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왕위 계승전(10)
“뭐라고 병사?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이곳에 왜 병사들이 와!”
촌장이 영문을 몰라 자초지종을 묻자 그는 재차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영지의 병사가 아닙니다!! 들어오는 방향을 보건대 분명 로우링 영지에서 넘어온 게 분명합니다!”
“뭐?”
촌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다른 영지에서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 말은 곧 적들이 쳐들어왔다는 것. 그러고 보니 두 달 전 이곳에 파견된 순찰대원의 말이 떠올랐다.
“촌장, 이제 우리 영지는 영지전에 참전하게 되었소. 그리고 만약 적들이 온다면 이쪽으로 올 확률이 매우 크오. 그러니 만약 대량의 병사들이 오면 내가 일러준 대로 행하시오.”
매우 진중한 얼굴로 말했던 그의 말.
그것이 불현듯 떠오르자 나루프는 푸르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빨리 외부로 나가 있는 자경단원들을 불러들여라.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대피령을 내려! 어서!!”
“예? 왜 그러십니까? 촌장님!!”
촌장의 분위기가 갑자기 변하자 영문을 모르던 그는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나루프는 그를 보며 분명한 목소리로 말한다.
“적이다! 로우링 영지에서 온 그 병사들은 우리 드레이크 영지를 침범한 적이란 말이다!! 시간이 없다, 푸르. 어서 내가 말한 대로 자경단원들을 불러들이거라.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빨리 알려. 적이 쳐들어왔으니 도망가라고!!”
“허걱! 저, 적이라고요? 아…! 알겠습니다, 촌장님.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적이란 말에 사색인 된 푸르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막 문을 나서려는 그에게 촌장은 당부하듯 재차 입을 연다.
“서둘러야 한다, 푸르! 적들이 이리 오기 전에 빨리 대피해야 해!”
“예!!”
덜컥.
촌장의 말을 뒤로한 채 밖으로 사라진 푸르. 그런 그를 보며 나르푸 또한 자신이 할 일을 하기 위해 무언가를 찾았다. 창고에 있는 짐들을 뒤적거린 그는 어느 물건을 집어 들더니 문밖으로 나왔다.
밖을 나와 보니 마을 사람들이 피난을 가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다들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큰 혼란 없이 침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루프는 그래도 다행스런 얼굴을 하였다. 영주의 지시로 두 달에 한 번 대피 훈련을 했던 것이 지금 크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조금 안심한 그는 다시 서둘러 자신이 할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붉은 액체가 든 병이랑 부싯돌. 그것을 들고 그는 마을 공터 쪽으로 서둘러 뛰어갔다.
“하아, 하아…….”
다급히 움직여서 그런지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쉴 순 없었다.
눈앞에 있는 마른 건초 더미들. 그는 지체 없이 거기에 병에 있는 액체를 뿌렸다.
치이익.
매캐한 냄새가 그의 코를 찔러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이 구겨졌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당장 해야 할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그 역한 냄새를 참으며 손에 든 부싯돌을 키기 시작하였다.
치칙! 칙!
“제길!!”
오랜만에 키는 부싯돌이라 잘되지 않는다. 그래도 답답한 마음을 뒤로한 채 계속 시도하였다.
치이익! 파직!
화르르르─
마침내 불똥이 건초더미에 튀면서 불이 번지기 시작. 삽시간에 불은 활활 타올랐다. 불타오르며 올라오는 검은 연기.
그것은 이내 색깔이 점점 바뀌더니 붉은색을 띠기 시작하였다.
“후우…….”
할 일을 마친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느새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닦아 내었다.
이제 다른 마을에서도 적의 침입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곧 영지 전역으로 이 소식이 퍼질 터.
한시름 놓은 그는 잠시 숨을 돌렸지만 아직 할 일은 남아있었다.
이때를 위해 칼슨이 마련한 적 침입 시 행동 지침.
그것을 하기 위해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 * *
고요한 숲의 정적을 깨는 부산스런 소음.
