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왕위 계승전(11)
“허억! 저…웁!”
하지만 어느새 나타난 다른 괴한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단검으로 그의 목을 깊게 찔렀다.
푸욱.
“꾸루르륽…….”
그대로 흰자위를 드러내며 쓰러지는 병사.
그를 처치한 괴한은 칼날에 묻은 피를 시체의 옷에 문대며 닦아내었다.
그리고 그가 손을 올리자 다섯의 괴한들이 추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아까 대장으로 보였던 이가 그들에게 손짓으로 지시를 내린다.
그 신호에 그들은 수풀 속에 시체를 숨기고 바닥에 흙을 덮어 흔적을 없앴다. 그런 다음에 모두 이동했다.
소리 없이 움직여 도달한 그곳에는 짐을 가득 실은 수레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도 역시 경계병들이 보였다.
그들의 숫자는 총 5명.
중요한 곳인 만큼 지키는 이들도 많았다.
섣불리 접근한다면 바로 경고를 외쳐 일을 망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기회가 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리고 조금 후에 그 기회가 만들어졌다.
“불이다!! 저기 집들이 타고 있다!!”
“모두 불을 꺼라! 어서!!”
흩어진 몇 명이 이곳과 먼 곳의 집에 불을 질렀다.
작전은 성공했다. 그 소란에 진영은 소란스러워졌고 이곳을 지키던 병사들 또한 주의력을 잃었다. 기회가 오자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푹!
“커헉!”
선두에 선 병사가 먼저 쓰러졌다. 그러자 뒤에 있는 병사들이 놀라며 소리를 치려 하였다.
“적이…….”
서걱─
외침이 나오기 전 목을 그었다.
“우웁!”
푸욱!
앞서 달려간 이가 적의 입을 막고 목덜미를 찍었다. 그리고 이미 그곳에 도착한 대장은 나머지 병사들의 목을 베어내었다.
떼구르르.
바닥을 구르는 머리통.
억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건 이들이 알 바가 아니었다. 모든 건 지시받은 대로 할 뿐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횃불을 들었다.
그대로 수레에 실린 식량에 갖다 대자 불이 붙기 시작한다. 나머지 수레에 든 식량에도 마저 불을 붙이자 제법 큰 불꽃이 피어오른다.
“다들 수고했다. 이만 철수하도록 한다.”
조용히 말하는 그들의 대장. 그의 말과 동시에 모두들 그곳을 신속히 벗어났다.
* * *
다음날 리나드 후작은 어젯밤에 벌어진 일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처음엔 민가 몇 채에 불이 났다고 하였다. 어차피 이따위 집들이야 몇 채가 불에 타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냥 멍청한 병사들이 실수로 태워 먹었나보다 하고 흘려들었다. 허나 그게 아니었다. 다들 불난 집을 신경 쓰고 있을 때 어떤 죽일 놈들이 식량을 불태워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완전 잿더미가 되기 전에 진화하여 반절 정도는 건졌다는 것. 까딱했으면 싸워보지도 못한 채 배를 곯으며 철군을 할 뻔하였다.
거기다 마을에서 얻은 식량과 술에 독이 들어있어서 그것을 먹은 병사들이 죽거나 크게 앓아누워버렸다. 그 숫자가 많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그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물론 숲의 열매들이나 동물들을 사냥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갈 수 있긴 하였다. 하지만 그만큼 진군 속도가 늦어지기에 지금 같이 빈집 털이를 하는 경우엔 그 짓도 하기 쉽지 않았다.
“이 개새끼들! 내가 반드시 갈아 마셔 버릴 테다!!”
리나드 후작이 욕지거리를 내뱉자 그 옆에 있던 로우링 자작이 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에게 화를 내지는 않자 조금 안심하며 조심스레 리나드 후작에게 말을 걸었다.
“다들 간만에 휴식이라 조금 풀어져서 그런 걸 겁니다. 오히려 이런 일이 지금 벌어져서 다행입니다. 어느 정도 진입한 상태에서 당했다면 상황이 더 안 좋아졌을 겁니다. 액땜으로 생각하고 앞으로 조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은 들은 리나드 후작은 조금 진정이 되었다. 절반 정도가 탔지만 그래도 식량은 제법 많이 남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안 좋은 상황을 한탄하며 전전긍긍할 게 아니라 신속히 드레이크 성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래, 자네 말이 옳네. 어제 일에 내가 너무 흥분했나 보군. 맞아,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어쩌겠나. 자네 말대로 액땜한 셈 쳐야지. 대신 이제부터 경계병들을 2배로 늘리겠다. 그리고 식량은 기사들을 배치해 지키도록 하지.”
“예? 기사들에게 경계를 세운다고요?”
