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피요르 남작가와의 영지전(5)
“도, 도대체 그동안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여기저기 부상자들의 신음 소리가 퍼져있었다. 또한 살아남은 기사들조차 대부분 부상이 심해 거동을 못하고 있었고 그 수마저 3명에 불과하였다.
분명히 자신이 도착하기 전까지 건재해야 할 아군이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던 것이었다.
자신의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그는 주변의 병사에게 그동안의 있었던 일을 물어보았다.
“크으윽,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립니다.”
이틀 전 우터에게 된통 당한 용병단이 성 앞 평원에 자리를 잡고 피요르 남작의 병력이 막 합류했던 시점이었다.
비록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큰 피해를 입었던 렌달 용병단이었지만 아직 그 수가 200 가까이 되었다. 그리고 비록 부상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A급 용병인 톨먼을 비롯하여 B급 용병 또한 절반은 남아 있었으니 절대 무시 못 할 전력이었다. 게다가 피요르 남작의 병력을 더하면 그 수가 무려 500여 명. 고작 200여 명에 불과한 드레이크군에 비하면 압도적인 숫자였다.
용병단과 합류한 피요르 군은 부기사단장인 와튼이 이끌고 있었다. 그는 피요르 남작가의 봉신 가문인 델리안 가의 사람으로 작위는 없었지만 꽤나 혈통 있는 귀족이었다. 부드럽게 잘 다듬어진 수염을 매만지며 주변을 둘러본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치료를 받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톨먼을 향해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쯧, 몰골이 비루하기 짝이 없군. 완전 병신이 따로 없어. 왕국 내 최고라고 해서 고용했건만 이리 형편없이 깨지다니. 그 명성은 허울뿐이었나?”
“크윽, 우리 렌달 용병단을 모욕하지 마시오. 놈들이 더러운 술수만 쓰지 않았더라면 이러지 않았소!”
“더러운 수라……. 네놈들이 멍청해서가 아니고? 하긴 이래서 병신 같은 천한 놈들에게 일을 맡기면 안 되는 거라니까.”
“뭐요? 지금 뭐라고 하였소!!”
귀족인 와튼은 평소에 선민의식이 짙은 자로 늘 평민을 사람 이하로 취급하였다. 그런 그의 언사에 발끈한 톨먼이 이를 드러내며 무기를 들고 일어서자 와튼 주위의 병사들도 무기를 잡고 자세를 취하였다. 키도 크고 워낙 덩치도 있어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와튼은 코웃음을 치며 그를 비웃었다. 그리고는 곧장 차가운 어조로 톨먼에게 소리쳤다.
“이 더러운 놈이 어디서 감히 귀족에게 검을 들이대? 여봐라! 당장 이놈을 포박하라!”
“뭐? 이 개 같은 놈이!!”
생각지도 못한 와튼의 말에 황당한 표정으로 욕지거리를 내뱉는 톨먼. 그에게 병사들이 다가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난 톨먼이다! 렌달 용병단의 A급 용병 톨먼이란 말이다! 지금 이런다는 것은 우리 렌달 용병단이랑 척을 지겠다는 것이냐!!”
“그게 뭐 어쨌단 말이냐? 지금 네놈은 왕국의 귀족을 죽이려 한 중범죄를 저질렀다. 엄연히 나라의 국법이 있는데 그걸 나보고 어기란 말이냐? 거기 뒤에 있는 천한 것들아. 네 놈들 또한 법을 어겨 처벌받고 싶지 않다면 감히 나서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도저히 말이 안 통하는군.”
전에도 본 적이 있다. 이런 구제 불능의 귀족 놈들을. 그때마다 갖은 굴욕을 당하였지만 대게 이렇게 위협만 주면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섰다.
그런데 이놈은 도리어 일을 키운다. 본인이 기사여서 이 정도의 위협이 먹혀들어 가지 않아서 일수도 있지만 설사 그런 게 아니라고 해도 병사들을 이끄는 입장에서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되었다. 상식적으로 눈앞에 적이 깔려있는데 합심하지 못할망정 아군에게 칼날을 드러내다니. 이래서는 똥오줌 못 가리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눈앞에 적을 두고 일을 더 키우고 싶지 않았던 톨먼은 다시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양손을 들며 다시 정중히 말을 하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이다. 이쯤에서 그만두시기 바라오. 눈앞에 적이 있는데 우리끼리 싸워서 되겠소이까? 내가 기분을 언짢게 하였다면 사과하리다.”