그 소리에 놀란 동물들이 눈을 크게 뜬 채 숲속 깊은 곳으로 도망친다. 새들 또한 저마다 경계를 표하듯 지저귀며 이곳저곳으로 이동. 주변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이런 변화는 종종 이곳을 지나는 무리들이 올 때마다 겪는 현상이었지만 오늘따라 그 느낌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저벅저벅
굵은 발걸음 소리.
허나 한 사람이 아니다.
저벅저벅저벅저벅저벅─
열 명 아니 몇백은 아득히 넘는 수의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위로 높이 솟아오른 창대가 마치 고슴도치 같이 빼곡하게 정렬해있다. 그리고 가슴과 어깨에 철판을 덧씌워 입혀진 갑옷들. 그것은 영락없는 병사들의 생김새였다.
다그닥 다그닥.
선두에서 말을 타고 무리를 이끌고있는 이들.
그들은 뒤에서 걸어 다니는 이들과 달리 전신이 쇠로 이루어져 있는 전신 갑주를 입고 있었다. 전형적인 기사들의 모습. 그들 중 유난히 화려한 갑옷을 입은 이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하였다.
“크크, 여기 주변 경관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리나드 후작님.”
“흠, 뭐 바람도 선선히 불고 햇살도 좋은 것이 제법 나쁘진 않군.”
그자의 말에 동조하는 붉은 머리의 건장한 남성. 상대의 화려한 갑옷 대신 새하얀 은빛의 갑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조금 수수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은은한 광택이 분위기를 주고 있어 꽤나 고급스러워 보인다.
머리색만큼이나 수염도 붉은 그 사람. 바로 귀족파의 수장인 리나드 후작이었다. 그는 이어서 상대에게 질문을 하였다.
“로우링 자작, 그런데 이제 곧 드레이크 영지에 진입하지 않는가, 혹시 우리가 여기에 와있다는 것을 드레이크 놈들이 눈치챈 것은 아니겠지?”
“하하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리나드 후작님. 제가 혹시 몰라 여기를 드나드는 상인들조차 알 수 없게 일부러 다른 곳으로 돌아왔으니까요.”
“흐음, 그렇긴 하지. 그래서 이곳까지 오는데도 제법 시간이 걸렸고 말이야.”
그의 말에 여유로운 표정을 하며 말하는 로우링 자작. 리나드 후작도 그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드레이크 자작도 참 안 됐습니다. 그냥 본인 영지나 얌전히 지키고 있지 괜히 공에 눈이 멀어 베르호프 요새까지 가다니요. 이렇게 코앞에 적들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허허, 그래도 그자 때문에 우리가 숨통이 트였다네. 그가 비록 3 왕자 측에 서서 우리랑 대치하고 있지만 그걸 제외하고 본다면 대단히 뛰어난 자지.”
리나드 후작이 그를 칭찬하자 조금 샘이 난 로우링 자작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인다.
“크큭, 그래봤자 뭐합니까? 줄을 잘못 서지 않았습니까? 저처럼 처세가 좋아서 리나드 후작님에 붙었어야지 그 능력은 뛰어날지언정 정세를 보는 눈은 어두운 것 같습니다.”
“하하, 그건 그렇지. 그래서 내가 참 안타까워. 앞길이 아직 창창한 젊은이를 내가 짓밟는 꼴이 되었으니까. 하하하.”
“하하하, 저도 그 일을 동조하게 되어 맘이 참 안 좋습니다, 리나드 후작님.”
“크하하하, 뭐 어쩌겠는가? 그게 그자의 운명인걸. 자네는 나와 함께 승자의 기쁨을 누리면 된다네.”
“예, 후작님. 흐흐흐.”
그렇게 그들이 즐겁게 웃고 있을 때. 전방에 보내놨던 정찰병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리나드 후작님.”
“그래, 뭐 특이사항이라도 있느냐?”
“네, 아직까진 별로 없습니다. 다만 전방에 마을이 하나 보였습니다.”
