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왕위 계승전(15)
“크윽! 이건 또 뭐야?”
갑작스런 돌풍에 리나드 후작은 당황스러워한다.
주변의 갈대들이 뽑혀 나가며 사방을 어지럽게 만든다.
미처 눈을 뜨기도 힘든 칼 같은 바람.
이에 그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뭐지? 이것은?”
바람이 점점 거세지면서 그 형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새 그 모습이 유형화되어가자 리나드 후작의 눈동자가 커지기 시작했다.
족히 5미터는 넘을 것 같은 거대한 신장.
조각같이 매끈한 결에 균형 잡힌 이목구비를 가진 여성의 모습이다.
크기를 빼고 본다면 지극히 아름다운 얼굴.
누구라도 그 얼굴을 본다면 얼이 빠질 만큼이나 매혹적이었다.
전체적인 외관은 반투명한 초록빛을 띠고 있으며 그것은 그녀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펄럭 펄럭.
흡사 바람과 같이 나풀거리는 그녀가 입은 옷들.
그리고 그녀의 하반신 또한 옷과 같이 뚜렷하지 않았으며 바닥에 닿지 않고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
아니 단순히 부유하는 것이 아닌 마치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를테면 신과 같은 그런 존재감.
그 압도적인 존재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네가 방금 이 아이를 해치려 하였느냐?】
머릿속에서 울림이 들려왔다.
언어가 아닌 의사가 바로 전달되는 느낌.
그 현상에 다들 머리를 매만지며 혼란스러워했다.
허나 다른 이들과 달리 에밀리는 전에 이 같은 경험을 겪은 적이 있었다. 이것은 분명 유적의 구조물에서 나온 상황이랑 유사하였다.
“도,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 때문인지 그 콧대 높던 리나드 후작의 태도가 정중해졌다.
왕족을 제외하고 누구에게도 이런 태도를 한 적이 없었던 그였다. 그를 알고 있는 누구라도 지금 상황을 보면 도저히 믿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낮추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상당히 건방진 인간이구나. 너는 아직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 말과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변하였다.
무거워진 공기. 아니 압축되어 밀도가 높아졌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 상황을 인지한 리나드 후작은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갑옷에 최대한 오러를 주입하여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였다. 그러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두 무의미한 짓이었다.
콰드득.
순간 엄청난 압력이 몸에 가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러마저 막아낼 수 있었던 미스릴 갑옷이었지만 그 강도가 우습게 보일 만큼 우그러들기 시작하였다.
“커허어억!”
피를 토하는 처절한 신음 소리.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몸이 조여 오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엄습해 들어왔다. 있는 힘을 다해 버텨보려 했지만 이건 도저히 그가 이겨낼 수 있는 차원의 힘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절대적.
뚜두둑.
갑옷이 몸까지 파고들며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였다. 힘을 주고 있던 근육의 다발들이 하나씩 터져나가고 있었다.
압력에 의해 뼈가 폐를 짓누르자 숨이 가빠져 더 이상 호흡이 불가능해지려고 하였다.
“꾸어어억, 사, 살려…….”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한다.
말 그대로 절체절명의 상황.
그가 그렇게 죽기 직전까지 갈 때.
갑자기 모든 힘이 사라지며 그에 대한 압박이 모두 풀어졌다.
【당장이라도 건방진 네놈을 없애버리고 싶지만 아직 계약을 거치지 않은 상태라 이곳의 인과율을 거스를 수 없구나.】
미처 끝장을 보지 못한 그녀는 아쉬운 듯 자조하였다.
그리고는 에밀리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아직 어린 아이야, 네 이름은 무엇이냐?】
압도적인 그녀의 기운도 에밀리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상대가 갑자기 자신에게 이름을 묻자 그녀는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저, 전 에밀리라고 해요. 그러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신가요?”
그녀의 대답에 상대방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싱긋 웃는다. 그리곤 곧장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나는 바람의 정령왕 에렐리안라고 한다.】
“예? 바람의 정령왕이시라고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는 에밀리.
정령은 속성마다 정령왕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와 계약한 정령들이 알려주었으니까.
허나 그런 그들을 직접 볼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령의 종류는 제법 많았다.
그중 세력이 제일 큰 4대 정령.
불, 물, 바람, 땅. 이 4개의 정령들이 대표적인 정령들인데 그 수가 많은 만큼 계급 또한 존재하였다.
제일 아래에 있는 등급이 하급으로 그녀가 계약한 실프와 운디네, 그리고 노움이 하급에 속하였다.
그 위로 중급과 상급의 정령이 있었는데 아직 에밀리는 마나가 높지 않아서 이들과 계약을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정령왕이라니.
그녀가 현재 이 상황을 이해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런 그녀를 본 에렐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아이야, 나는 지금 너랑 계약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란다. 단지 너의 의지에 이끌려 잠시 이곳에 들른 것일 뿐.】
그녀의 말을 들은 에밀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다. 아직 중급 정령과도 계약을 못 했는데 정령왕과의 계약이라니. 크게 미련은 없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기에 아쉬운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에렐리안이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너라면 언젠가 나와 계약을 할 자격을 얻을 것이니까.】
“아! 정말요?”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 화색이 돌며 기뻐하는 에밀리. 이를 본 에렐리안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단다. 아,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구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만나서 반가웠다, 아이야.】
“아……가시는 건가요?”
에밀리가 아쉬워하며 말하자 에렐리안은 그런 그녀를 달래듯이 입을 열었다.
【계약자 없이 내가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짧단다. 게다가 인과율의 법칙으로 다른 생명 또한 함부로 거둘 수도 없지.】
그리곤 파이샤를 보며 말을 하였다.
