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왕위 계승전(3)
“허어억! 사, 살려줘!!”
“으아아!! 괴물이다!!”
생존에 대한 본능이 살아나며 여기저기 도망치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냥 이대로 두면 삽시간에 대열이 무너질 게 자명할 터. 지휘를 하던 기사들은 그들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하지만 그때.
쉬이익────! 퍽!
“커억!”
쉬익──! 푹!
“켁!”
쉬이이이익────! 푹 푹 푹!
“크악!”
“꾸엑!”
“커헉!”
쥐도 새도 모르게 그들을 쓰러트리는 화살.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적의 지휘관만 귀신같이 알아내 처리하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신기와도 같은 모습을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병사들을 지휘할 이가 없자 그대로 무너져버리는 로메로 군의 전열. 도망가는 병사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다.
“으아아!! 살려줘!!”
“괴물이야! 괴물! 으허어억!!”
“사람 살려!!!”
우르르르르
마침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빠져나가는 로메로의 병사들. 그 모습을 본 로메로 백작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른다.
“이놈들아! 왜 도망가느냐! 어서 싸워라! 적의 숫자가 우리보다 적은데 왜 도망가느냐!!”
하지만 멀리 있는 그의 소리는 전방의 병사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살고 싶다는 본능에 충실할 뿐이었다.
“기마병들은 준비하라!”
칼슨의 나지막한 소리에 어느덧 선두에 있던 방패병들이 좌우로 움직이며 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사들을 앞세운 기마들이 튀어나오기 시작. 그 수가 단숨에 100여 기로 늘어나며 적들을 향해 달려든다.
“놈들을 놓치지 마라!!”
“드레이크 군의 무서움을 보여주자!”
선두에 선 기사들을 필두로 매섭게 몰아치는 드레이크의 기마병들. 로메로 군에 비해 그 수는 불과 1할이 좀 넘는 수준이지만 이제 그런 병력의 우위는 의미가 없었다.
푹! 서걱! 푹! 푹!
양 떼들 사이를 유린하는 늑대들처럼 일방적으로 적들을 학살. 곧이어 그 뒤를 따르던 창을 든 200여 명의 보병들이 나머지 잔당들을 청소하듯 처리하였다.
이제 추가 완벽하게 기울어진 전세.
“이, 이건 꿈이야! 말도 안 되지. 그럼 이게 말이 돼? 하하하하!”
정신이 나간 듯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얼이 빠져버린 로메로 백작. 그런 그의 앞에 어느새 적의 기사들이 다가왔다.
서걱─!
“어?”
목에서 느껴지는 진한 통증.
시선이 뒤집히며 서서히 어두워진다.
툭.
바닥에 떨어진 그의 머리.
아직도 그의 눈은 동그랗게 떠진 채로 있었다.
마치 죽기 직전까지 의문을 표하듯이 말이다.
“로메로 백작이 죽었다!”
로메로 백작의 머리를 집어 든 에드.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와아아아아!!!”
“페이런 경께서 로메로 백작을 베었다!”
적의 수장을 잡았다는 이야기에 드레이크 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반대로 적의 사기는 이제 한 줌도 남지 않은 상황.
그 모습에 칼슨은 미소 지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에드가 잘 해냈군.”
“네, 페이런 경이 적의 수장을 베어 냈나 봅니다.”
그의 옆에 있는 우터가 대답하였다.
“다 자네 덕이지 그리고 에밀리도.”
“저보다도 에밀리의 역할이 컸습니다. 설마 그런 식으로 정령의 힘을 이용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뭘 그런 거 가지고. 조금만 머리를 굴렸다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어.”
힘을 많이 써서 그런지 옆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에밀리.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적의 기사단이 방패병에게 들이닥치기 전 에밀리가 바람의 정령 실프를 이용하여 우터에게 기사단장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저격.
그 뒤로 다른 지휘관들의 위치마저 파악하여 우터가 그들을 모조리 처치할 수 있게 도왔던 것이다.
원래 칼슨은 에밀리를 전투에 데려가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자신도 꼭 도움이 되고 싶다며 끝까지 고집을 부리기에 결국 같이 오고 말았다.
