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왕위 계승전(18)
취이이이익─────
사방에 피가 흩뿌려지며 시뻘게졌다. 바닥에 고인 흥건한 피와 여기저기 어지럽게 놓여있는 시신의 조각들. 그들은 그 참혹한 광경을 보자 사색이 되어버렸다.
“으허어억! 괴, 괴물이다!!”
“어찌 이런 일이……우웩!”
겁에 질려 떨고 있던 적들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으며 거침없이 나아갔다.
서걱─ 스윽─ 슥 서걱──
산책하듯 걸어가며 가볍게 휘두르는 그의 검. 흡사 춤이라도 추는 듯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
그가 그렇게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썰리며 피의 진혼곡이 울려 퍼진다. 두려움을 이겨내며 필사적으로 달려들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저지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무적의 신위. 그때였다.
쉬이이이이익──────!
섬뜩한 파공성과 동시에 그를 위협하는 화살. 범상치 않은 그 공격에 리나드 후작은 긴장하며 자세를 틀었다.
채애앵! 챙! 팅!
세 발의 화살.
두 개는 검으로 쳐내었고 하나는 갑옷으로 비켜나가게 하였다. 쉽게 막아낸 듯 보였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까딱하였으면 치명상을 입었을 매서운 공격이었다.
지금도 검을 쥔 손이 아직도 저릿한 걸 보면 얼마나 그 위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이 갔다. 그 때문인지 후작의 등골은 제법 서늘해져 있었다.
‘귀궁 네놈이구나! 이 말도 안 되는 화살 솜씨는 네놈밖에 없지.’
눈에 힘을 주어 주변을 살피니 저 멀리 병사들 뒤에 활시위를 당기는 이가 눈에 띄었다. 익숙한 몸놀림에 체구. 분명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그자였다.
근거리로 붙으면 자신이 불리한 걸 알기에 병사들을 방패 삼은 듯하였다. 언뜻 보면 비겁해 보이는 행동이지만 실로 현명한 처사라 할 수 있었다.
대충 상황을 인지한 리나드 후작은 그의 공격을 인지하면서 병사들을 베어나갔다.
쉬이이이익───! 팅!
쉬이이익─── 채앵! 팅!
쉬이익─── 챙! 치직!
“크읏!”
놈의 공격을 충분히 신경 썼다 생각했지만, 미묘한 변화를 잡지 못하여 다리 부분을 스쳤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아릿한 통증이 왔기에 그는 더욱더 긴장을 하며 이동한다.
서걱─ 스윽─ 서걱─ 서걱── 칭!
“응?”
거침없이 병사들을 베어나가는 중.
순간 자신의 검을 막아내는 이가 생겼다.
‘호오!’
비록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키진 않았지만 그래도 오러가 실린 검. 그것을 막을 줄이야. 이 자는 절대 평범한 병사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서 오러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걸 보니 기사는 아닌 것 같았다.
리나드 후작이 그렇게 의문을 가질 때.
상대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를 갈고 있었다.
‘이런 개 같은! 이럴 줄 알았으면 햄처럼 영주님을 따라 전장에나 갈 걸 그랬어!’
그는 햄의 동료 병사였던 제이크였다. 늘 요령을 피우며 위험한 일을 기피하던 그는 전장에 나서지 않고 성에 주둔하였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적들이 쳐들어왔고 거기다 무시무시한 괴물이 성벽 위로 뛰어올라 자경단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소드 마스터처럼 인 것 같은데 어쨌든 최대한 살아보기 위해 도망을 가려 했다. 하지만 많은 수의 자경단들이 도망갈 자리를 차지하며 길을 막아 결국 저 괴물에게 따라잡혀 버렸다.
다행히 앞의 자경단들이 당해주어 방금 전 공격은 어찌 막아내었다. 하지만 이렇게 무시무시한 괴물과 직접 대치하니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살기 위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상대에게 집중하며 몸을 움직였다.
“으아아압! 얍! 얍!”
