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영지 시찰
“허억 헉! 무울, 물!”
“짐, 여기 있어.”
“고, 고마워, 막스.”
꿀꺽꿀꺽.
“어, 이제 살 거 같네.”
“짐, 다 마셨으면 나도 좀 줘!”
“알았어, 페트. 자 여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넓은 공터에 마을 사내들이 죄다 모여 있었다.
모두 얼굴에 흙먼지가 잔뜩 묻어있는 걸 보니 꽤나 거칠게 몸을 굴렀으리라. 지금은 쉬는 시간인 듯 모두 바닥에 앉아 목에 물을 축이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휘이익~
“자 휴식 끝. 모두 일어나라 어서. 다시 훈련을 재개하도록 한다.”
평온을 깨는 지긋지긋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필립의 목소리. 꿀맛 같은 휴식 시간은 너무나도 짧게 느껴졌다.
“으으으…. 더 이상 하면 정말 죽을 것 같은데.”
“왜 이리 엄살이야. 막스. 고작 이 정도에 우는 소리야?”
“허, 짐! 네가 실수로 구령만 틀리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다고!”
“야, 너도 몇 번 틀렸잖아! 왜 나한테만 그래?”
“아! 몰라, 몰라! 진짜 그놈의 밀가루만 아니면 당장이라도 때려치우는 건데, 씨발!”
“야야, 이제 그만들 하고 일어나! 저 미친개가 또 물어뜯을라!”
페트의 말에 짐과 막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미친개는 순찰대원인 필립을 지칭하는 말.
말 그대로 그는 한 놈이라도 제대로 걸리면 미친 듯이 굴렸기 때문에 그것을 겪어본 이들은 하나같이 미친개에게 물렸다고 하였다. 그렇게 그 지옥 같은 훈련이 막 시작되려고 할 때였다.
“응? 저건 도대체 뭐지?”
“왜? 뭔데? 음, 아무래도 사람들처럼 보이는데?”
“아, 맞네. 그런데 수가 꽤 많아 보여. 안 그래?”
그들의 말처럼 저 멀리서 제법 많은 수의 무리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도대체 뭐 하는 자들일까?”
“글쎄 혹시 전에 우리 마을에 와 물건을 거래했던 상단이 아닐까?”
“글쎄?”
그의 말처럼 가끔 마을에 와서 물건을 거래하는 상단이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그 무리는 그 수가 훨씬 더 많았으며 상단의 마차를 끄는 나귀가 아닌 큰 말을 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상단으로 보이진 않았다.
“어, 저 깃발을 봐!”
“깃발이라고? 아 저기!”
펄럭거리는 짙은 검은색의 깃발. 그 안에 붉은 형체가 상당히 눈에 뜨띄었는데 다리 같은 게 달린 것이 얼핏 보기에 어떤 동물 같았다. 그들이 그렇게 구경하고 있는 와중에도 점점 다가오는 인파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그 모습 또한 더욱 분명해졌다.
“서, 설마 영주님!”
이제 막 훈련을 시작하려던 필립이 그 모습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도 같이 놀라며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허둥지둥하고 있을 무렵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무리들. 그중 선두에 있던 자가 말을 타고 오더니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드레이크 자작님이 오셨다. 모두 머리를 숙여라!”
쩌렁쩌렁한 울림에 모두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허나 그가 한 말은 또렷하게 들렸다.
드레이크 자작. 분명 영주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걸 안 마을 사람들은 즉시 고개를 조아리며 몸을 바짝 낮추었다.
덜덜덜.
영주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빠졌는지 다리가 풀리며 서 있기조차 버거웠다.
비록 왕국에 영지가 있고 영주는 왕의 신하였지만 여기 사람들에게 영주는 왕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었다.
만약 영주의 심기를 조금만 불편하게 하여도 그들의 목숨은 물론 마을 전체가 몰살당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뭐, 이리 다들 떨고 있는 거야?’
자신이 영주여서 어려워하는 것은 알겠다. 그렇다고 저렇게 극단적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있는 건가? 어찌 됐든 이들은 자신의 영지민. 소중하게 대해야 할 영지의 자원들이었다.