그 말에 로우링 자작은 깜짝 놀랐다. 물론 상황이 상황인지라 리나드 후작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오히려 맞는 말이다. 허나 기사들은 일반 병사들이랑 다르다. 오러를 이용한 압도적인 무력. 그러기에 자부심도 남다르다. 그런 그들에게 일반 병사들이나 할 법한 경계 임무를 맡기다니.
아마도 그렇게 되면 그들의 자존심은 매우 상하게 될 것이다.
“왜? 뭐 문제 있나?”
“아, 아닙니다. 다만….”
“다만? 다만 그다음엔 뭐?”
말을 하는 도중에 반문하며 말을 끌자 조금 심기가 상한 리나드 후작이 그를 다그쳤다. 그러자 기세에 눌린 로우링 자작은 이내 시선을 내리며 조용히 입을 연다.
“아,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적절하신 판단 같습니다.”
“풋, 싱겁긴. 그래, 자네도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로군. 그럼 자네가 기사들에게 이야기하도록 하게.”
“예? 제가 말입니까…….”
안 그래도 기사들이 싫어할 걸 뻔히 아는데 그 악역을 자신에게 맡기자 순간 말문이 막혔다. 허나 상대는 소드 마스터이자 자신들의 수장인 리나드 후작이었다. 이내 수긍하며 힘없이 대답하였다.
“예,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그들에게 말해두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후작님.”
“그래, 그럼 자네를 믿고 그 일을 맡기도록 하지. 수고해주게나.”
“예, 감사합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였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자 마음은 좋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리나드 후작 대신 악역을 맡음으로써 기사들의 원망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 * *
드레이크 성 영지 회의실.
현재 칼슨의 부재로 이곳은 가신들로만 자리가 채워져 있었다. 지금 그들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표정의 연유는 다름 아닌 2 왕자를 지지하는 귀족파 군들의 침입.
“다들 소식을 들으셨겠지만 2 왕자를 지지하는 귀족파의 군대가 우리 영지에 침범했습니다.”
“크윽, 이 비겁한 놈들. 감히 영주님이 자리를 비운 틈을 노리다니…….”
회의를 주관하는 레인의 말에 볼튼이 발끈하였다.
최근 그는 기사단장직을 에드에게 넘겨주고 본인은 훈련 교관을 자처하였다. 에드가 워낙 뛰어났기도 하였지만 자신도 이제 나이가 드니 기량이 쇠퇴하는 것을 십분 느꼈기에 일신상 물러났다. 칼슨 또한 그것을 흔쾌히 허락하였고.
단장직에서 나왔지만 그래도 영지에 오랫동안 공헌을 한 그에게 칼슨은 원로직을 주었다.
그 때문에 오늘 회의에도 그가 참석을 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게 놈들의 기습을 빨리 알 수 있어 다행입니다.”
“그렇소, 그것을 생각해낸 영주님의 혜안이 실로 놀랍소.”
레인의 그 말에 경비대장인 루퍼트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
그 소식을 알 수 있었던 건 칼슨이 미리 지시했던 봉화로 인해 알 수 있었다. 그는 각 마을에 적군의 침입이 있을 시 붉은색 연기를 피우라고 하였다. 붉은 연기를 뿜어내기 위해 각 마을에 약병을 하나씩 지급하였는데 그게 이번에 큰 역할을 해 즉각적으로 적들이 쳐들어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오. 적들이 침입한 이후 아직까지 피해를 입은 마을이 전무하다고 하오.”
“저도 그것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실로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칼슨은 순찰대를 이용해 각 마을에 마련한 위기 시 행동 지침. 대규모 침입이 감지될 경우 침착하게 필요 물품들을 챙겨 신속히 대피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는 순찰대가 투입된다.
“그리고 순찰대의 활약 또한 상당히 고무적이오.”
“예, 적들의 식량을 불태웠다고 하지요?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사기가 많이 꺾였을 겁니다.”
“허나 아직 그들의 병력은 그대로입니다. 식량 또한 다 태운 게 아니고요.”
볼튼과 레인의 대화에 끼어든 이는 바로 우터.
그는 칼슨이 베르호프 요새를 점령하러 가기 전 명을 받아 이곳에 왔다. 그때 전권을 위임받은 우터가 칼슨에게 받은 지시는 이랬다. 혹시 적이 이곳을 침범하면 자신에게 바로 전령을 보내고 적들의 진격을 최대한 늦추라는 것.
그리고 곧 그의 말은 현실이 되어버렸다.
“각 마을의 주민들은 지금 자경단들의 도움을 받아 이리로 오고 있소. 행정관은 놈들을 물리칠 때까지 그들을 잘 돌봐야 하오.”
“알겠습니다. 순찰대장님.”
“그리고 그리언 경은 이곳에 모인 자경단들을 맡아 최후의 방어선을 만들어 주시기 바라오.
“흠,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내 최선을 다해 그들을 훈련시키겠소.”
각 가신들에게 일을 맡긴 우터는 비장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그럼 여러분을 믿고 나는 남은 순찰대원들과 함께 놈들을 저지하도록 하겠소.”
