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왕위 계승전(23)
로우링 영지 중앙의 에덴보르 평원.
제법 찬바람이 부는 들판인 이곳. 요즘같이 추운 날씨에는 늘 적막하던 곳이었지만 오늘따라 그런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옷과 병장기로 무장한 사람들. 영락없이 잘 정비된 군대의 모습이었다.
그 중 선두에 말을 탄 자가 눈앞에 있는 도시를 보며 말을 하기 시작한다.
“저곳이 로우링 영지의 중심지인 에모르로군.”
“예, 영주님.”
칼슨의 말에 우터가 바로 답하였다.
로우링의 도시 에모르. 이곳은 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기에 제법 눈에 익은 곳이었다.
“그나저나 리나드 후작의 행방은 어찌 되었는지 아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자가 드레이크 성에서 도주한 이후로 그 행방이 묘연합니다. 혹시나 상처가 심해 죽었다면 시체라도 찾았어야 하는 데 그 흔적조차 나오지 않으니…. 죄송합니다, 영주님.”
드레이크 영지를 기습 침공한 후 패퇴하여 도주한 리나드 후작. 놈들의 군대를 괴멸시켰을 때 지휘를 하고 있던 로우링 자작의 수급은 취하였지만 끝내 리나드 후작을 찾을 수 없었다.
사로잡은 포로의 말에 따르면 그는 전투 중에 혼자만 도망갔다고 하였다. 전투 중에 대장이 도망갔다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자신에게 그렇게 당했으니 생명의 위협이라도 느꼈을 것일 테니.
“아니, 죄송할 것까지는 없지. 그자는 소드 마스터가 아닌가. 그런 자가 작정하고 자취를 감춰버린다면 흔적을 쫓기가 무척이나 힘들 거야.
그래도 살아만 있다면야 언젠가는 보게 되겠지. 그는 한 세력의 수장이니 말이야. 설마 귀족파가 망하는데도 가만히 두고 보진 않을 테니까.”
“그렇습니다. 영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칼슨의 말에 동의하며 우터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전방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그런 이야기는 차차 하도록 하고 지금은 눈앞의 저곳을 점령해야 되겠지. 우터, 전투 준비는 다 되었나?”
“예, 영주님. 명령만 내리십시오.”
가슴에 손을 얹은 우터가 힘차게 말한다. 그 모습을 본 칼슨은 믿음직스럽다는 표정을 하였다. 그리고 검을 높이 들며 외친다.
“모두 전진하라!”
그 말과 함께 드레이크의 전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 * *
그 시각 에모르 안 중심부에 위치한 카라트 성.
현재 그곳에 있는 영지 회의실에서 수 명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 지금, 드레이크의 병력들이 코앞에 있다고 하오! 도대체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로우링 자작이 전장에서 전사한 이후 그의 뒤를 이어 영주가 된 켄트 로우링.
전 영주의 장자였던 그는 이제 고작 스무 살에 불과하였다.
이렇다 할 경험이 없는 젊은 나이. 그런데 지금,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적들은 바로 턱밑까지 와있다고 한다. 때문에 작금의 상황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웠다.
겁에 질린 채로 그가 말하자 가신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영주님, 당장 항복해야 합니다! 보고에 의하면 저들은 리나드 후작님이 이끄신 3천 명의 대군을 단숨에 무찔렀다 하옵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승산이 없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지금 드레이크의 군대는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대항하여 괜한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어서 그들에게 항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주님. 소문에 따르면 그들은 베르호프 요새에서 자신들에게 대적한 이들을 참혹하게 짓밟았다고 합니다. 저희도 그 같은 처지가 될까 너무나도 두렵습니다.”
어서 항복을 해야 한다며 의견을 내는 이들. 그런 그들의 말을 들은 켄트는 더욱더 걱정스러워하며 두려워하였다. 그렇게 회의장의 분위기가 항복하는 쪽으로 기울어가자 한 사내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지금 저들은 우리가 저들을 침공한 것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항복을 한다고 해도 곱게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바에 차라리 결사 항전을 하여 저들에게 우리의 긍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싸워야 한다는 그의 말에 다른 가신들의 표정을 일그러졌다.
