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대련
넓디넓은 공간.
천장 또한 사람 몇 사람의 키만큼 높이 솟아 광활하다 못해 휑한 느낌마저 들 정도.
그러나 그곳에 새겨진 화려한 음각 문양들이 그런 단점들을 메워주었다. 아름다운 꽃부터 사람, 그리고 드래곤 같은 무서운 몬스터까지. 꽤나 정교하게 조각된 부조들이 그곳의 허전함을 완벽하게 채워주고 있었다.
그런 그곳에 한 여성과 남성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새하얀 백금발의 여성이 소리쳤다.
다소 성이 나 있는 언성. 그 울림이 실내를 채워갔다.
“제가 제 동생을 도우러 간다는데 그게 왜 문제가 된다는 겁니까?”
재차 울리는 그 목소리. 허나 상대는 미동조차 없었다.
매우 큰 덩치의 사내.
짙은 갈색의 머릿결을 단정하게 정돈하여 매우 깔끔해 보였지만 그 인상이 그걸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무섭게 생겼다.
눈에 큰 음영이 질 정도로 푹 튀어나온 눈썹 부위. 그 양옆으로 도드라진 광대를 따라 내려가는 굵은 턱은 그가 매우 강인할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이윽고 그 동상 같던 남성이 입을 열었다.
“왕실의 명이다.”
소리가 크지 않았지만 짧고 명료했다. 그러기에 더욱 단호하게 들리는 그 음성. 허나 여성은 그에 굴하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번 그에게 대항한다.
“왕실의 명이라고요? 당장 제 동생이 죽을지 모르는데 지금 그깟 명을 지키라는 겁니까?”
“무엄하다! 네가 지금 왕실의 명을 업신여기는 것이냐?”
조금 더 감정이 섞인 듯 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의 얼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냉철한 모습에 더욱 화가 난 여성은 다시 그 의지를 이어 목소리를 내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 망할 명령 때문에 제 가족도 지키지 못한다면 당장 그래야죠!”
분한 듯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허나 상대는 그저 단호한 태도로 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너는 왕실기사단이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벽에다 대고 말한다고 해도 이보다 답답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여성은 화를 참지 못하며 가슴의 문장을 떼어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땅에 던지며 외쳤다.
“그렇다면 전 왕실기사단을 나가겠습니다!”
왕실기사단을 상징하는 사자 문장.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지난 노력의 산물이자 분투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부심이었다.
그녀의 어깨에서 감정이 새어 나오는 미세한 떨림이 보인다.
그런 그녀를 본 사내.
한결같던 그자도 사람인지 마침내 진한 감정이 터져 나왔다.
“네가 감히 왕실을 명을 어기고 기사단의 명예를 떨어뜨리느냐!”
“…….”
“여봐라! 어서 이자를 끌고 가라!”
그 성난 목소리에 다급히 다가온 기사들. 그자들도 그녀의 사정을 알기에 그 표정이 편치 않았다.
“당장 데려가지 않고 뭐 하는가!”
점차 올라가는 그의 언성에 그들 또한 곤란한 입장이 되었다. 허나 상관의 말을 거부할 순 없는 법. 게다가 그 이유는 알지만 그녀가 벌인 일은 분명 항명이었다. 항명은 곧 즉결처분.
“미안하다, 세리나. 우리도 어쩔 수 없다.”
“동생 일은 안됐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
“…….”
상관의 성화 때문인지 동료들의 말 때문인지 그녀는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감정이 복받쳐 일을 벌이긴 하였지만 그녀도 지금 당장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그곳을 나갔다.
이윽고 혼자 남게 된 남성. 그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이렇게 그녀를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지 않다면…….”
진한 회색머리의 사내의 말에 강인해 보이는 그 남성은 중얼거리듯이 읊조렸다. 그에 머쓱한 표정을 보이며 다시 말을 이어가는 회색머리의 사내.
“그래도 경께서 그녀를 꽤 아낀 것으로 압니다만…….”
