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죄와 벌
칼슨이 정식으로 영주가 되자마자 진행된 첫 영지 회의.
딱히 안건이 있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크게 특별한 것은 없었다. 통상적으로 영주가 정식으로 취임하면 인사치레 한 번은 모여서 보기 때문이다. 이번 회의 또한 그런 취지라 여기며 다들 별생각 없이 참석하였다.
행정관 우터와 재무관 레토도 그리 생각하며 회의실 자리에 앉아 있었다.
“칼슨 공자가 아무래도 좀 많이 변한 것 같소. 예전 같지 않아 보이오.”
“그러게나 말이오. 예전에는 그렇게 말도 제대로 못 해 주뼛주뼛했었는데 취임식 때 은근히 사람을 겁박했잖소.”
우터의 말에 호응하듯 레토가 대답하였다. 조심스런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내심 불만이 많아 보였다. 그걸 본 우터가 손가락을 입에 대며 주의를 주었다.
“쉿, 지금은 우리 둘뿐이라 괜찮지만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조심하시오. 이제는 누가 뭐라해도 영주가 아니오. 부디 우리가 우려한 상황만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없지 않겠소?”
“아, 알겠소이다. 제발 우터 경의 말대로 아무 일 없이 잘 흘러가길 바라야겠소.”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을 무렵 회의장에 다른 이들도 하나둘씩 들어왔다. 서너 명이 더 들어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주인 칼슨도 회의실에 들어섰다.
‘가신이 총 5명이로군. 이 중에 몇 명은 누군지는 확실히 알겠고…….’
자리에 앉으면서 모인 인원들을 둘러보았다. 경비대장인 루퍼트와 이번에 시종장이 된 레인. 그리고 검술 훈련 때 신세를 졌던 기사단장 볼튼. 물론 나머지 인원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만난 적도 별로 없었고 기억에도 희미하였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본 후 호흡을 조금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취임식 때 봐서 알겠지만 이번에 새로 영주가 된 칼슨 드레이크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부디 나를 도와 영지를 잘 꾸려가길 바란다.”
간단한 인사. 그에 몇몇이 눈치를 보았지만 이내 측근인 레인이 대답을 하기 시작하였다.
“네, 영주님. 충심으로 보필하겠습니다.”
“예, 영주님.”
“맡겨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목소리들. 그렇게 회의실 분위기는 그를 영주로 인정하는 듯하였다. 인사가 끝나자 곧이어 간단한 다과들과 음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 준비한 건 많지 않지만 가볍게 먹으면서 대화를 나눠보자고 준비했소.”
“네, 감사합니다. 영주님.”
이내 회장은 자연스럽게 풀어진 분위기가 되며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이 되었고 그러는 동안 칼슨은 신규 스킬인 [인물정보 열람]을 쓰려하였다.
‘흠 어디 한번 볼까? 레인은 이미 봐두었으니 놔두고 우선 경비대장부터….’
[인물정보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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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퍼트 데인
나이 : 28세
클래스 : 기사(초급)
힘 B 민첩성 B 지능 C 체력 B 정신력 C 오러 D
드레이크 영지의 경비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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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하나도 없는 어중간한 능력치. 정확한 수치는 모르겠지만 기사이면서 필요한 힘과 민첩성도 고작 B였고 지능은 겨우 일반적인 수준이었다. 그래도 한 영지의 경비대장인데 이런 능력치는 조금 실망이었다.
‘오러? 이건 뭐지? 아하, 기사가 쓸 수 있는 힘이었지.’
아마도 기사들이 가지는 능력치처럼 보이는데 그 수준이 D급이니 한참 밑바닥 수준인 것 같다. 그래도 아주 없는 거랑은 차원이 다를 것이다. 전에 올슨의 검을 박살 냈을 때를 생각해보면 D급이라고 그 위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고급인력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럼 혹시 기사단장도 이 정도 수준이야?’
불안한 마음에 기사단장인 볼튼의 상태창도 보았다.