“게롤드 경,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오! 지금 결사항전이라 하였소? 지금 제정신이오!”
“검만 다루다 보니 판단이 흐려지셨구려! 처세를 보는 눈이 이렇게나 어두울 줄이야. 항전이라고 하셨소이까? 지금 우리 전력으로 그게 가능할 거라 보시오!”
눈을 부릅뜨며 신랄하게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 허나 그들의 말도 틀린 것이 아니었다.
현재 로우링 영지에 있는 방어 병력은 고작 200여 명. 그리고 추가 기사는 고작 다섯이다. 드레이크와의 전투에서 주요 전력이 대다수 빠져나갔기에 지금 남아있는 병력은 형편없었다. 거기에 비해 드레이크 군의 병력은 압도적으로 많았다.
정찰병의 보고에 의하면 그 수가 대략적으로 천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그 숫자만 해도 자신들과의 차이가 무려 5배나 되었다.
게다가 그들의 수장인 칼슨 드레이크는 전장의 사신이라 불리는 자였다. 여태껏 보다 많은 수의 적들을 손쉽게 격파해왔던 그였다. 그런데 자신들은 그의 병력에 비해 형편없는 열세이니 어떻게 싸울 의지가 나겠는가. 아마도 전투가 벌어진다면 순식간에 쓸려나갈 것이 분명하였다.
다른 가신들이 한목소리로 자신을 힐난하자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하였다. 이곳의 경비대장인 하딘 게롤드. 그는 이 같은 현실을 속으로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문밖이 소란스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곧장 문이 열리며 병사 한 명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한다.
“저, 적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모두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특히 영주인 켄트의 표정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리고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다, 다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 어, 어서 항복의 표시를 하시오! 당장!”
마침내 결단을 내린 켄트. 그의 말에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편한 얼굴들이 되었다. 단 한 사람 하딘을 제외하고 말이다.
* * *
에모르에 진입한 드레이크 군. 여기까지 다다를 동안 적군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칼슨은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도시를 감싸고 있는 외성의 성벽.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이 보이긴 하였지만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저 정도 수면 점령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가볍게 포격을 시작으로 전투를 시작하려던 찰나. 성벽 위에서 하얀 깃발이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뭐야? 저건?”
“아무래도 우리에게 항복하는 것 같습니다.”
“뭐?”
본격적으로 싸워보려 했는데 느닷없이 항복이라니. 칼슨은 김이 좀 빠졌다. 허나 피를 흘리지 않고 쉽게 이곳을 점령할 수 있다 생각하니 오히려 더 이득이라 여겼다.
그리 생각하고 있던 와중 성문이 열리며 몇몇 사람들이 나타났다.
다그닥 다그닥
말을 타고 인근까지 오는 그들.
그중 중앙에 있는 자가 칼슨을 향해 말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로우링 영지의 영주 켄트 로우링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켄트. 칼슨의 또래처럼 보였는데 그 말투가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우리 로우링 영지는 드레이크 군에게 무조건 항복하겠습니다. 부디 드레이크 영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완전한 항복 선언.
이렇게 대놓고 백기를 들어버리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좀 허전한 맘도 들었지만 어쨌든 무혈입성이 아닌가.
칼슨은 미소를 보이며 그들에게 말을 하였다.
“그래, 내 특별히 자비를 베풀도록 하겠다.”
그 말에 켄트와 그의 가신들은 고개를 연신 조아리며 기뻐하였다.
“감사합니다. 드레이크 자작님.”
“자비로우신 결정에 찬사를 보냅니다.”
하지만 곧 이어진 말에 그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었다.
“허나 내가 자비를 베푸는 것은 영지민들 뿐이다. 우터, 어서 저놈들을 처리해라.”
“예, 주군.”
쉬이이이익─────! 푸욱!
“커어억!”
