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언데드 100만-119화 (119/318)

# 119

< 내 언데드 100만 >

제119화  평온한 레이몬의 일상

다음 날.

해가 중천을 지나고 나서야 한성은 잠에서 깼다.

‘으윽. 머리야. 등이야. 배야.’

전신을 괴롭히는 격통 속에서 눈을 뜬 한성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숙취로 인해 머리랑 배가 아팠던 것이다.

‘근데 등이 왜 이렇게 따갑지?’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여동생에게 등짝 스매시를 맞았다는 사실을 깜박한 한성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한성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부엌으로 갔다.

“역시 해장은 라면이지.”

집에 아무도 없던 탓에 한성은 혼자 라면을 끓여 먹었다.

뜨끈뜨끈한 라면 국물이 몸속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속이 좀 진정됐다.

‘등은 여전히 아프네.’

그렇게 아침 겸 점심을 라면으로 때운 한성은 닥터페이커까지 원샷한 다음 방으로 돌아왔다.

덜컥. 키이이잉.

방에 비치된 캡슐을 열고 안에 들어간 한성은 바로 티르 나 노이에 접속했다.

*       *       *

티르 나 노이에 접속한 한성의 눈앞에 익숙한 여관방 풍경이 펼쳐졌다.

“마스터~”

그리고 한성이 접속하자마자 퐁 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 속에서 루루가 나타나 한성에게 매달렸다.

“잘 있었어?”

“네~”

한성의 품안에 안긴 루루는 헤실헤실 웃었다.

크르릉.

그 뒤를 이어 멋들어진 갑주를 착용한 라이가 방안에서 등장했다.

“라이. 넌 다시 들어가. 털 날린다.”

한성은 라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실외라면 또 모를까, 지금까지 실내에서 라이를 소환했다가 털이 자꾸 묻어서 소환을 자중할 생각이었다.

끼이잉.

한성의 말에 라이는 고개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리고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한성을 바라봤다.

‘윽.’

멍무룩한 라이의 모습에 한성은 살짝 양심이 찔렸다.

“바깥에 나가면 다시 나와. 족발 사 줄게.”

컹!

단숨에 화색이 돌아온 표정으로 한 차례 짖은 라이는 모습을 감췄다.

“그럼 나가 볼까, 루루야?”

“네.”

한성의 말에 루루는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한성이 루루를 안고 여관 방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스으윽.

돌연 한성의 등 뒤로 칠흑같이 어두운 기운이 허공에서 생겨나 뭉쳐지고 있는 게 아닌가?

[오랜만이군. 계약자.]

“그대로 다시 돌아가라.”

[나는 그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않는다.]

마계기사, 레이몬의 대답에 한성은 골치 아픈 표정으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이제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레이몬의 정신 나간 성격이 다시 부활한 모양이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거냐? 교육이 부족했나 보군.”

[그런 건 내게 있어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 그럼 좀 더 처맞아 볼래?”

한성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레이몬을 노려봤다.

[왜지? 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말 좀 들으라고, 미친놈아. 너 그러다 내 손에 진짜 죽는다?”

[그건 불가능하다. 난 이미 죽어 있기 때문이지.]

“…….”

자랑스럽게 대답하는 레이몬의 말에 한성은 몸을 휘청거릴 뻔했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데스나이트.

이미 죽어 있는 언데드 몬스터였으니까.

“내가 그냥 말을 말아야지.”

한성은 한숨을 내셨다.

레이몬과 계약을 할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말로 해서는 들어먹을 위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여관방에서 레이몬을 상대로 매타작을 벌일 수도 없었다.

지금은 그냥 한걸음 물러서는 게 상책이었다.

[역시 없는 건가. 나를 상대할 만한 강한 녀석은.]

한성이 한숨을 쉬며 물러서자 레이몬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성의 입장에서는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올 거면 그냥 따라와라.”

[나는 그대를 인정한다. 계약자여.]

레이몬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한성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순한 양처럼 굴기 시작하는 레이몬의 행동에 한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여관을 나선 한성은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갔다.

작전을 실행하는 날은 내일이었다.

하루 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루루야. 뭐 마시고 싶어?”

카페에 들어간 한성은 루루를 바라봤다.

“루루, 아이스 초코 먹고 시퍼요!”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루루는 양 팔을 위 아래로 마구 흔들었다.

‘그랬구나. 아이스 초코를 좋아했구나. 이제 자주 많이 사 줘야지.’

한성은 눈을 반짝이고 있는 루루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며 머릿속 메모장에 아이스 초코를 기록해뒀다.

[나는 인생의 맛이 담긴 블랙으로.]

그때 레이몬도 루루의 말에 이어 엄격 근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커피를 마실 수 없는 몸이잖아.”

흠칫.

순간 레이몬은 한성의 말에 잠시 멈칫거렸다.

마계기사 레이몬은 데스나이트다.

그 말은 다른 해골 병사들처럼 레이몬도 하얀 뼈로 이루어진 언데드 몬스터라는 소리다.

그런데 커피를 마시겠다니?

“뼈밖에 없는데 어떻게 마시려고?”

[뼈, 뼈로 흡수?]

“지랄한다. 칼슘이나 흡수해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한성은 카페 카운터에 가서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스 초코 라떼 하나랑, 아이스 초코 프라페 하나 주세요.”

“예, 주문 받았습니다. 고객님.”

“아, 참.”

“예, 고객님.”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은 여점원이 몸을 돌리려는 찰나, 한성은 한마디 더 덧붙였다.

