정 열 명은 너끈히 세울 정도로 높은 천장.
정교한 그림들이 아름답게 그려진 둥근 원을 중심으로 각 12개의 선들이 천장 끝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굵은 기둥들이 이 커다란 홀을 받쳐주었다.
홀 천장 부분에는 군데군데 창이 나 있었는데, 그곳에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이 홀 안을 가득 채워주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
새로운 왕이 등극하는 것을 보기 위해 아침부터 많은 이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비록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지만 그들은 절대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 왕국 내에 있는 유력 귀족들이었다.
대부분 영지를 가진 영주들이었고 왕국 내 주요 관직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대다수 모여 있었다.
그들 중 단연 눈에 띄는 금발의 중년 남성. 체구가 다른 이들에 비해 무척이나 컸기에 시선이 몰리는 건 당연하였다. 그리고 그 키만큼이나 매우 다부진 체구. 영락없는 무인의 몸을 가진 그는 바로 라델리안 공작이었다.
벤투스 왕국에 단 두 명뿐인 공작 중 한 명. 게다가 왕국 내 5명뿐인 소드 마스터이기도 하였다.
어떻게 보면 국왕보다도 더 권세가 높을 수도 있는 라델리안 공작. 비록 왕위 계승전 때 중립을 유지하였지만 그 상황을 늘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 제일 관심 있게 지켜본 것은 자신의 라이벌이라 칭하는 리나드 후작. 그런데 그를 패퇴시킨 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드레이크 자작. 아니 이제 그 공로를 인정받아 백작이 유력시되는 칼슨이었다.
“흠, 아직 서부파들은 보이지가 않는군.”
“그러고 보니 3 왕자의 지지 세력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아직 이곳에 오지 않은 듯합니다. 라델리안 공작님.”
잘 정돈된 짙은 갈색 머리의 사내가 그에게 답을 해주었다. 그자의 이름은 안토니오 노스데일. 라델리안 공작의 측근으로 노스데일 백작령의 영주였다.
라델리안 공작령과 노스데일 백작령.
이 두 영지는 왕국 서북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지로 서로 굉장히 밀접한 연관이 되어있었다.
그러기에 두 영주 또한 친분이 두터울 수밖에 없는 상황.
이렇게 서로 붙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평소에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한쪽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서부파들이 왔다!”
“저기 저 사람이 바로 바스테르 백작인가 보군.”
“그런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은걸?”
그들의 등장에 모두들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보면 그들 또한 3 왕자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주역들. 모르긴 몰라도 저들 중 상당수가 공로를 인정받아 많은 보상이 내려질 것이다. 그러던 중 갑자기 그 술렁임이 멈추었다.
“데로스 던 카르시아 전하께서 납십니다.”
궁정 의전관이 큰 소리로 외치자 모두들 하던 대화를 멈추며 엄숙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리고 곧 왕위에 오를 3 왕자가 자리에 나타났다.
이제 막 약관을 넘은 나이의 앳된 얼굴. 한쪽으로 잘 쓸어 넘긴 금발 머리가 유난히 빛이 났다. 그리고 1 왕자 스반과 닮은 듯한 훤칠한 이목구비는 3 왕자와 1 왕자가 한 형제라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측근들과 함께 온 그는 준비된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양옆에 두 사람이 서 있었는데 한 명은 검은 머리의 젊은 남성이었고 다른 한 명은 금발의 여성이었다.
새하얀 피부에 도톰한 입술이 도드라지는 그 여성은 바로 공주인 엘리시아였다.
데로스가 자리에 앉자 의전관이 다시 즉위식을 진행하였다.
“벤투스 왕국의 태양이셨던 르보르 던 카르시아 국왕폐하께서 붕어하시고…(중략) …그로서 계승 의식 절차에 합당하게 즉위하게 되신 데로스 던 카르시아 왕자 전하가 정식으로 보위에 오르신 것을 왕국 내 모든 이들에게 알립니다.”
의전관의 말이 끝나자 두 명의 시종들이 왕관이 놓인 받침을 조심스레 들고 들어온다. 그리고 그것을 데로스의 눈앞까지 가지고 온 다음 무릎을 꿇었다.
스윽.