마음을 진정하고 차분한 어조로 그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였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오히려 와튼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도리어 그의 화를 돋우고야 말았다.
“뭐라, 사과? 바닥에 잔뜩 엎드려 용서를 빌어도 시원치 않을 터인데 사과? 이런 시건방진 놈, 네놈이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구나! 이것들아! 도대체 움직이지 않고 뭐하나? 어서 저 흉악범을 잡아두지 않고!”
재차 다그치는 그의 명령에 병사들도 지체하지 않고 톨먼을 제압하기 위해 창을 앞세우며 다가섰다. 답이 나오지 않자 톨먼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결심이 선 듯 목소리를 높이며 말하였다.
“후, 도저히 안 되겠군. 우리 렌달 용병단은 지금부터 이 영지전에서 빠지겠다. 그리고 혹시 우리를 건드린다면 적으로 간주할 테니 그렇게 알길 바란다.”
“뭐라? 어서 저 망할 놈의 주둥이를 닥치게 해라!”
“네, 델리안 경! 이봐, 거 용병 양반. 크게 다치기 전에 얌전히 포박에 응하시는 게 좋을 거요!”
나름 자비를 베푸는 듯이 항복을 권하는 병사. 그러나 톨먼은 그것이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그래, 네놈들이야 그저 명에 따를 뿐이겠지……. 하지만.”
서걱!
“커헉!”
“나는 그걸 봐주는 사람이 아니다.”
눈 깜짝하는 순간 다가오는 병사들을 베어버렸다. 검에서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푸른 오러. 그 오러가 검신에 맺힌 혈흔마저 태워버리자, 비릿한 내음이 퍼지며 코를 찔렀다. 눈앞의 병사를 처치한 톨먼은 두 눈을 부릅뜨며 단호한 어조로 와튼에게 외쳤다.
“나는 분명 경고했었다. 이제부터 이 모든 것은 피요르 남작가의 책임이다!”
쩌렁쩌렁하게 퍼지는 그의 음성. 그 소리에 귀가 아픈 듯 잔뜩 인상을 찌푸리는 와튼. 신경질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빌어먹을 병신 놈이! 감히 피요르의 병사를 살해해? 여봐라! 다들 저 극악무도한 놈을 죽여라!”
“렌달 용병단은 모두 무기를 들어라!”
성난 와튼에 맞서 톨먼 또한 이를 드러내며 용병단에게 명령하였다.
와아아아아아!!
챙! 챙! 챙!
결국 두 집단 간 유혈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멀리서 그것을 지켜본 칼슨은 다소 황당해하며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였다.
“볼튼 경, 저기 저놈들 왜 갑자기 저들끼리 싸움질을 하는지 아는가?”
“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렇게 대규모로 접전이 벌어진 것을 보니 아마 윗선에서 파국이 벌어진 듯합니다.”
“파국이라…….”
만약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놈들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래도 갑자기 저렇게 싸우는 건 뭔가 수상한데?’
지나치게 운 좋은 상황이 되니 뭔가 의심도 들었다. 혹여나 자신들을 꾀어내기 위해서 거짓으로 저런 모습을 위장한 거 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리 기만술이라고 해도 이렇게 코앞에 대치하고 있는데 저렇게까지 행동할 필요는 없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칼슨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기왕 싸우는 거 놈들의 전력이 좀 더 소진되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죽어라! 이 개 같은 놈들아!”
“더러운 용병놈들! 감히 피요르 남작가에 칼을 꽂아?”
챙! 챙! 서걱! 푹!
“커허억! 내, 내 팔이!!”
“끄아아악! 살려줘!”
렌달 용병단과 피요르 남작군. 그들은 서로 뒤엉키며 난전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서로 비슷한 양상을 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용병단의 피해가 속출하였다. 무장 상태도 그렇고 숫자도 남작의 병력보다 적었거니와 이미 몇 차례의 전투로 인해 많이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다.
‘크윽, 이대로 가다간 전멸하는 건 시간문제다!’
패색이 짙어지자 톨먼은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일단 후퇴한다! 모두 각자 살아남아라!”