“리단!”
회색머리 아니 리단의 말을 단호한 어조로 끊어버리는 남성. 리단은 순간 말을 잇지 못하며 입을 닫고 만다.
잠시의 정적. 이윽고 남성의 입에서 나온 조용한 한마디.
“세리나 드레이크는 항명의 죄로 반년간 이민족 토벌에 임한다.”
“이민족 토벌 말입니까?”
북방의 이민족이라면 치가 떨릴 정도로 상대해봐서 잘 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 피해가 어마어마하기에 늘 주기적으로 토벌대를 보내고 있지만 병사들의 피해가 만만치 않다. 왕실기사단도 지원을 해주긴 하지만 그건 형식적인 절차일 뿐 이렇게 장기적으로 파병을 하진 않았다.
“그녀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녀는 죽지 않는다. 설사 죽는다고 해도 지금 여기에 놔둔다면 필히 죽게 될 터. 차라리 전장에서 죽는다면 최소한 명예는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말을 멈춘 리단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물론 10할 장담은 못 하지만 리단 또한 그녀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지옥의 유황처럼 독한 이민족들이지만 그녀 또한 그 독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
어찌 되었든 사내는 자신의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그녀를 챙겨주었다.
앞으로 이겨내야 할 것들은 온전히 그녀의 몫.
마음속으로 그녀가 잘해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 * *
잠시 상념에 빠졌던 세리나가 눈을 떴다.
앞을 보니 자신의 얼빠진 동생이 서 있었다. 그렇게 지켜주고 싶었던 그가 보란 듯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당당히 서 있었다.
‘그래, 지금은 대련 중이었지.’
솔직히 그가 영지전에 승리했다는 소식보다 오러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더 마음이 동했다.
어렸을 때부터 검술에 재능이 없던 동생.
그 때문에 배다른 다른 형제로부터 얼마나 괄시를 받았는가. 그것을 알기에 그의 성장이 더욱 더 반가웠으리라.
‘어찌 됐든 지금은 대련에 집중해야겠지.’
“자, 준비됐어? 그래도 선공은 양보할게.”
그녀의 말에 칼슨 또한 자세를 잡으며 대답한다.
“알았어. 그럼 시작한다.”
이제 막 오러를 쓰기 시작한 남동생. 아마 처음이라 많이 서툴 것이다. 검술 또한 제법 늘었겠지만 그래도 많이 부족하리라. 그렇게 그녀가 생각하고 있을 때.
지이이잉.
칼슨의 검에서 오러가 피어오르자 그녀는 잘못 본 듯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았다. 하지만 점점 커지는 그녀의 눈동자.
“마,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다는 그녀의 표정.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이 벌어진 것도 모른 채 그대로 멈춰 버렸다.
눈앞에 보인 새하얀 오러.
그것은 분명 자신의 오러보다 더 진하고 선명한 것 같았다.
‘왜 저렇게 놀라지?’
방금 전까지 자신만만해 하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얼빠진 표정까지 하고 있다. 설마 자신을 상대로 그 정도의 여유는 있다는 것인가?
‘어디 왕실 기사단은 얼마나 강한지 한 번 볼까?’
조금 발끈한 칼슨은 그녀를 향해 튀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야아아압!”
“어? 앗!”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는 칼슨을 보며 정신이 돌아온 세리나. 본능적인 감각으로 순식간에 오러를 끌어 올렸다.
위이이잉!
쾅! 파지지지직!
칼슨의 새하얀 오러와 달리 붉은 기운이 도는 그녀의 오러. 그 두 개의 오러가 부딪히며 강한 풍압을 일으켰다.
“크으으윽!”
예상 밖의 위력에 신음 소리를 내는 세리나. 왕실 기사단 중에서도 이런 위력을 낼 수 있는 이는 몇 없었다.
‘이게 막 터득한 오러라고?’
만약 그 말을 듣지 않았다면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그 오러는 가히 최상급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현재 자신의 경지로는 맞붙기에 매우 벅찼다.