[인물정보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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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튼 그리언
나이 : 48세
클래스 : 기사
힘 A 민첩성 C 지능 D 체력 B 정신력 B 오러 C
드레이크 영지의 기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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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다행히 루퍼트랑 달리 꽤나 괜찮은 능력치다. 민첩성은 낮지만 힘이 A다. 지능이야 낮아도 상관없었고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오러가 C라는 게 맘에 들었다.
‘D급이었던 오러도 그렇게 막강한데 C급이면 훨씬 강하겠지.’
나름 만족스러워하며 다른 이를 볼 찰나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 영주님, 어차피 나중에 거론될 일이긴 하나 자리가 마련된 김에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음, 우터 경? 할 이야기라니?”
칼슨이 되묻자 행정관인 그가 제법 잘 정돈된 수염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이제 영주님이 되셨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이제는 당연히 후사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쿨럭! 뭐, 후사!”
갑작스런 언급에 헛기침이 나오는 칼슨. 하지만 우터는 그 흐름이 끊어지지 않게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영주님께서 아직 젊으시니 좀 서두르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전 영주님의 경우를 생각한다면 최소한 배필은 구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배, 배필이라니? 그게 무슨!”
뜬금없이 결혼하라는 말에 당황하던 칼슨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하지만 우터가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이들도 한 입 보태서 말을 거들었다.
“듣고 보니 행정관의 말이 맞는 듯합니다. 자고로 영지는 후사가 든든해야 안정적으로 굴러가기 마련입니다.”
“예, 어서 하루라도 빨리 혼처를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어디 괜찮은 곳 없습니까?”
“그러고 보니 인근 스태필 남작의 장녀가 혼처를 구한다고 하던데 어떻습니까?”
“어허 레토 경, 스태필 남작의 장녀는 나이가 이미 서른이 넘어가지 않소! 거기 말고 리히텐 자작의 차녀가 어떻습니까?”
“그리언 경, 그녀의 별명이 뭔 줄 아십니까? 리히텐의 꽃돼지입니다. 그런 여자를 어떻게 영주님 앞에서 입에 올릴 수 있습니까?”
“뭐요, 시종장? 그냥 건강하고 후계만 잘 낳으면 됐지, 그깟 외모가 뭐가 중요하단 거요?”
“그럼 그리언 경은 영주님의 의향 따윈 아무렇지도 않단 말입니까?”
“아니, 뭐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럼, 필스 가의 막내딸은 어떻습니까?”
“바이언 가의 장녀는…?”
“페링 가의 둘째가 그렇게 미인이라는데…?
어느 순간 불이 붙어버린 칼슨의 혼처 문제. 당사자인 칼슨은 별생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들의 일인 양 필사적으로 본인들이 알고 있는 혼처들을 이야기하였다.
‘이것들이 지금 뭐 하는 짓거리야?’
칼슨의 몸에 들어가긴 전 김민호 때의 나이가 서른아홉이었다. 그 나이 먹고도 결혼을 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칼슨은 고작 열아홉. 그의 기준에선 어린애랑 다를 바 없는 데 결혼을 해야 한다니. 아니, 더 나아가 애도 낳아야 한다. 거기다 후사를 거론하는 걸 보니 사내아이를 낳지 않으면 득남할 때까지 들들 볶을 기세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저들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지금 당장 혼처를 잡고 결혼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썩 내키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꽤 많기 때문이다.
“크흠, 내 결혼 이야기는 차후로 미루도록 하는 게 좋겠소. 일단 아버지, 아니 전 영주를 암살한 죄인들의 처분을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민감한 주제.
하지만 일리 있는 말이었다. 영지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반역자들이었다. 그리고 반역의 결말은 사형. 즉 죽음이었다. 허나 그 누구도 그에 관해서 입에 담지 못하였다. 아무리 죄인이라 하지만 영주의 가족. 게다가 비록 남작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영주의 직계혈족이다.
“아무래도 교수형이 합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영주 살해는 반역죄와 다름없으니까요.”
레인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의 말에 호응하지는 않는 듯 미적지근한 반응들뿐이었다.