바닥에 쓰러진 리나드 후작에게 다가가고 있었던 그녀.
필시 그를 처리하려 하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의 목숨을 살려 주거라. 만약 그의 생명을 앗아가게 된다면 인과율의 법칙으로 나보다도 이 어린 아이가 큰 화를 입게 될 것이다.】
빈사 상태인 그를 처치하려 한 그녀는 에렐리안의 말을 듣고 그 행동을 멈추었다. 그를 죽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지만 에밀리에게 화가 미친다니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 이곳으로 많은 인간들이 오고 있구나. 아이야, 이제 나는 갈 테니 부디 다음에 볼 때는 큰 성장을 할 수 있도록 해라. 그때를 기대하겠다.】
그 말과 동시에 서서히 형체가 무너지는 그녀. 그리고 곧 바람처럼 사라졌다.
“아…….”
짧았던 만남. 사라진 그녀를 보며 에밀리는 아쉬움의 탄성을 내었다. 하지만 곧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후작의 군대가 근처까지 온 듯하였다.
이에 파이샤는 다급히 말한다.
“적들이 오고 있어. 어서, 가자. 에밀리!”
“……예.”
그녀의 말을 들은 에밀리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응?”
발걸음을 옮기자 뭔가가 그녀의 눈에 띈다.
우터의 활이었다.
반라르가 정성스레 만든 물건으로 칼슨이 그에게 하사한 활이었다. 평소에 애지중지하던 것이었는데 땅에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전투 중 떨어트렸던 것 같았다.
그것을 본 에밀리는 활을 주워들었다.
“뭐해? 어서 빨리 오지 않고!”
그녀가 꾸물거리자 급한 목소리로 재촉하는 파이샤. 그에 에밀리 또한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간다.
히이잉~
우터와 에밀리 그리고 파이샤까지 3명을 태워 그런지 말이 힘들 거 같았다. 하지만 상당히 힘이 좋고 덩치가 있는 준마여서 그런지 끄떡없어 보인다.
말 뒤편에 우터를 고정시켜 놓고 앞에는 에밀리를 앉힌 파이샤가 고삐를 잡으며 말을 하였다.
“준비는 됐니, 에밀리?”
“예.”
그녀의 말에 파이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박차를 가한다.
“이럇!”
그렇게 그곳에서 멀어지는 그들. 그들이 사라진 후 이윽고 귀족파의 병사들이 이곳에 도착하였다.
이곳을 살펴보던 한 병사가 쓰러진 리나드 후작을 발견하였다. 피투성이에 갑옷 또한 형편없이 찌그러져 있는 모습.
그것을 본 병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친다.
“여, 이기에 후작님이 계신다!”
그렇게 목숨을 연명한 리나드 후작.
다 죽어가던 그였지만 치료사들이 밤새워 매달린 끝에 겨우 몸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 * *
드레이크 성.
오늘 아침 우터가 심한 부상을 입은 채 복귀하자 큰 난리가 났었다. 물론 적들의 진군을 늦추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이렇게 크게 다쳐서 오니 다들 걱정이 되기 마련.
그들의 말로는 리나드 후작이 왔다고 하였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걱정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흠, 조만간 리나드 후작이 이곳에 당도할 것 같소.”
“라호르 평야에서 이곳까지 말을 타면 한나절이면 가니 이르면 내일쯤 도착할 거 같습니다. 다만 순찰대장님께서 놈들의 속도를 늦추었으니 하루쯤 더 늦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어허, 그렇단 말인가.”
레인의 대답에 볼튼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탄식을 하였다.
그것을 들은 루퍼트 또한 우려 섞인 표정을 하며 말을 꺼낸다.
“혹시 영주님께 연락은 왔소? 언제쯤 이곳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오?”
“마지막으로 연락이 왔을 때가 어제 저녁이었습니다. 그때 막 셀로윈 숲을 지났다고 하였으니 빨리 온다면 사흘 후에나 당도할 듯합니다.”
“흠, 그럼 그동안은 우리가 잘 버텨야겠소. 놈들의 병력이 대략 삼천쯤 된다 하였소?”
“네, 그렇습니다. 순찰대장님께서 기병과 기사들을 줄였다고 하지만 아직 병사들의 수는 건재하니까요. 어느 정도 손실이 있다고 해도 그 수는 1할에 못 미칠 거라 예상합니다.”
“하아, 만약 그렇다 해도 우리 병력의 거의 5배는 족히 넘지 않소? 이거 참 큰일이오.”
루퍼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이곳에 있는 병력은 고작 500여 명이 전부다. 게다가 그들 대부분 정규 병사가 아닌 각 마을에서 긁어모은 자경단들. 비록 며칠 동안 훈련을 했다고 하지만 그들을 정규 병사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거기다 적군은 소드 마스터가 이끌고 있는 대규모 정규 병력이었다. 그들과 맞붙을 생각을 하니 다들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히 에밀리 양이 중급 정령과의 계약에 성공했다고 하더군요.”
“오호, 그게 사실이오?”
“그것참 잘됐소이다. 그래, 어떤 정령이랑 하였소?”
“바람의 정령이라 합니다.”
“흐음, 그렇군.”
레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볼튼.
듣기로 그녀가 어제 바람의 정령왕을 만났다고 하였다. 그로 인해 리나드 후작에게서 벗어나 무사히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고 하였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중급 바람의 정령이랑 계약을 하게 된 것 같다.
어찌 됐든 이제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적군을 막아야 하는 상황. 그들은 대책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회의를 이어갔다.
* * *
이틀 후.
리나드 후작이 이끄는 귀족파의 군대가 이곳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