천천히 왕관을 집어 자신의 머리에 올린 데로스.
이제 그는 벤투스 왕국의 진정한 왕이 되었다.
짝짝짝짝─
모두 박수를 치며 새 왕의 등극을 진심으로 환영하였다. 그러고 다시 이어지는 의전관의 말.
“새로 즉위하게 되신 국왕 폐하의 즉위 선서가 있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데로스는 천천히 자리에 일어섰다. 그런 다음 곧장 입을 열며 말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벤투스 왕국의 든든한 기둥 같은 충신들이여. 그대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
나, 데로스 던 카르시아는 영민하고 자애로우셨던 선왕 폐하의 의지를 이어받아 부끄럽지 않을 훌륭한 왕이 될 것을 다짐하겠다.
또한 새로운 국왕으로 나한테 막중한 책임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기에 그 무게에 걸맞게 최선을 다하여 왕국을 수호하고 이끌어갈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다.”
그렇게 그의 말이 끝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다.
짝짝짝짝────
“국왕 폐하 만세!”
“데로스 던 카르시아 폐하 만세!”
“벤투스 왕국에 큰 영광을!”
사람들의 환호에 그는 손을 들며 화답해주었다. 그렇게 즉위식이 마무리되자 이어서 논공행상이 시작되었다.
그 대상은 당연히 3 왕자를 지지하고 싸웠던 서부파의 귀족들. 그 첫 번째 대상은 바스테르 백작이었다.
“바스테르 백작은 서부의 귀족들을 이끌고 왕위 계승전을 승리로 이끈 공로를 높이 사 후작의 위에 봉한다. 그리고 서남부 일대의 영토 일부를 하사하기로 한다.”
“신 바스테르, 국왕폐하의 하늘과 같은 은덕에 무한히 감복할 따름입니다.”
승작과 더불어 영지의 하사.
왕국 내 새로운 후작이 탄생하였다.
이제 바스테르 백작은 왕국 내 3명의 후작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와아아아아!”
“국왕 폐하 만세!”
사람들의 환호 속에 논공행상은 계속되었다.
“모스크 자작에게는 핀토 영지를 하사하겠다.”
“조나스 남작에게 자작 위를 수여한다.”
“파고스 자작에게는….”
“…….”
그렇게 몇 명에게 보상이 내려지고 마지막으로 칼슨이 그 앞에 섰다. 칼슨이 들어서자 사람들이 다시 웅성대기 시작하였다.
“허, 저자가 바로 그 유명한 드레이크 자작인가?”
“분명 소드 마스터라고 들었는데 저렇게나 젊다니. 도대체 어떻게….”
“호오, 젊은 신성이라고 말로만 들었는데 저렇게 앳된 젊은이라니….”
현재 이곳에 있는 귀족들은 그를 처음 보는 이들이 대부분.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그를 실제로 보며 그 호기심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없었다면 3 왕자가 지금의 국왕이 절대 될 수 없었을 만큼 그 공로가 절대적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소드 마스터였다. 리나드 후작마저 패퇴시킬 정도로 고강한 실력을 가진 그는 모든 이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행상.
“드레이크 자작에게는 백작 위를 수여하도록 한다. 그리고 동북부 지역의 리나드 영지와 루겐보르 영지, 그리고 로우링 영지 등 그 일대를 하사하도록 하겠다.”
그 말에 모든 이들이 깜짝 놀랐다.
공이 크니 백작으로의 승작은 어느 정도 예상하였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영지가 너무 과하였다. 동부가 거의 대부분 그의 영지가 되어버린 격인데 그 크기만 따지면 거의 공작령을 능가할 정도. 게다가 그 영토들이 모두 알짜배기 영토들. 아무리 공로가 높다고 하여도 이해하기 힘든 처사였다.
사람들이 그렇게 술렁이고 있을 때 칼슨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신 드레이크, 국왕 폐하의 은혜에 충심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서둘러 보상을 받아 든 칼슨.
그가 급하게 그리 행동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데보스가 막 왕관을 머리에 쓰고 선서를 마치는 순간 눈앞에 알림 메시지가 떴었다.
띠링─
[데로스 던 카르시아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퀘스트 보상이 성과에 따라 달라집니다.]
