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 내 언데드 100만 >
제225화 시비가 붙다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거다.”
칼프스는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블랙 레이븐 클랜과 토르해머 클랜의 규모차이는 명확했다.
다른 대장장이 클랜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어찌할 수 없는 차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블랙 레이븐 클랜을 등에 업은 칼프스는 토르해머 클랜을 깔보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이미 선약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먼저 주문 받은 거거든요.”
헨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래? 그럼 그 사람은 어느 클랜에 소속되어 있지?”
칼프스의 반문에 헨리는 머리를 빠르게 돌렸다.
순순히 답할 것인가, 아니면 어딘가의 거대 클랜 소속 사람이라고 사칭할 것인가.
“어느 클랜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결국 헨리는 순순히 답하는 걸 선택했다.
한성이 어딘가의 거대 클랜에 속해 있다고 말해도 눈앞에 있는 놈이 그냥 물러날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블랙 레이븐 클랜에 대항할 만한 다른 거대 클랜을 사칭했다가 일이 꼬여 버릴 수 있었다.
사칭한 거대 클랜에서 항의가 올 수도 있었으니까.
“하, 그러니까 지금 클랜도 없는 어딘가의 허접한 놈 따위와 우리를 비교했다고?”
칼프스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감히 일개 플레이어 방문자와 자신들 블랙 레이븐 클랜을 건방지게 저울질을 하다니!
“이것들이 지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우리랑 지금 클랜전을 벌이자는 거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클랜전이라는 말에 헨리를 비롯한 토르해머 클랜원들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기본적으로 도시 내에서 분쟁은 힘들다.
귀신같이 각 도시의 경비병들이 달려오기 때문이다.
도시의 치안 억지력을 가진 경비병들은 전원 켈트인들로서 플레이어 방문자들 못지않게 강하다.
거기다 숫자도 많다.
만약 이곳에서 블랙 레이븐 클랜원들과 시비가 붙으면 경비병들이 달려와서 제지할 것이다.
하지만 클랜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시스템으로부터 클랜전이 인정되면 경비병들이 개입하지 못하니까.
‘여기서 클랜전이라니…….’
헨리는 이를 악물며 칼프스를 바라봤다.
도시 내에서 경비병들에게 간섭 받지 않고 싸울 수 있는 방법이 사실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결투 시스템이었다.
서로 당사자들끼리 결투를 하기로 합의하면 경비병들이 개입하지 않는다.
다만 그 경우 최대 인원에 한계가 있었다.
최대 12명.
즉 6:6으로 1개 최대 파티 인원을 기준으로 결투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파티 대 파티였다.
그리고 공방에 있는 인원으로 친다면 토르해머 클랜원들이 약 2배 정도 더 많지만, 블랙 레이븐 클랜원들은 전원 전투계열 직업이었다.
레벨도 블랙 레이븐 클랜원들 쪽이 좀 더 높았다.
맞붙는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설령 눈앞에 있는 녀석들을 처리한다고 해도 블랙 레이븐 클랜에서 새로운 자객들을 계속 보내올 게 뻔했다.
‘그냥 넘겨줄 수밖에 없나?’
어렵게 구한 오리하르콘을 고스란히 블랙 레이번 클랜에게 넘겨줘야 한다니!
한성에게 넘겨주는 거라면 모를까, 마음에 들지 않는 블랙 레이븐 클랜 놈들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생각에 헨리는 배가 아팠다.
“무슨 일이지?”
그때 블랙 레이븐 클랜원들 등 뒤에서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은빛 눈가면과 하얀 로브를 깊게 눌러 쓰고 있는 인물을 볼 수 있었다.
다름 아닌 한성이었다.
* * *
‘흠.’
은빛 눈가면 아래에서 한성은 날카로운 눈으로 블랙 레이븐 클랜 놈들을 노려봤다.
토르해머 클랜의 공방 입구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랬더니 블랙 레이븐 클랜 놈들이 있는 게 아닌가?
‘잊을 만하면 나타나네. 징글징글한 놈들.’
“얼씨구? 어디 가면무도회에 가냐? 얼굴은 왜 가리고 있어?”
그때 칼프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다른 블랙 레이븐 클랜 놈들도 히죽히죽 웃음을 흘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거야 내 마음이지. 티르 나 노이에서 가면 쓰고 돌아다니는 놈들이 어디 한둘인가.”
한성의 말대로 갖가지 이유로 가면을 쓰고 다니는 플레이어 방문자이 많이 있었다.
가면에 붙어 있는 옵션 때문에, 혹은 단순히 멋을 위해서.
“그래서 가면님께서는 무슨 볼일로 여기에 오셨나?”
칼프스는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한성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의심을 해볼 만도 하건만, 가면을 쓰고 다니는 방문자들이 많다는 한성의 말에 완전히 넘어가 있었다.
아니, 그보다 한성을 보고 무시하기 바빴다.
‘이거 완전히 애송이 자식이구만.’
칼프스는 한성을 바라보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아직 20대 초반 정도밖에 보이지 않고, 몸에 두르고 있는 하얀 망토는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다 은빛 눈가면이라니!
전형적인 겉멋 들린 애송이라고 칼프스는 생각했다.
‘상대를 보고 덤벼야지. 흐흐.’
물론 시작의 대륙에서 광산도시까지 왔으니 나름 한 가닥은 할 터.
하지만 상대는 블랙 레이븐 클랜 내부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고 있는 칼프스 팀이다.