“다들 고개를 들어라.”
소리가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명료하고 힘 있는 목소리. 하지만 다들 서로의 주위의 눈치만 보면 머뭇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칼슨은 한숨을 쉬더니 이내 다시 한번 그들에게 말을 하였다.
“영주의 명이다. 어서 고개를 들어라!”
[‘[칭호]잔혹한 카리스마’가 발현됩니다.]
그러자 알 수 없는 압박감이 그들에게 전해지며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영주를 보았다.
‘아…! 저분이 바로 영주님…….’
흰색, 아니 그것보다 훨씬 기품 있는 색의 머리였다. 마치 귀한 실크 같은 느낌을 주었으며 무척이나 고귀해 보였다.
얼굴은 조금 앳돼 보였지만 그렇다고 야리야리한 느낌이 아닌 굵고 강한 선을 보여 제법 남성스러움이 풍겨왔다.
게다가 말 위에 올라선 그의 비율은 가히 환상적이기에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용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영주님이 다시 자신들에게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다들 훈련을 받느라 고생이 많다. 알다시피 나는 드레이크의 영주 칼슨 드레이크다.”
“아…….”
목소리만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들으니 더욱더 감미롭게 들려왔다. 마치 신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경건한 느낌마저 전해질 정도.
‘이거 눈빛들이 왜 이래?’
방금 전까지 무서워 벌벌 떨고 있었으면서 이제는 얼빠진 모습으로 자신을 쳐다본다. 확실히 자신에게 호의적인 모습이었지만 다 큰 사내들이 자신을 이리 지긋이 쳐다보는 게 뭔가 부담스럽고 불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자신이 한 말이 있으니 그걸 대놓고 뭐라 할 순 없었다.
“크흠, 그대들의 노고는 반드시 보답받을 것이다. 비록 자네들이 드레이크 가의 정규 병사는 아니지만 나는 이미 그대들을 나의 병사라고 생각한다.
이 마을 또한 나의 영지이니 이곳을 지키는 자네들 또한 나의 병사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지배력의 영향으로 당신의 말에 청중들이 감격스러워 합니다.]
[지배력의 영향으로 충성도가 올라갑니다.]
“우, 우리가 영주님의 병사라니…….”
“그래, 이 고된 훈련들이 다 여기를 지키기 위한 영주님의 배려였던 거야.”
“암, 게다가 훈련만 마치면 달마다 밀 한 자루씩 주시는데 그 은혜도 모르고 난 투정이나 하다니…….”
감격스러워 하는 자들이 여기저기 눈에 보였다. 게 중에는 감정에 복받쳐 흐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되자 오히려 당혹스러운 것은 칼슨이었다.
‘아, 이것들이 왜 이래? 도대체 왜 울고 난리야?’
아무리 지배력 때문이라지만 이건 너무 과했다. 효과 자체는 확실했지만 보기엔 좀 그랬다. 아무튼 그랬다.
‘마치 사이비 종교 교주라도 된 느낌이네.’
어쨌든 시찰 온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된 듯싶었다. 애초에 여기 온 이유가 자신의 영향력을 확실하게 도장 찍으려던 것이니까. 그리 여긴 칼슨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흠, 아쉽지만 이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여봐라, 어서 이들에게 준비한 것을 전달해주어라.”
“예, 영주님.”
그가 손을 들자 병사들이 짐마차에서 물건을 꺼내왔다.
차르르.
“오, 이것은?!”
“설마, 이것을 우리에게…….”
바닥에 내려놓은 물건을 본 주민들이 감탄하며 탄성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창과 갑옷이었던 것이다.
“그래, 엄연히 나의 병사들인데 무기와 갑옷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여, 영주님…….”
[지배력의 영향으로 충성도가 올라갑니다.]
또다시 터져 나오는 감격의 도가니. 이젠 부담스럽다 못해 지겨울 지경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어디 가서 이런 무기와 갑옷을 구하겠는가? 난생처음 받아보는 무구에 그들의 마음은 이미 정규 병사라도 된 기분이었다.