제법 속도감 있는 창술.
병사들 중 가장 날래다고 평을 들은 그는 속도만큼은 어지간한 기사들을 넘어설 정도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상대는 소드 마스터. 그 정도 공격은 쉽게 막아내었다.
채앵── 챙─!
“으으윽! 젠장!”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그대로 자세가 무너져버렸다. 이윽고 들어오는 상대방의 검. 제이크는 본능적으로 몸을 굴려 그것을 피하였다.
끼이이이익────
소름끼치는 마찰음이 그의 고막을 긁어대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눈앞에 붉은 오러가 잔뜩 피어오르는 검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제길!”
바로 그때.
쉬이이이익────! 티이잉!
“크윽!”
우터의 화살이 리나드 후작의 어깨 부분을 강타하였다.
그로 인해 그의 몸이 살짝 틀어졌고 그대로 제이크를 향하던 검은 옆으로 비껴가고 말았다.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진 제이크. 그는 잽싸게 몸을 일으켜 자세를 잡기 시작하였다. 그때 그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너는 제이크가 아니냐? 네가 왜 여기 있느냐? 영주님이랑 같이 전장에 가지 않은 것이더냐?”
“허걱, 기사단장님!”
“이놈아, 내가 단장직을 관둔 지가 언젠데…그러고 보니 너…으윽!”
볼튼이 제이크랑 말을 하고 있는 도중 그에게 후작의 검이 날아왔다.
치이이잉──!
하지만 그의 검은 별 피해를 주지 못한 채 거슬리는 소음을 내며 튕겼다. 이에 눈이 커진 리나드 후작.
“허, 이거 혹시 미스릴 갑옷인가?”
자신의 오러가 자르지 못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자세히 보니 며칠 전 부서졌던 자신의 갑옷이랑 그 모양이 흡사해 보인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 갑옷이 이 영지에서 제작했었지….’
한 벌에 무려 금화 1만 개나 지불한 그 갑옷. 가격이 꽤나 나갔지만 성능이 좋아 만족하였었는데 눈앞에 이 자 또한 그걸 입고 있었다. 보아하니 일개 기사로 보이는데 후작인 자신이랑 같은 옷을 입었다는 것에 심기가 뒤틀렸다.
“일개 기사 따위가 과분한 갑옷을 입고 있군.”
“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아무리 후작이라고 하지만 자신을 이렇게 무시하며 말하자 기분이 언짢아진 볼튼. 성난 목소리로 말한다. 허나 상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심드렁하게 이야기한다.
“과분한 물건은 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지…. 오늘 그 교훈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라.”
그 말과 동시에 그의 검에서 오러가 뭉쳐지기 시작. 곧 압축된 형태의 오러 블레이드가 만들어졌다.
지이이이이이잉.
오러에서 뭐든지 태워버릴 듯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자 볼튼 또한 긴장하며 자세를 잡는다. 그리고 곧이어 들어오는 그의 공격.
치이이이익──
“이런 젠장!”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오러를 검에 불어넣었다. 다행히 그가 가진 검은 고순도의 미스릴 검. 리나드 후작의 오러 블레이드를 잠시나마 버티게 해주었다.
끼이이이이익─── 치이이익───
오러 블레이드가 볼튼의 미약한 오러를 갉아먹으며 기괴한 소리를 낸다.
“크으윽, 빌어먹을!”
아까 대포를 운용하느라 오러가 바닥났었다. 조금이나마 회복해서 다시 싸우려 했지만 상대가 이런 괴물이라니….
그렇게 그가 진땀을 빼고 있을 때.
《불꽃 화살》
펑─! 화르르르───
“이익, 이건 또 뭐야?”
갑자기 자신에게 날아온 화염 마법에 직격당한 그는 당황하며 검을 거둔다. 그리고 재빨리 오러를 뿜어내 불길을 몰아내었다. 그렇게 그가 정신없어하고 있을 때 누군가 기합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으아아아아압!”
채앵─────!
