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에밀리
스킬로 모든 걸 알아본 칼슨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청록색의 머릿결이 유난히 돋보이는 그녀.
이제 막 사춘기 소녀 정도 되는 나이였지만 겉모습은 그보다 2, 3살은 어려 보였다. 얼굴이 앳돼 보이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너무나 작고 왜소하였다.
아무래도 잘 먹지 못해서인 듯한데 칼슨이 보기엔 아동학대나 다름없었다.
“이 아이는 누군가?”
“예? 아 그 아이는 저희 집 하녀입니다.”
“그래?”
“예, 어렸을 때 부모를 잃은 고아인데 하도 불쌍해서 저희가 거두었습니다.”
“그렇군.”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한 칼슨은 에밀리의 팔을 만져 보았다. 만지고 보니 뼈만 느껴지는 게 앙상하기 짝이 없었다.
“상당히 말랐어.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한 모양이야?”
“아, 저 애가 원래 잘 못 먹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뭐, 없는 형편에 객식구까지 챙기긴 힘들겠지.”
촌장의 말을 끊으며 말을 이어가는 칼슨. 촌장도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하며 그대로 입을 닫았다.
“이해할 수 있어. 당연히 남의 자식보단 자기 가족이 더 귀한 법이니까.”
“…….”
“그런데 말이야…….”
“…….”
“사람이면 해도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어.”
“……예? 그게 무슨!?”
“이 애가 그렇게 탐이 났나?”
“허걱! 무, 무슨 말씀입니까! 그게?”
갑작스런 그 말에 촌장은 당황하였다. 하지만 칼슨은 변명조차 듣기 싫은 듯 그에게 조금의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우터!”
“예, 영주님!”
“저 역겨운 놈을 당장 처리해라.”
“예. 분부대로.”
“허걱, 사, 살려……!”
서걱!
전광석화도 같은 우터의 검에 그대로 목이 떨어지는 촌장. 그 모습이 조금 잔인했기에 칼슨은 살며시 에밀리의 시선을 가려주었다.
“이제, 괜찮다. 너만 좋다면 우리랑 함께 가자꾸나.”
“혹시 따라가면 몸 만지기 놀이 같은 거 안 해도 되는 거예요?”
‘몸 만지기 놀이라니…….’
아마도 촌장이 에밀리의 몸을 만질 때마다 쓰던 말일 것이다. 고작 12살의 어린 여자애한테 그런 추악한 짓거리를 하다니. 정말이지 역겨운 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이제 그런 거는 안 해도 된다. 좋은 옷 입고, 맛있는 음식 먹으며 네가 편한 데로 지내면 된단다.”
“그게, 정말인가요? 혹시 아저씨는 용사님이신가요?”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하는 그녀의 말에 칼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저씨라는 말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넓은 마음으로 넘어가 주었다. 어쨌든 조합장 시절을 생각한다면 그것도 맞는 말이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니?”
“예전에 마을에 들렸던 음유시인에게 들었어요. 마왕에게 납치된 공주님을 구해주는 용사의 이야기요.
저는 공주는 아니지만 늘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저씨가 나타난 거예요. 아, 재미없죠. 죄송해요, 아저씨.”
누군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자 말이 많아진 에밀리. 그 모습이 딱했던 칼슨은 환한 미소를 지어주며 답해주었다.
“아니야, 재미있어. 그리고 나는 용사는 아니지만 너를 구해주러 온 건 맞아. 이제 나쁜 마왕은 없어졌으니 안심하려무나.”
“예, 용사…. 아니 아저씨.”
그렇게 그녀를 데려온 칼슨은 그녀에게 성내 거처를 주며 편히 지내게 하였다.
처음에는 낯선 곳이라 어색해하며 눈치를 보았지만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아서인지 장난도 치고 점점 밝아졌다.
* * *
다그닥 다그닥
“성에 도착하면 에밀리가 제일 먼저 반기겠군요.”