현재 대열은 무너져 있고 뒤엉켜서 싸우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전열을 유지하며 물러서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 이럴 때는 각자도생하는 것이 그나마 생존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으아아압!”
비록 부상을 당했지만, 톨먼은 A급 용병이다. 그는 오러가 실린 검을 휘두르며 주변의 병사들을 베어내고 있었다. 허나 아직 적의 수는 많았으며 상대 쪽에서도 자신과 같이 오러를 다루는 기사 또한 다섯이나 있었다.
“흥, 이 무능한 놈들! 저리 비켜라. 내가 손수 이놈을 처리해주지.”
생각대로 상황이 풀리지 않자 짜증이 났는지 표정을 잔뜩 구긴 와튼은 검에 오러를 실으며 톨먼에게 다가갔다.
“눈 하나밖에 없는 병신이 꽤나 애를 먹이는구나. 꼴에 A급 용병이라는 건가?”
“이 빌어먹을 놈이……!!”
이 사단을 낸 원흉인 와튼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톨먼 또한 기다렸다는 듯 자세를 잡고 그를 맞이하였다. 자신이 비록 A급 용병이지만 놈 또한 상급의 기사. 절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혈투를 벌이느라 조금 지쳤지만 그래도 호흡을 가다듬으며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히야아아압!”
거리가 좁혀들자 망설임 없이 검을 내리치는 톨먼. 진한 오러가 감싸진 그의 검이었지만 상대는 쉽게 그것을 막아내었다.
쾅! 치지지직!
굉음과 함께 두 오러가 서로 타들어 가며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그 충돌로 인한 여파는 주변인들이 뒤로 물러설 정도. 비록 와튼은 오만한 귀족이었지만 그의 실력만큼은 틀림없이 진짜였다.
“훗, 천한 놈이 제법이로군.”
비웃는 듯한 어투였지만 와튼은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검술이야 조금 투박하지만 완력만큼은 뛰어난 놈이다. 거기다 오러 또한 자신의 것에 비해 전혀 밀리지 않았다. 만약 그가 용병이 아닌 기사가 되었다면 좋은 경쟁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생은 어쩔 수 없지.’
자신과는 달리 놈은 비천한 용병. 그 출신 또한 불분명한 것을 보니 과거 또한 떳떳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였다. 감상을 끝낸 와튼은 끝을 보기 위해 가문의 비전 검술을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휘이이잉───!!
오러의 형태가 부풀어 오르며 검을 둘러싼 회오리가 형성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검 또한 매섭게 빨라지며 주변의 공기를 찢었다. 원래부터 녹빛에 가까웠던 그의 오러가 흡사 바람이라도 된 것처럼 변화하였다.
그 모습을 처음 본 톨먼은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서 있을 수만은 없는 법. 오러를 최대한 집중하여 있는 힘껏 휘둘렀다.
부우웅─
상단에서 그대로 내려찍는 톨먼의 검. 제법 진득한 오러가 넘실거리며 와튼을 위협하였다. 단순하였지만 우직한 공격. 어지간한 적이라면 그대로 쓰러뜨릴 수 있었다. 허나 지금은 그 상대가 좋지 않았다.
쉬이이익───
치지직─!
“으윽!”
바람 같은 속도로 톨먼의 검을 피하며 그의 옆구리를 찢어버리는 와튼. 그의 몸과 검에 얇은 녹빛 오러가 흐르고 있었다.
쿵!
순간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주저앉아버린 톨먼. 상처가 깊은 것도 있지만 그 속으로 오러가 파고들어 내부를 진탕시켰기 때문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난생처음 겪어보는 신기에 고통보다는 허탈감이 앞서왔다. 그런 그를 보며 슬며시 입을 여는 와튼.
“이게 바로 진정한 검술이라는 거다. 뭐 비천한 출신인 네놈 따위가 알 리는 없겠지만…….”
여전히 상대를 업신여기는 말이지만 그 속에서 조금 씁쓸함이 느껴진다. 눈을 지그시 뜬 와튼은 마무리를 위해 다시 한번 검을 들어 올렸다.
“크흑, 빌어먹을. 여기까지인가……?”
몇 초라도 호흡을 진정시킨다면 몸을 움직일 수 있겠지만 상대는 그걸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그가 자신의 최후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두두두두두.
어디선가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