‘응, 뭐지? 봐주는 건가?’
예상보다 상대하기 수월하자 칼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상대의 오러 수치가 자신의 지배치 보다 낮다는 것을 생각해내었다.
‘아, 내 오러가 더 강해서 그런 거였어?’
그녀의 오러 수치는 11. 칼슨은 14였다. 겨우 3 차이이긴 하지만 등급은 B와 A. 확실히 그 급이 달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뭐야? 왕실 기사단이라 엄청 쎌 줄 알았는데 고작 이정도야?”
“이런, 망할 동생 놈이!!”
칼슨의 이죽거림에 발끈한 세리나는 순간 욕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상대의 오러는 매우 강력하였다. 자신의 오러가 점차 밀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몸을 틀어 상대의 공격을 흘려버렸다.
‘어?’
비틀-
몸의 중심이 흐트러지자 그대로 엎어질 뻔한 칼슨. 순간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어 낸다. 하지만 세리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조심해라. 동생아!”
그 말과 함께 그녀의 오러가 얇게 압축되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런 젠장할!’
딱 보니 이게 그녀의 비전 검술인 듯했다. 스킬 설명에 분명 사각으로 공격이 들어온다 했는데, 과연 그 말대로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허나 이미 그것을 알고 있던 칼슨은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치이익───
오러에 머리가 스치며 몇 가닥 쓸려나갔다.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허나 피하고 보니 이번엔 칼슨에게 기회가 왔다. 막 스킬을 쓴 세리나가 그대로 무방비 상태였으니까.
“간다!”
상대가 비전 검술을 쓴 이상 더 이상 꺼릴 길게 없었다. 호흡을 멈추고 의식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런, 망할! 날 죽일 셈이야?!”
칼슨이 비전 검술을 보이려 하자 세리나는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칼슨의 비전검 술에 그녀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비전 검술-그림자’를 사용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발동된 스킬. 그러나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반적인 베기.
당연히 그에 반응한 세리나는 손쉽게 그것을 막는 듯하였다. 하지만.
퍼어억!
“꺄아아아악!”
등 뒤에 매서운 충격을 느끼며 그대로 자지러지는 그녀. 다행히 갑옷으로 인해 치명상을 입진 않았지만 오러의 충격이 제대로 전해진 듯 바닥에 드러누운 채 일어나질 못한다.
그걸 본 칼슨. 사색이 된 얼굴로 다가갔다.
“괘, 괜찮아?!”
시험 삼아 스킬을 썼지만 나름 다치지 않게 힘을 조절하였다. 그런데도 저렇게 뻗어버릴 줄이야.
등 부분의 갑옷 부위를 살펴보니 우그러진 게 제법 피해가 커 보인다. 그렇게 그가 걱정하고 있을 때.
“이야아아아!”
벌떡.
괴성을 지르며 일어나는 세리나. 바닥에 얼굴을 박아서인지 코에서 코피가 흘러나왔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칼슨을 보자 그를 붙잡으며 제법 흥분한 듯 톤을 올리며 물었다.
“칼슨! 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크으윽!”
그 쩌렁쩌렁한 울림에 귀가 아파 오자 칼슨의 미간이 심하게 접혀온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세리나는 연이어 그에게 질문 공세를 하였다.
“정말 오러를 쓴 지 얼마 안 된 거야? 아니 그 비전 검술은 또 뭐고! 응?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
갑자기 머리가 아파 오는 칼슨. 솔직하게 이야기해줄 수도 없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던 순간. 번뜩이는 뭔가가 떠올랐다.
“저,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도대체 뭔데, 뭔데!”
말문을 열자 더욱 보채기 시작하는 그녀. 이윽고 칼슨이 흐릿한 어조로 말을 하였다.
“꾸, 꿈속에서 조상님이 알려주셨어.”
“뭐?!”
황당한 말에 어이없어하는 세리나. 칼슨 또한 부끄러웠는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돌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