거기다 그들은 한성뿐만이 아니라 광산도시에 있는 대부분의 플레이어 방문자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광산도시의 방문자들은 대부분 비전투 생산계열 직업이었으며 레벨도 200 안팎이 많았으니까.
그에 비해 그들은 최소 210레벨이 넘어가는 실력자들이었다.
그 때문에 칼프스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인물이 블랙 레이븐 클랜에서 혈안이 되도록 찾고 있는 미친 사냥개 혹은 폭주기관차라고 불리는 트레인이라는 사실을.
“토르해머 클랜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 비켜 줬으면 좋겠는데?”
한성은 블랙 레이븐 클랜 놈들을 한번 슥 훑어보며 말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눈앞에 있는 블랙 레이븐 클랜원들은 처음 보는 놈들이었다.
아마 블랙 레이븐 클랜이 급성장할 때 충원된 것일 터.
“네놈이지?”
“뭐가?”
갑작스러운 칼프스의 말에 한성은 긴장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다행히 눈가면 때문에 칼프스는 한성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한성으로서는 칼프스가 마치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것처럼 말해 왔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처음 보는 놈들이라고 해도 블랙 레이븐 클랜이 한성을 수배 중이었기 때문에 알아챌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나름 변장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저놈에게 오리하르콘을 구해하달라고 한 거 네놈이 맞잖아? 내말이 틀렸나?”
“…….”
칼프스의 말에 한성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정체를 들키지 않은 것 같았으니까.
“그냥 우리한테 넘겨라. 안 그러면 그냥 확!”
칼프스는 손을 들어 올리며 한성에게 위협을 가했다.
하지만 그런 위협에 넘어갈 한성이 아니었다.
거기다 상대는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블랙 레이븐 클랜의 썩을 놈들.
“싫은데? 왜 내가 네놈들 같은 양아치들에게 넘겨줘야 하지?”
“뭐? 이게 미쳤나!”
한성의 말에 칼프스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한성을 쏘아봤다.
“우리가 누군지 모르냐? 우리 블랙 레이븐 클랜이야. 우리한테 찍히고도 마음대로 게임 할 수 있을 것 같냐?”
단번에 칼프스는 한성에게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다.
“형님. 저놈 완전 또라이 같은데요?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봅니다.”
“하여간 이래서 미친놈은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쯧쯧.”
칼프스에 이어 블랙 레이븐 클랜원들 중 드로이와 알렉스가 한성을 대놓고 무시하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 칼프스가 한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야. 좋은 말 할 때 그냥 넘기지? 피보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칼프스는 건들건들 거리며 한성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때 칼프스의 시야에 한줄 메시지가 떠올랐다.
[너, 내 골골이가 되어라 님께서 결투를 신청하셨습니다.]
“뭐, 뭐야?”
순간 칼프스는 당황한 표정을 질었다.
칼프스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블랙 레이븐 클랜원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한성은 한마디 날렸다.
“천하의 블랙 레이븐 클랜원이 뭐가 이렇게 말이 길어? 꼬우면 그냥 덤벼라. 받아줄 테니까.”
한성은 피식 웃어보였다.
‘설마 벌써 닉네임 변경권을 쓰게 될 줄이야.’
한성은 닉네임을 새롭게 바꾸며 칼프스들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저주 받은 폐광에서 카오스 테라 매지션즈 나이트를 처치하고 유니크 보물 상자를 3개 받았다.
그리고 유니크 보물 상자에서 닉네임 변경권이 무려 3개나 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한성은 예전에 썼던 닉네임을 다시 바꿨다.
칼프스들을 도발하기 위한 닉네임으로 말이다.
효과는 굉장했다.
“이런 미친놈이!”
“오냐, 이 자식아! 네놈 손모가지는 내가 직접 날려 주마.”
“발모가지는 내가 날릴 거야!”
한성의 도발에 블랙 레이븐 클랜 놈들은 입에 거품을 물며 결투를 받아들였다.
한편, 토르해머 클랜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성을 도와 시건방진 칼프스들을 쳐 날려 버리고 싶지만, 후환이 두려웠다.
분명 블랙 레이븐 클랜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그런 토르해머 클랜원들의 눈빛을 읽은 한성은 칼프스들을 바라봤다.
“지랄하네. 내 옷깃 하나 못 건드릴 놈들이.”
“하, 이 자식 이거 진짜 드로이 말대로 또라이네.”
“네놈 혼자서 우리 다섯 명을 상대하겠다고?”
“미친놈.”
블랙 레이븐 클랜원들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한성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대체 얼마나 자신들이 우습게 보였으며 혼자서 상대를 하겠는가?
“무한 PK가 뭔지 네놈에게 가르쳐 주마.”
칼프스는 한성을 향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한성을 향해 드로이와 알렉스가 다가왔다.
그들은 각각 광전사와 검투사로 탱커형 직업이었다.
그 뒤로 딜러인 칼프스와 랄프가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칼프스는 레인저 계열 직업이었고, 랄프는 공격력이 높은 화염 적법사였으며, 마지막 한 명은 원거리 공격과 생명력 회복이 가능한 전투 사제였다.
칼프스 팀은 나름 밸런스가 잘 잡혀 있는 공격형 파티였던 것이다.
“감히 우리들을 혼자 상대하려고 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칼프스는 이미 다 이긴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상황만 놓고 본다면 틀리지 않았다.
혼자서 칼프스들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그래, 맞아. 아무리 나라도 혼자서 너희들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한성은 칼프스들을 바라보며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모든 만물을 평등하게 만들어주는 전설의 육죽창을 꺼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