‘영지전 때 전장을 정비하며 긁어모으던 건데 괜찮겠지?’
영지전 당시 수거한 무기와 갑옷들. 대다수 망가져 있었지만 최대한 정비를 하여 나름 쓸 만하게 고쳐졌다. 물론 정규 병사들이 쓰는 것에 비해 조금 부족했지만 마을 주민들에겐 마치 귀한 보구(寶具)와도 다를 바 없었다.
용무를 마친 칼슨. 말 머리를 돌리며 마지막으로 말을 하였다.
“잊지 마라! 너희들은 나의 병사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너희들이 지키는 이곳이 바로 나의 영지라는 것을!”
[지배력의 영향으로 충성도가 올라갑니다.]
“크으으윽! 영주님!!”
“반드시, 반드시 이곳을 지켜내겠습니다!”
지배력으로 사람들의 충성도를 마지막까지 쥐어짰다. 칼슨은 미소 지으며 병사들과 함께 그곳을 조용히 떠났다. 그들이 떠난 뒤에도 마을 주민들은 그 여운이 사라지지 않은 지 그 모습이 사라졌음에도 시선을 거두지 못하였다.
‘휴, 이제 3곳을 돌았나?’
오늘 하루 동안 시찰한 마을의 수다. 부지런히 돌면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2곳은 더 돌 수 있을 것이다.
‘이거 완전 극한 직업이 따로 없어.’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왕 벌인 일이니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 다만 몸이 고생할 뿐이었다.
“자 모두 힘을 내자. 다음 마을이 멀지 않았다.”
“예, 영주님!”
칼슨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하는 병사들. 그들 또한 지쳐있었지만 자신의 영주와 함께하는 길이기에 내색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다. 그렇게 그들은 가벼운 발걸음을 하며 다음 마을로 향하였다.
* * *
“후아아아~~~!! 드디어 끝났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영주님.”
“훗, 그래. 순찰대장도 수고가 많았어.”
우터의 말에 칼슨은 피식 웃었다.
이제 막 마지막 마을을 돈 직후 성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총 120여 개가 넘는 곳을 도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당연히 하루에 다 돌 수도 없었고 거의 한 달 가까운 시간을 소모하였다.
꽤나 고된 일이었지만 그래도 영지민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름 보람도 있었고 괜찮았다.
‘게다가 의외의 수확도 얻었지.’
87번째로 들렸던 브리온 마을.
그곳에서 칼슨은 생각지도 못한 인재를 발견하였다.
[인물정보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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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나이 : 12세
클래스 : 정령사
힘 1 민첩성 3 지능 11 체력 4 정신력 7 마나 5
충성도 61/100
스킬
물의 정령 소환(하급)(희귀/성장)
바람의 정령 소환(하급)(희귀/성장)
5세 때 몬스터의 침입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 촌장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와중 우연한 기회로 마나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정령과의 친화력도 높아서 10세 때 이미 정령과 계약을 하였다.
현재 촌장이 그녀를 탐하려고 하며 이대로 둔다면 조만간 큰 사단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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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정령 소환(하급)(희귀/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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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하급 정령 운디네를 소환할 수 있다.
마나와 정령 친화력이 상승하면 더욱더 높은 등급의 정령과 계약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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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정령 소환(하급)(희귀/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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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하급 정령 실프를 소환할 수 있다.
마나와 정령 친화력이 상승하면 더욱더 높은 등급의 정령과 계약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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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정령사!’
정령사는 매우 희귀하다.
마나를 느끼는 이도 드물었지만 정령 친화력이 좋은 이는 그보다 더더욱 보기 힘들었다.
간혹 마법사랑 정령사랑 비슷한 거 아니냐 하는 이들도 있는데 둘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현대로 따진다면 문과와 이과 같은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녀가 굉장히 귀한 인재라는 것은 확실하였다. 그런데 칼슨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현재 촌장이 그녀를 탐하려고 하며…….
‘이 개만도 못한 놈이……!!’
촌장의 진짜 모습에 칼슨은 구역질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