칼슨은 그녀가 전쟁터에서 위험한 일을 겪을까 걱정을 하였지만 오히려 그녀는 정령으로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 능력 중 하나가 바로 광범위한 정찰.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프로 그녀가 탐색할 수 있는 범위는 무려 반경 5km.
그 범위 안에서 그녀는 웬만한 사항들을 다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실프는 보통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다.
마나에 민감한 자가 아니면 절대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저 바람이 분다고만 느낄 뿐.
말 그대로 스텔스 정찰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물이었다.
사람이 생존에 제일 필수인 것이 무엇인가?
첫째로 산소 즉 공기다.
공기가 없으면 보통 사람은 3분도 버티기가 힘들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물.
물이 없으면 3일을 넘기기 어렵다.
물에 빠지지 않는 이상 딱히 이곳에서는 공기 없는 상황을 맞닥뜨릴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물은 다르다.
특히 음용이 가능한 물은 늘 휴대해야 하는데 개인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무게는 한정돼있다.
그렇다고 늘 호수나 깨끗한 강물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물이나 연못 같은 경우 늘 독이 있는지, 음수로 활용 가능한지 확인해야 한다.
거기다 식량을 조리할 때도 물은 필수.
그녀의 정령 운디네는 말 그대로 휴대용 정수기나 다름없었다.
비록 에밀리의 마나가 소모된다 하지만 현재 그녀의 마나로 하루에 1,000명분의 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니 그녀만 있다면 식수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함정을 만들기 용이하였다.
땅의 정령 놈의 주요 능력 중 하나는 땅파기.
심지어 땅속 깊이 들어가 땅 안쪽만 파는 것도 가능하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싸우는 도중에도 적에게 함정을 설치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자 칼슨은 에밀리가 정말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특히 오늘 전투에서 그 역할이 얼마나 대단한지 확실하게 체감하였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추후에 더 높은 등급의 정령이랑 계약하면 정말 엄청나겠어.’
정말이지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다.
그리고 이번 승리의 주축이 된 방패병.
햄을 비롯해 힘 좋고 무게감 있는 자들을 모아 만든 탱커부대. 그들을 위해 특제 방패와 갑옷도 맞추어주었다.
대한민국 전경을 생각하며 만들었지만 칼슨은 그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켰다.
매우 견고하고 단단하게 만들어 적의 기마도 막아낼 수 있는 마치 걸어 다니는 성벽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많은 수를 키우진 못했지만 그래도 이번 전투에서 그 위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렇게 칼슨이 생각하고 있는 동안 전장은 빠르게 정리되어 갔다. 아직 백작령의 군대가 제법 남아있지만 이미 수장이 죽고 나머지들도 사기가 바닥이기에 이곳을 점령하기엔 어렵지 않을 것이다.
* * *
드레이크 군의 승전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애초에 별 신경도 안 썼던 변방의 영지였다.
게다가 1 왕자나 2 왕자에 붙은 게 아니라 3 왕자를 지지한다고 나섰다.
다들 처음에 칼슨을 정신이 나간 놈마냥 취급을 하였다.
세력도 세력이지만 3 왕자의 근거지는 왕국 서부.
그런데 드레이크 영지는 중앙 남부 쪽에 위치해 있었다.
말 그대로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황.
그런데 그가 로메로 영지를 점령하면서 서부파와 이어지는 통로를 마련하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국왕파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다.
귀족파와의 대승으로 한참 기세가 오른 국왕파에게 찬물을 끼얹은 거나 다름없는 상황.
이에 그들은 칼슨 드레이크에 대해 재평가를 하였다.
변방의 작은 영주에서 떠오르는 신성으로.
마치 자신들의 사령관인 유콘과 대적할 만한 그런 적으로 격상하였다. 누구는 지나친 우려라고 하였지만 당사자인 유콘의 생각은 달랐다.
그 또한 처음에 그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드레이크 군이 로메로 백작령에 쳐들어간다고 하였을 때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병력도 병력이지만 적진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리스크가 컸다.
지형이나 지리에 익숙하지 않고 식량이나 식수의 보급 또한 원활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거기다 병력 또한 상대가 2배였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상황.
당연히 그가 생각하기에 드레이크 군이 하는 행동은 미친 짓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예상은 보기 좋게 깨졌다.
상대의 절반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한 것이었다. 그것도 듣기로는 병력의 손실이 거의 없다고 하였다.