“흠, 이건 그리 쉽게 정할 일이 아닙니다. 원칙대로라면 그렇지만 피요르 남작과의 관계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들을 죽인다면 피요르 남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뭐요, 재무관? 지금 우리가 고작 남작 따위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말이오?”
레토가 자신의 의견에 반문을 놓자 레인이 신경질적인 태도로 되물었다.
“그런 말이 아니잖소, 시종장? 그가 비록 남작이긴 하나 그 수완이 상당히 좋소. 피요르 남작령으로 인해 우리 영지가 보는 이익이 어느 정도 되는 지나 아시오?”
“이익이라고 했소? 그걸 말이라고! 경은 지금 그 돈 몇 푼 때문에 드레이크 가를 우습게 만들 셈이오?”
“나도 시종장의 말에 동의하오. 백작 같은 고위 귀족도 아닌 고작 남작 따위에게 우리가 눈치 볼 필요는 전혀 없소. 이 기사단장 또한 원칙대로 해야 한다고 보오.”
레토의 말에 레인이 발끈하고 볼튼 또한 불쾌하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였다. 한 명이 더해져서인지 기세가 밀린 레토는 우터를 향해 도와달라는 눈빛을 던졌다. 그것을 본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인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재무관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인인 건 압니다. 허나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바 어느 정도 정리를 한 후 일을 처리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에둘러서 이야기를 하였지만 결국 레토의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레인과 볼튼, 레토와 우터 이 4명은 2:2로 의견이 갈렸다. 그러자 아직 아무런 의사를 내세우지 않은 루퍼트에게 자연스레 시선이 모였다. 루퍼트는 시선을 받자 무심한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그 사안에 대해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영주님의 결정에 따를 뿐입니다.”
저 말은 즉 영주인 칼슨의 의사에 맡긴다는 의미. 그의 말에 칼슨은 만족스러운 듯 짙은 미소를 띠었다.
“다들 의견이 갈리는군. 그렇다면 내가 직접 처벌을 정하도록 하겠다.”
그 말에 모두 조용해지자 잠시 말에 멈추었다. 잠깐의 적막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칼슨은 그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나는 교수형에 반대한다.”
쿵.
그 말에 레인과 볼튼의 표정이 구겨졌다. 반대로 우터와 레토는 화색이 되었다.
“예 잘 생각하셨습니다, 영주님. 영지를 위해서라면 그러셔야지요. 암요.”
“현명하신 생각입니다. 주변과 척을 지어 좋을 게 없습니다. 이게 다 우리 영지를 위한 일입니다.”
둘은 칼슨에게 찬사를 보내며 환하게 웃었다. 이에 볼튼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영주님, 어찌 그런 결정을 하십니까? 그들은 대역죄인들입니다. 살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볼튼 경의 말이 옳습니다. 영주님, 만약 살려둔다면 추후에 안 좋은 예를 남기게 됩니다.”
“그만!”
칼슨의 단호한 일갈. 알 수 없는 그 위엄에 모두 침을 삼켰다. 칼슨의 시선이 볼튼을 향하자 그는 흠칫 놀라며 식은땀을 흘렸다.
‘이런 위압감이라니. 영주가 되시더니 달라지셨어.’
예전이랑 다른 칼슨의 분위기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실제로 칼슨의 클래스가 바뀌면서 능력치도 많이 올랐고 무엇보다 새로 생긴 지배력의 영향이 컸다.
당황하는 볼튼의 모습을 본 칼슨은 살며시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언제 그들을 살려둔다고 했나?”
“예…? 방금 교수형에 반대하신다고….”
“교수형을 반대한다고 했지. 살려둔다고는 안 했는데?”
“네에? 그럼…?”
“그놈들에게 교수형같이 품위 있는 죽음은 가당치도 않지.”
“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예상 밖의 말에 깜짝 놀란 볼튼. 어벙한 표정을 한 채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그런 그에게 뒤이어 들려온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참수형에 처하도록 한다.”
“예에?”
그 한마디에 모두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