몸을 회복한 루퍼트가 그에게 다가가 검을 휘두른다. 허나 보기 좋게 들어간 그의 공격은 애석하게도 상대에게는 별 위협이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의 신경만 긁었을 뿐.
“크윽,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하나하나 거슬리는 놈들이 여기저기 튀어나오기 시작하자 심기가 불편해진다.
그래서 이 자잘한 것들을 단숨에 처리하고자 다시 한번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것을 더욱더 응축시킨 다음 그대로 내려친다.
치이이이이잉───── 콰아앙!
“으허어억!”
“꺄아악!”
“아아아! 나 죽네!!”
순간 발생한 오러의 폭풍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그대로 튕겨 나가버렸다. 그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그들 모두 정신을 못 차린 채 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이제 끝내야 할 때다!”
그 말과 동시에 다시 한번 그가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키려 할 찰나.
위이이이이이잉─────
강력한 바람이 불어오며 그의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제가 막고 있을 테니 모두 피하세요.”
뒤에서 에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 또한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쥐어짜며 바람의 중급 정령인 실라이론에게 리나드 후작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로 인해 갑옷에 큰 압력이 가해졌고 거동 또한 힘들어졌다.
“이익, 이 지긋지긋한 놈들…!”
절로 인상이 구겨진 그는 몸에 오러를 일으켜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때 우터가 쏜 날카로운 화살이 그를 노리고 들어왔다.
푹─!
“크윽!”
갑옷의 틈을 뚫고 들어온 화살이 리나드 후작의 어깨에 깊숙이 박혔다. 그로 인해 자세가 무너진 그는 다시 정령의 압박에 당할 수밖에 없었고 이어진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런 제길!”
그가 그렇게 위기에 빠졌을 때 갑자기 그의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후작님이 위기에 빠지셨다! 우리가 도와드리자!”
“성벽에 오른 이들은 어서 움직여라! 이제 승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어느새 성벽을 타고 올라온 기사와 병사들이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막 올라와서인지 아직 백여 명에 불과하였지만,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적들을 물리쳐라!”
갑작스런 적들의 합류로 또다시 기세가 기울어졌다.
상황이 그렇게 반전되자 리나드 후작의 입가가 살며시 올라갔다.
“크크크,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짓거리를 끝낼 수 있게 됐구나!”
기사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난 그는 다시 검에 오러 블레이드를 압축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전방을 향해 내리친다.
치이이이이잉───── 콰과광!
“크어어억!”
“아아악!”
다시 한번 오러의 폭풍이 일어나며 눈앞에 있던 적들을 죄다 쓰러트렸다. 그 여파에 휩쓸린 자들은 대부분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으며 그 중 몇몇은 피를 토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자, 이제 승리의 시간이 왔도다! 놈들에게 우리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여줘라!”
“와아아아아아!”
해일같이 밀려드는 귀족파의 군대들. 이제 성벽에 올라온 수가 수백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몰려드는 군세에 드레이크 측의 병력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서걱─ 서걱─ 슥─ 푹─
“아아아악!”
“크허억!”
하지만 소드 마스터인 리나드 후작의 위세와 더불어 그를 따르는 기사들까지 합류하자 그들의 진영이 점차 무너져 갔다.
무척이나 절망적인 상황. 그때 새하얀 빛을 뿜어내는 뭔가가 그곳에 떨어졌다.
콰아앙───!
“크어어억!”
“으아아아아악!”
새하얀 빛이 터지면서 발생한 풍압. 그에 휩쓸린 귀족파의 기사들이 그대로 나뒹군다. 그리고 먼지가 자욱해진 그곳에서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후아, 이거 적들이 왜 여기까지 들어와 있는 거야?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투덜대는 듯한 익숙한 목소리. 그 말을 들은 에밀리가 울먹이며 말한다.
“……영주님!”
백금발의 잘생긴 청년이 그녀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이제 안심해도 돼. 내가 왔으니까.”
드레이크의 영주인 칼슨. 그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