[퀘스트 성과 ‘최상’에 다다랐기에 그에 걸맞은 보상이 주어집니다.]
[영주(백작)으로 변경됩니다.(예정)]
[패배한 세력의 영지의 총 30%를 얻게 됩니다.(예정)]
[보상은 논공행상이 끝나고 확정됩니다.]
[주의: 얻게 될 영지는 어디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뭐? 이게 도대체 뭐야?’
갑작스레 떠오른 메시지로 인해 칼슨은 조금 당황하였다.
퀘스트가 완료되는 거야 몇 번 봤으니 그건 익숙했다. 그런데 바로 주지 않고 ‘예정’이라는 거는 처음 보았다.
하긴 주는 자가 아직 준다고 이야기를 안 했는데 영지가 생긴다면 말이 안 되긴 하였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주의: 얻게 될 영지는 어디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영지를 주긴 주는데 원하는 곳이 아닌 쓰레기 같은 영지를 줄 수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물론 영지의 크기가 많아지는 것은 좋지만 중요한 것은 그 질이었다. 막상 큰 영지를 받아도 그곳에 자원도 없고 위치도 안 좋으면 그건 처치 곤란의 애물단지가 될 수도 있었다. 차라리 작아도 알짜배기 영지를 받는 게 그에게 훨씬 이득이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었는데 노른자위 땅을 몽땅 그에게 몰아주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하고 살짝 위를 봤더니 엘리시아 공주가 살짝 윙크를 한다.
아마도 그녀가 힘을 써준 듯하였다.
역시 우리의 회귀자는 자기편을 잘 챙길 줄 안다.
하긴 자신 같은 인재에게는 후한 보상을 주며 잘 보여야 하는 법.
어쨌든 그 성의를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냉큼 영지를 받아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행상이 마무리 되어 갈 때 누군가 손을 들며 말을 한다.
“폐하, 신 루보스 레바레스가 긴히 간청드릴 말이 있습니다.”
족히 예순은 넘어 보이는 남성.
머리가 새하얀 백발에 가까운 그자가 나서자 몇몇 귀족들도 따라나섰다. 그들의 표정을 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말씀해 보시오. 레바레스 재상.”
벤투스 왕국의 재상인 루보스 레바레스.
그는 재상이면서 동시에 왕국에 둘뿐인 공작이었다.
왕국의 대소사에 그가 모든 것을 책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영향력이 막대하였다.
그런 그가 앞장서서 말하려고 하니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미 폐하께서 결정하신바 이런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방금 전 드레이크 백작에 대한 보상을 내리신 것에 대해 신이 조금 걸리는 구석이 있습니다.”
딱 봐도 지금 결정이 마음에 안 든다는 소리. 그에 칼슨은 속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시발! 저 늙은이가 지금 뭐라는 거야!’
“걸린다? 도대체 뭐가 걸린다는 말이오.”
칼슨이 받은 보상에 찬물을 끼얹는 루보스. 그는 데로스의 말을 듣고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그가 폐하를 왕위에 올린 공이 크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의 영지는 그 작위에 비해 너무 과합니다. 이는 다른 이들에게도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왕국의 위계가 무너진다면 어찌 나라가 바로 서겠습니까. 신의 이런 의중을 부디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한마디로 분수에 안 맞게 땅을 가져갔으니 이를 수정해달라는 말. 칼슨은 당장이라도 저 늙은이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국왕인 데로스 또한 루보스의 말이 이해는 되었다.
백작인 칼슨의 영지가 눈앞의 루보스는 물론 라델리안 공작의 영지보다 더 넓었으니까.
심각한 표정을 하며 고민을 하는 데로스. 그런 그에게 엘리시아가 뭔가를 귓속말로 이야기하였다.
그녀의 말을 들은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루보스를 향해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경에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소. 허나 드레이크 백작의 공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인 것 같소.”
“말씀하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왕이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 같아 흡족한 표정을 하는 루보스. 허나 데로스의 입에서 나온 내용은 그의 예상을 한창 벗어났다.
“그럼 그에게 백작 위가 아닌 공작 위를 주는 것이 어떻소? 그러면 경이 납득하지 않겠소?”
“예?”
그 말에 깜짝 놀란 루보스는 절로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