그대로 머리에 화살이 꽂히며 절명하는 켄트.
털썩─
영주의 시체가 말에서 떨어지자 사색이 되어버린 가신들. 그대로 말머리를 돌리며 도망치려
하였다. 허나 곧이어 그들의 발밑이 무너져 내린다.
와르르르르르────
히이이잉~
“으아아악!”
“뭐, 뭐야! 살려줘!”
“커헉!”
콰직! 쿵! 쾅!
구덩이에 빠지며 말들과 뒤엉켜버리는 그들. 말들의 압력에 그대로 찌부러져 버렸다. 그렇게 그들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할 때 칼슨은 병사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진격하라! 눈앞의 저곳을 점령하도록 하라!”
“네, 영주님! 모두 전진하라!”
“와아아아아아!”
그의 명에 파도와 같이 달려드는 드레이크의 병력들. 그들은 삽시간에 이곳을 접수해 버리고 말았다.
* * *
아무런 피해 없이 로우링 영지를 점령한 드레이크 군의 다음 행로는 바로 루겐보르 백작령. 로우링 영지의 서북쪽에 위치한 영지로 서부파의 핵심 지역이자 중심지였다.
영지 자체도 넓고 길목이 사방으로 이어져 있어 벤투스 왕국 내에서 손꼽히는 교역로 중 하나였다. 그로 인해 당연히 유동 인구가 많을 수밖에 없는 알짜배기 동네. 딱히 자원이 풍부한 곳도 아니었고 이렇다 할 특산품도 없었지만 이 영지의 재정은 왕국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부유하였다. 그리고 그만큼 그곳을 지키는 병력 또한 많았다.
루겐보르 백작령 동남쪽에 위치한 트레타 초원.
현재 이곳엔 수많은 군대들이 서로를 겨누며 대치하고 있었다.
한쪽은 루겐보르 백작군. 다른 한쪽은 드레이크의 병력들이었다.
루겐보르 백작의 병력의 규모는 자그마치 2천여 명. 상대의 수보다 2배나 많았다.
그 선두에 선 루겐보르 백작.
그는 조금 긴장된 얼굴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비록 자신의 군대가 적에 비해 숫자가 많았지만 그들을 이끄는 자가 그 악명 높은 ‘전장의 사신’이었다.
만약 전투에 패배하여 이곳이 돌파된다면 후방에 있는 네트비아까지 그대로 뚫려버린다.
루겐보르 백작령의 중심 교역 도시 네트비아.
그곳은 많은 상인들이 거래를 하는 커다란 시장이 있다. ‘그랜드 바자’라 불리는 이곳은 엄청나게 많은 상거래가 이루어지며 그로 얻는 세금으로 루겐보르 백작령을 먹여 살린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허나 문제는 그곳은 수성하기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성벽도 낮고 관문도 한 개가 아닌 5개나 되어 지켜야 할 곳이 많았다.
거기다 그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면 많은 상점이 부서지고 소실될 우려가 있다. 한마디로 손해가 막심하다는 것.
그렇기에 그는 그보다 앞에 있는 이 트레타 초원에서 진을 치고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가 그 유명한 드레이크 자작인가 보군.”
칼슨을 보며 말하는 루겐보르 백작. 그 말에 옆에 있던 기사가 그에 답을 하였다.
“예, 영주님. 그런데 유명한 것치고는 별 볼 일 없어 보입니다.”
“겉모습만 보고 속단하지 마라, 루베르. 그는 소드 마스터이자 이제까지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던 자다. 우습게 보다가는 큰코다치게 될 것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영주님.”
루베르가 힘차게 대답하자 루겐보르 백작은 살며시 웃으며 다시 앞을 바라본다. 그때 그의 귀를 찢는 굉음이 들려왔다.
콰앙! 쾅! 콰광! 쾅!
그 소리에 당황한 그들.
그러고 보니 얼핏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베르호프 요새에서 이런 천둥 같은 소리가 나고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을. 그 생각과 동시에 주변의 땅들이 터져나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