“커피 우유도 하나 추가해 주세요.”

레이몬의 뼈에 좋은 칼슘이 듬뿍 들어 있는 커피 우유로.

*       *       *

[뼛속 깊은 곳에서 힘이 솟아오르는 구나!]

‘컥. 진짜로 마실 줄이야.’

한성은 기가 막힌 눈빛으로 레이몬을 바라봤다.

조금 전 주문한 음료들을 카운터에서 받아온 한성은 루루와 라이, 레이몬을 데리고 한산한 2층으로 올라왔다.

유감스럽게도 라이가 마실 음료는 시키지 않았다.

라이에게 커피는 몸에 좋지 않으니까.

대신, 라이의 소울 푸드를 줄 생각이었다.

한성은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2층 창가 자리에 앉아 루루와 함께 커피를 마시려고 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레이몬이 커피 우유를 잽싸게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남자는 원샷이지.]

그 한마디를 남기며 레이몬은 커피 우유를 칠흑같이 어두운 헬멧의 입 부분에 부어 넣었다.

평소 레이몬은 칠흑의 갑주로 전신무장을 하고 있었다.

얼굴 또한 헬멧으로 전부 가리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인간인지, 아니면 데스나이트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검은 망토까지 쓰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카페 1층에서 한성과 레이몬의 대화에서 데스나이트임을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이 있었지만 농담으로 치부해 버리면 그 누가 알겠는가?

그렇게 레이몬은 얼굴을 가리고 있는 헬멧 입 부분을 열고 안으로 커피 우유를 콸콸콸 쏟아부었다.

그 순간 한성은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의 소환수, 마계기사 레이몬의 방어력이 소폭 상승하였습니다.]

레이몬이 커피 우유를 쏟아 붓자 눈앞에서 안내 메시지가 떠올랐던 것이다.

‘정말로 마신건지 아니면 뼈에 적셔진 건지.’

한성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설마 뼈에 칼슘과 카페인을 좀 흡수시켰다고 진짜로 강해질 줄이야.

아니, 그전에 뼈에 커피 우유를 흡수시키는 레이몬의 행동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흡수한 건지 바닥에 떨어지는 커피 우유는 없었다.

하지만 부작용이 두 가지 생겨났다.

커피 우유를 마시기 전에는 새하얀 뼈였지만, 커피 우유를 흡수하고 난 뒤에는 검은색으로 변했던 것이다.

칠흑의 갑주로 가려져 있는 레이몬의 하얀 뼈는 지금 그야말로 흑골이 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계약자여. 지금의 너는 굉장히 약해 보이는군. 아니 내가 지금 더 강해진 건가? 지금 보니 너같이 약한 네크로맨서와 계약을 한건 실수인 거 같다. 대체 너같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네크로맨서를 낳은 부모는 누구지? 히끅!]

“응, 아니야. 단지 네놈의 정신에 박혀 있는 나사가 느슨해진 것뿐이야. 걱정 마, 내가 다시 꽉 조여 줄게.”

‘애 앞에서 험한 말은 할 수 없지.’

한성은 이마에 핏대를 세웠지만 되도록 온화한 어투로 말했다. 옆에 루루가 아이스 초코 프라페를 빨대로 귀엽게 쪽쪽 빨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커피 우유를 마시고 카페인에 취해 있는 레이몬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는다! 마왕조차 나를 인정했지. 그런데 너는 왜 계속 나를 방해하는 거냐?]

“아, 루루. 그거 알아요.”

그때 조용히 혼자서 아이스 초코 프라페를 빨대로 쪽쪽 빨아먹고 있던 루루가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디아나 님한테 들었었는데 그때 마왕님이 레이몬 아저씨 포기했었다던데요? 마계 제일의 광골이라고 하면서요.”

루루의 말에 한성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역시 정신 나간 놈이었어.’

마왕조차 포기할 정도라니.

대체 마왕 앞에서 무슨 말을 한 것일까?

‘설마 부모 드립을 친 건 아니겠지?’

한성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몬의 성격을 볼 때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게 문제였다.

“그런데 마스터. 광골이라는 게 뭐예요?”

그때 루루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해왔다.

그런 루루에게  한성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빛나는 해골이라는 뜻이란다.”

‘사실은 미친 해골이지만.’

“정신이 불쌍한 환자가 아니고요?”

‘헐.’

반짝반짝.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고 있는 루루의 말에 한성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광골(狂骨)의 뜻을 루루가 알고 있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아니야. 루루야. 그때 마왕이 한 말은 빛나는 해골이라는 뜻으로 말한 걸 거야.”

남아일언중천금이다.

한성은 빛나는 해골로 밀어붙였다.

그러자 루루는 한성을 바라보며 살포시 미소를 짓더니 품속으로 파고들어왔다.

“마스터 사랑해요~ 헤헤.”

루루는 한성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부비거렸다.

그 때문에 한성은 보지 못했다.

어딘지 모르게 디아나와 닮아 보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말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한성은 루루의 머리와 뿔을 쓰다듬어 주었다.

“우응.”

한성의 따뜻한 손이 머리와 뿔을 쓰다듬어주자 루루는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그런 루루를 흐뭇한 미소로 내려다보던 한성은 눈앞에 있는 레이몬을 바라봤다.

‘헉?’

순간 한성은 놀란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칠흑같이 어두운 헬멧 안에서 노랗게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레이몬이 번개처럼 루루의 아이스 초코 프라페를 향해 손을 내뻗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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