“아마도 그렇겠지.”
정령사라 그런지 기감이 매우 뛰어났다. 특히 바람의 정령을 부리기에 상당히 먼 거리의 위치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아저씨라고는 부르지 않더군.”
“하하,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째 조금 아쉬워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영주님.”
“아쉽긴…. 그냥 그 호칭에 제법 익숙해졌는데 이제 못 들으니까 조금 허전한 거지.”
“예, 그러시군요.”
“그렇지, 그냥 그런 거야.”
“예, 영주님.”
“…….”
그렇게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한참을 가니 어느덧 저 멀리 성이 보였다. 그걸 보자 그동안 지쳐있던 병사들 또한 화색이 돌며 처진 걸음이 서서히 빨라진다.
샤아아아악───
산뜻한 바람이 귓불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자신들을 반기는 것처럼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에밀리의 정령이로군요.”
“그래, 아직 성까지 거리가 한참 남아 있는데 벌써부터 우리를 알아봤어.”
“그렇습니다, 영주님. 에밀리의 정령 다루는 실력이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것 같습니다.”
우터의 말처럼 에밀리의 능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것 같았다. 그전에 워낙 열악한 환경에 있었기에 꽃을 못 피운 것도 있지만 애초부터 워낙 재능이 뛰어난 듯 마음의 안정을 찾자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래 그래, 어서 무럭무럭 자라라. 어서 커서 나의 영지에 훌륭한 인재가 되어다오.’
지금도 잘 성장하고 있는 에밀리를 생각하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다 보니 어느덧 성 앞에 도착하였다.
“영주님? 영주님이 오셨다.”
“추웅성!”
성문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칼슨을 발견하고는 절도 있는 자세로 경례를 하였다. 그것을 보니 최근 올라간 그의 위신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다들 수고가 많아.”
“아닙니다! 영지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당연합니다!”
“그래그래, 그럼 계속 수고하도록.”
“예, 영주님. 추웅성!”
칼슨의 격려에 우렁차게 답하는 병사. 그 쩌렁쩌렁한 울림에 귀가 아플 정도였지만 칼슨은 흡족한 듯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영주님이 오셨다.”
“와 옆에 순찰대장님도 있어!”
영주가 왔다는 이야기에 외성 안에 주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물론 이전에도 이렇게 성 밖을 들락날락하며 구경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성 밖을 나오며 저런 선망 어린 눈빛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번에 다녀온 곳이 피요르 남작령의 마을이라지?”
“와, 우리에게 영지전을 일으킨 곳까지 챙겨주러 다녀오셨단 말이야?”
“쉿! 조용하게. 영주님께서 그들도 우리와 같은 영지민이라고 하셨어.”
“허억, 그런가? 그런 사정이 있었단 말이지. 알겠네.”
그 말을 다 듣고 있던 칼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저들이 보기에는 자신이 여기저기 구휼을 하는 듯 보였나 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의 주목적은 감찰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동안 촌장들이 중간에 착복한 세수들이 없어져 재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동안 많이도 해 먹었어, 다들.’
그렇게 착실하게 세수가 모이니 그 양이 전에 비해 무려 2배가 되었다. 세수가 제대로 걷히니 당연히 영지 재정도 그만큼 좋아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뭘 할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당분간 모아둘 셈이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동안 얼마 안 가서 내성 입구에 다다르게 되었다.
“영주님께 충성을! 드레이크에 영광을!”
자신들을 보자 즉각 자세를 취하는 병사들. 외성을 지키는 이들보다 좀 더 풍채가 좋은 이들로 배치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과는 다르게 외관에서부터 위압감이 든다.
“영주우우님!!”
“응?”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와 그곳을 바라보니 한 소녀가 자신들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눈에 익은 청록색의 머릿결이 찰랑거렸다.
“에밀리!”
“어서 오세요, 영주님. 다녀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어린 소녀가 반갑게 맞이해주자 칼슨을 비롯한 그 외 장병들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말에서 내린 칼슨이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하였다.