“흐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괜찮겠는가, 순찰대장?”
그들의 말에 쓴 웃음을 보이는 우터. 괜찮을 리가 없다. 고작 몇십 명밖에 안 되는 순찰대원들을 데리고 수천의 군세를 상대해야 했으니. 하지만 자신이 아니면 그 일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괜찮소, 어차피 놈들과 직접 상대하는 게 아니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소이다.”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그를 보며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굳은 표정을 지었다. 어렵고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는 법. 모두 마음속으로 불편했다. 하지만 그 외에 이 일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휙─ 푸욱!
“커헉!”
어딘가에서 날아온 화살에 또 한 명의 병사가 쓰러졌다.
“적이다!! 모두 저쪽으로 가라!!”
“이번에는 반드시 잡아라!”
기사들의 지휘에 그곳으로 달려드는 병사들. 허나 놈들은 이미 멀리 달아났는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제길, 도대체 이게 몇 번째냐 말이다!!”
퍽.
계속되는 허탕에 화가 난 리나드 후작은 담당했던 기사를 발로 걷어찼다.
“크으윽, 죄송합니다. 리나드 후작님. 놈들이 워낙 신출귀몰해서…….”
퍽─!
“커헉!”
그가 변명을 하자 다시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날려버렸다.
“내가 그따위 변명이나 들으려고 한 게 아니다! 지금 저 녀석들 때문에 얼마나 진군이 늦어지고 있는 줄 아느냐!”
“으으윽…. 사, 사흘째입니다.”
“그래, 그걸 잘 아는 놈이 그동안 저놈들이 수작을 부릴 때마다 빈번히 이리 당하는 게 말이 되나? 응?”
“크윽, 아닙니다.”
리나드 후작의 폭언에 기사는 모멸감을 느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의 말대로 요 며칠간 놈들로 인해 계속해서 진군이 늦어졌으니까. 물론 독을 먹고 앓아누운 병사들을 챙기는 데 허비한 시간도 있었고 긴 시간 동안 경계를 해 피로와 사기가 떨어졌던 것도 속도를 늦추는 데 한몫을 하긴 했다.
어쨌든 그런 와중에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을 괴괴롭히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 게다가 어찌나 독한 놈들인지 운 좋게 사로잡을 수 있었을 때도 제 목숨을 도외시하며 그대로 죽어버렸기에 정보를 캘 수도 없었다.
“후작님, 그래도 이제 거의 숲을 벗어났으니 이런 수작은 더 이상 못 부릴 겁니다.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로우링 자작의 만류에 그도 자신이 너무했나 싶어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았다.
“크흠, 알겠네. 자네 말대로 이제 개활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허나 늦어진 만큼 더욱더 속도를 올려야 할 것이야.”
“하하, 그래야지요. 그래도 그날 이후로 식량을 습격당한 일은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병력들 또한 그대로고요.”
그의 말이 맞다. 시간이 좀 늦어졌다 뿐이지 그들이 큰 손해 본건 없었다. 게다가 곧 있으면 이 지긋지긋한 숲도 벗어난다. 이제 며칠 만 있으면 저 망할 드레이크 놈들의 저항도 끝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리나드 후작은 심호흡을 하며 다시 진군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그들이 이동을 하고 한참 후 어느덧 넓은 개활지가 나타났다. 늦가을이라 그런지 아직 들판에 갈대가 많이 자라나 있었지만 그래도 사방이 나무로 막힌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후우, 이제 좀 살 것 같군.”
환하게 트인 하늘을 보자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해가 저물고 있어 노을이 진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기까지 하였다. 뒤돌아 병사들을 보니 그들 또한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게 그동안의 노고가 어땠는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자, 이제부터 속도를 올리자. 어서! 놈들의 본대가 오기 전에 빨리 성을 점령해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리나드 후작님!”
그의 명에 따라 기사들은 병사들을 다그쳐 걸음 속도를 높였다. 지쳐있던 병사들이었지만 그래도 트인 곳에 나오니 한결 나은 표정으로 그 지시에 따랐다.
그렇게 그들이 다시 이동하기 시작할 때.
쉬이이이이익─────
푸욱!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며 날아온 화살.
그것은 전방에 있던 한 기사의 투구를 꿰뚫었다.
“꺼어억!”
단말마와 함께 그대로 절명하는 기사. 그대로 몸이 기울며 말에서 떨어졌다.
쿠웅!
갑작스런 사태에 모두들 충격에 빠졌다.
화살이 날아오는 낌새는 소드 마스터인 리나드 후작조차 느끼지 못했을 정도.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이 있다.
보고에 의하면 드레이크 군에 귀신같이 활을 잘 쏘는 이가 있다는 것.
그는 안력을 최대한 주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대략 일천 보는 월등히 넘을 만한 거리. 그곳에 한 남성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