정찰병의 보고를 받은 리나드 후작. 그의 눈이 가늘어지기 시작하였다.
“마을? 그래, 드레이크 놈들의 마을인가 보군. 크기가 대충 어떻게 되는가?”
“대략 집이 50여 채 정도 됩니다.”
“흠, 제법 큰 마을이로군. 혹시나 이쪽을 눈치채진 않았나?”
“멀리서 그 규모만 봤기 때문에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마을이 조용한 것으로 봐서 눈치를 챈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로우링 자작에게 말하였다.
“그렇군. 그럼 로우링 자작, 어서 그곳을 점령하도록 하지. 병사들도 지쳤으니 휴식도 취해야 할 터.”
“예, 알겠습니다. 리나드 후작님. 여봐라, 어서 속도를 높이도록 해라. 오늘은 마을에서 머물도록 한다!”
“예. 알겠습니다.”
로우링 자작의 명을 받은 기사들은 후위의 병사들에게 가 명을 하달하였다.
“자, 어서 서두르자. 놈들의 영토에 들어선 이상 이제 저들이 알아채는 것은 시간문제이니까.”
“예, 리나드 후작님.”
그렇게 진군 속도를 높인 귀족파의 병력들. 날이 어두워지긴 전에 그들은 마을에 도착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뭐야, 이런! 마을이 텅 비었잖아!”
이미 쥐새끼 한 마리 없이 텅텅 비어버린 마을. 그 모습을 본 리나드 후작은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집안에 식량이나 술들이 있는 것을 보아 급하게 여기를 떠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놈들이 이미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놈들의 본대가 오기 전에 성을 점령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군.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도록 하지. 로우링 자작.”
“예, 리나드 후작님. 그런데 이곳에 있는 식량이나 술은 어찌 처리하는 것이 좋을까요?”
로우링 자작의 물음에 미간에 주름이 접힌 리나드 후작. 그냥 손사래를 치며 귀찮다는 듯 말하였다.
“그냥 병사들보고 알아서 가지라고 해. 그나마 전리품이라도 있어야 사기가 좋아질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로우링 자작은 그의 말대로 일을 처리하였다.
서둘러 취침 자리를 만들고 불침번을 세우며 밤을 보내기 시작하는 귀족파의 군사들.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저녁거리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불을 피우고 솥에 넣은 물을 끓이며 거기에 각종 건조된 식량들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제법 맛있는 냄새들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곧 스튜가 익어가며 다들 한 그릇씩 먹기 시작하였다.
쩝쩝쩝.
오늘 하루 동안 계속 걸어 다녀서인지 허기가 진 병사들은 순식간에 그릇을 비워갔다.
그들이 그렇게 식사를 하고 있을 때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얼굴 또한 복면을 하고 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 또한 검다. 게다가 들고 있는 날붙이는 흙먼지를 묻혀서인지 전혀 광이 나지 않는다. 대략 스무 명 정도의 그들은 그들만의 수신호를 사용하여 빠르게 의사전달을 취한다.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가리키며 지시를 하자 그걸 본 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렇게 흩어지자 대장처럼 보이는 자 또한 몸을 어둠으로 숨기며 자리를 떠났다.
* * *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들. 전체 병력이 대략 3천 가까이 되니 경계를 서는 이들 또한 수십 명이 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각자 맡은 구역은 정해져 있는 법.
제일 어두운 곳에 위치한 경계병들.
방금 식사를 마치고 교대를 하였기에 연신 졸음이 쏟아진다. 허나 만약 이대로 잠이 든다면 엄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걸 아는 그들은 얼굴을 세게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가 나왔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괴한. 그들은 병사의 등 뒤로 접근했다.
스윽.
“욱! 우욱!”
서걱-
그대로 입을 막고 단검으로 목을 베었다. 목에서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는 병사. 그의 신형이 마치 줄 끊긴 인형처럼 그대로 무너져버렸다.
철퍼덕.
낯선 소리를 듣고 그곳을 향한 동료 병사. 자신의 동료가 죽은 모습을 보자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