“그래, 우리 없는 동안 말썽 안 부리고 잘 지냈어?”
“아니, 영주님. 제가 무슨 철부지 어린애인 줄 아세요? 저도 이제 다 컸다고요.”
“크큭, 어린애 맞지. 아직 12살밖에 안 됐는데 뭘.”
“밖에 가 아니라 12살이나 된 거지요! 그리고 제가 정신 연령은 또래보다 월등히 높답니다.”
어린애라는 말에 발끈했던 그녀는 갑자기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다. 에밀리의 그런 반응이 꽤나 귀여운지 칼슨은 피식 웃으며 다시 한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하, 그래 알았다. 알았어. 그동안 별일 없었지?”
“아, 그러고 보니 손님이 오셨어요.”
“뭐, 손님?”
손님이라니? 자신을 찾아올 손님이라면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람일 텐데 칼슨의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런 이는 생각나지 않았다.
“혹시 그 사람이 누군지 아니, 에밀리?”
“음, 굉장히 아름다우신 분이셨어요. 키도 크고 머리도 새하얀 금발이었고……. 어 그러고 보니 영주님이랑 어딘지 닮은 것 같아요.”
“뭐? 나랑 닮았다고……? 아, 혹시!”
그녀의 말을 유추해보니 당장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너, 너는!”
자신과 같은 백금발의 머리.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키가 자신과 맞먹을 정도의 장신.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왼쪽 가슴에 있는 사자의 문장. 분명 그것은 왕실 기사단의 문장이었다.
“오랜만이다, 동생아!”
“세리나! 네, 네가 어떻게 여길!”
“야, 아무리 영주가 되었다지만 어째 말이 좀 짧아진 것 같다. 응?”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를 찾아온 손님은 세리나.
세리나 드레이크. 칼슨의 친누나였다.
왕실 기사단으로 들어가고 나서 연락조차 없었던 그녀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자 칼슨은 성질부터 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피요르 남작가와 영지전이 벌어졌을 때도 오지 않았고 그 뒤 치러진 부친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었다. 물론 칼슨이 화가 난 이유는 전자가 대부분이긴 하였지만.
“영지가 어려울 때 못 찾아온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도 그땐 나름 사정이 있었다고.”
“사정은 무슨!”
뻔뻔한 그녀의 태도에 칼슨은 눈을 치켜세우며 일갈하였다. 그때 우터가 귓속말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영주님, 주위에 눈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따로 담소를 나누셔야 할 듯합니다.
“쳇, 알았어.”
그의 말에 잠시 화를 누그러뜨리며 인상을 풀고 다시 세리나에게 말을 건다.
“따라와, 할 이야기가 많으니 앉아서 하자고.”
“흠, 영주가 되었다고 무게 잡기는? 그래, 알았다. 동생아.”
“크윽.”
끝까지 신경을 긁는 그녀의 말에 칼슨은 발끈하였지만 그래도 참으며 성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님을 맞는 응접실에 앉은 두 사람.
이렇게 마주 앉으니 서로 닮은 점이 많았다. 머리 색은 둘째치고 이목구비 또한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다만 남자인 칼슨이 더 굵은 느낌이 있었고 그에 비해 세리나는 턱선이 제법 매끈하게 빠져 있었다.
자리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신 칼슨은 그녀를 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래, 도대체 어떤 대단한 사정이기에 이제까지 연락도 안 하며 살았는지 이야기해보시지.”
“야야, 왜 이렇게 날이 서 있어. 그래도 하나뿐인 누님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조금 부드럽게 이야기하면 안 돼?”
“누님이고 자시고 영지, 아니 동생이 죽을 위기에 놓였는데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그 잘난 이유나 늘어나 보시지 그래.”
“하, 녀석. 그래, 네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니 알겠어. 후…….”
깊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이윽고 그 연유에 대해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