‘그게 가능한가?’
유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칼슨 드레이크 그자가 자신보다 역량이 뛰어나다는 말이니까.
그렇게까지 생각한 유콘은 그를 자신의 대적자로 여겼다.
당사자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국왕파에서도 자연스레 그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폭풍처럼 나타난 신예의 등장이었던 것이다.
국왕파의 상황이 안 좋아졌지만 반대로 귀족파는 숨통이 트였다.
베르데 평원에서의 패배로 인해 기세가 많이 꺾였는데 국왕파가 곤란한 상황이 되자 다시 기운을 차리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보면 칼슨은 그들에게 고마운 존재.
허나 당장은 그럴 수 있지만 미래에는 두려운 적이다.
게다가 그의 영지는 자신들의 근거지랑 너무 가까이 붙어 있다.
체키스 산 북쪽과 동쪽이 대부분 귀족파의 영역. 남쪽에는 드레이크 영지였다. 그 모양새가 마치 턱밑에 칼이 겨누고 있는 느낌.
그러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여간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장 분위기는 올랐지만 이제 새로운 적에 대해 고민이 많아진 귀족파. 그들은 칼슨의 존재로 인해 앞으로의 전략을 대폭 수정해야 했다.
* * *
왕국 남서부에 위치한 카포니아 자작령.
프란츠 카포니아 자작이 영주로 있는 이곳은 자작령 치고 제법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험한 산지이기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많이 없다. 그 말은 즉 인구도 그만큼 적다는 것이다.
카포니아의 영주가 머무는 드하임 성.
카포니아의 도시인 에데부르에 있는 이 성은 그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나름 오래전부터 이곳에 자리 잡았던 유서 깊은 성이었다.
그런데 평소 한적했던 이곳에 웬일인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 이유는 바로 서부파의 수장인 바스테르 백작과 최근 로메로 백작을 무너뜨린 칼슨과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거 요즘 떠오르는 신성을 만나서 무척이나 반갑구먼, 드레이크 자작.”
“저야말로 왕국에 다섯뿐인 소드 마스터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바스테르 백작님.”
서로 악수를 하며 화답하는 두 사람.
칼슨을 보며 연신 미소가 끊이지 않는 바스테르 백작이었다.
그럴 것이 그동안 이렇다 할 성과가 없던 서부파에 큰 승리를 안겨다 준 칼슨의 존재는 더나 없이 소중하였다.
“그래, 여기까지 오느라 불편한 점은 없었는가?”
“네, 백작님 덕분에 편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뭘, 그게 나 때문이겠는가? 자네 명성이 워낙 높아서 그런 것이지. 하하하!!”
“백작님이 그렇게 제게 금칠을 해주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가 형성되고 있을 때 그런 그들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는 이가 있었다.
‘쳇, 그게 뭐 대단한 일을 한 거라고 저렇게 추켜세운담?’
밝은 오렌지색 머리의 사내.
대략 서른 정도 들어 보이는 그 남성의 이름은 베른 모스크.
모스크 자작령의 영주이며 칼슨이 서부파로 들어오기 전까지 바스테르 백작에게 총애를 받던 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십 대 초반부터 오러를 터득한 천재.
지금은 소드 마스터를 목전에 두고 있는 최상급의 기사였다.
그런 기대주였기에 바스테르 백작이 그를 중히 여겼던 것.
그렇게 인정을 받고 있던 그가 갑자기 칼슨이라는 저 애송이 놈 때문에 찬밥신세가 된 느낌이었다.
‘로메로 백작 따윈 나도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고.’
직접 겪어보진 않았지만 저런 놈에게 일방적으로 깨졌다는 걸 보니 형편없는 녀석이었다는 걸 알 것 같다.
그렇다면 망설이지 말고 단숨에 그곳을 공략할걸.
그 기회를 놓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저 새끼는 또 뭐야?’
노골적으로 자신을 적대하듯 본다.
저렇게까지 쳐다보니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눈빛을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예전에 올슨이 자신을 보던 그 눈빛.
진한 멸시와 질투가 담겨있는 시선이었다.
그걸 상기하자 기분이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칼슨 또한 놈에게도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씨익.
놈만이 볼 수 있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명백한 조롱과 비웃음이 담긴 그런 표정.
그것을 본 녀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