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언데드 100만-49화 (49/318)

# 49

< 내 언데드 100만 >

제 49 화  세이란의 분노

“저기 방문자님? 각오는 되어 있으시겠죠? 내 일을 날려 버린 책임은 반드시 받아 낼 거니까.”

웃으며 시작한 말과 대조적으로 마지막 말에서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그녀가 부탁받은 일은 잊혀진 유적을 공략하면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조사해서 오딘 사에 보고하면 끝난다.

적어도 세이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일이 날아갔다.

어디서 굴러먹다가 나타난 건지도 알 수 없는 말 뼈다귀 같은 놈 때문에.

기본적으로 던전은 여러 번 도전이 가능하다.

하지만 방문 횟수에 제한이 있는 던전이 있는가 하면, 한 번 입장하고 나면 재방문이 불가능한 던전도 있었다.

히든 던전, 잊혀진 유적은 후자였다.

그 때문에 세이란은 오딘 사의 운영자가 부탁한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성이 던전 도전자로 인식된 이상 세이란이 파고들어갈 여지가 없었으니까.

‘아니 왜, 검성씩이나 되는 최상위 랭커가 이런 곳에 있는 거야?’

하지만 한성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체 왜 티르 나 노이 전체 랭킹 9위인 빛의 검성이 이런 곳에 있단 말인가?

랭킹 9위면 최상위 랭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를 비롯한 최상위 랭커들은 스타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상위 랭커만 되어도 인터넷이나 TV, 혹은 티르 나 노이 내에서 이벤트가 있을 때 종종 모습을 드러낸다.

하물며 빛의 검성, 세이란은 현재 랭킹 9위로 알려져 있는 하이 탑 랭커.

티르 나 노이를 플레이하는 방문자들 중에서 그녀를 모르는 플레이어들은 거의 없었다.

던전이나 필드에서 주구장창 몬스터들만 잡아온 한성도 그녀에 대해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유명한 인물이 아직 100레벨도 되지 않은 방문자들이 활동하는 시작의 대륙에 와 있다니?

‘이제 문제는 그게 아니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미 검성 세이란은 한성의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째서 혼자 시작의 대륙에 와 있는 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진짜 중요한 건 이제부터였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늦은 사람이 잘못인 거죠. 요즘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모릅니까? 경쟁에서 지면 도태되는 거 몰라요?”

세이란의 말이 끝나고 몇 초 지나지 않아 한성은 어깨를 으쓱 거리며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큭.”

세이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한성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경쟁 사회다.

비단 현실에서뿐만이 아니라 게임에서도 통용된다.

남들보다 늦거나 경쟁에서 지면 뒤로 쭉쭉 밀려난다.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전에 남들보다 먼저 시작해야 되고,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마디로 노오오오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쟁 사회.

‘애초에 그런 사회 시스템 자체가 문제이긴 하지만…….’

게임도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와 같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들보다 더 좋은 직업, 더 좋은 장비, 더 높은 레벨이 되지 않으면 지고 마니까.

“그리고 랭킹 9위나 되시는 분이 저렙 존에서 이래도 됩니까? 이렇게 랭커들이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안 좋을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한성은 손목에 차고 있는 스마트 밴드워치를 보란 듯이 세이란의 눈앞에서 흔들어 주었다.

“……!”

그 모습을 본 세이란은 이를 악물었다.

촬영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하지 않으려면 먼저 선수를 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한성은 얼마 전 블랙 레이븐 클랜의 배신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세이란이 움직이기도 전에 원천 봉쇄를 한 것이다.

세이란보다 먼저 히든 던전에 도달하고, 지금 상황을 녹화한 증거 영상이 있다고 언질을 주었으니까.

‘언제부터 녹화를 하고 있었던 거지?’

세이란의 매혹적인 등허리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카메라 앞에서라면 그녀는 극도로 조심한다.

거의 본능적이었다.

그 탓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언제부터 녹화를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불리한 상황인 것은 명백한 사실.

속사정이 어떻든 간에 한성의 말 대로였으니까.

지금 상황만 보면 랭커가 저 레벨을 핍박하고 있는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얼굴을 보인 게 실수였네요. QHD 화질로 깨끗하게 찍을 수 있었거든요.”

“으…….”

한성의 말에 세이란이 주춤거리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불과 방금 전까지 한기를 풀풀 날리며 위세를 보이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내가 왜 바보처럼 투구를 벗었을까?’

세이란은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눈앞에 있는 방문자의 도발에 열이 오른 그녀는 홧김에 그만 투구를 벗어 던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이제 상황 파악 다 되셨으면 우리 다시 보지 맙시다.”

한성은 명백한 축객령을 내렸다.

처음에는 눈앞에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몰랐다.

전신을 가리는 풀 플레이트 갑주와 투구로 무장하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평소 검성, 세이란이 입고 다니는 복장과도 달랐다.

인터넷이나 티르 나 노이 내에서 알려져 있는 그녀의 복장은 노출이 좀 있는 은색 갑주와 다리까지 내려오는 붉은 색 망토를 입고 다녔다.

그 때문에 그녀를 보고 은색의 발키리라고 부르는 팬들도 상당수 있을 정도였다.

“…….”

세이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을 때는 자신의 정체가 누군지 모를 테니 건방진 태도를 용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투구를 벗었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그럼에 불구하고 한결같은 이 태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자한테 이런 대우를 받아 본 경우는 처음이었다.

“당신 이름이 뭔가요?”

“알아서 뭐하게요. 뒤통수치시려고요?”

부들부들.

퉁명스러운 한성의 말에 주먹을 꼭 말아 쥔 세이란의 손이 떨렸다.

‘아, 한 대 후려 패 주고 싶다.’

지금 이 순간 세이란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한성의 태도가 얄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무너질 만큼 세이란의 멘탈은 무르지 않았다.

“남자가 쪼잔하네요. 이름 하나 안 알려 주고. 그딴 이름 없어도 당신을 찾지 못할 거라 생각하나요?”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협박이라니요. 그냥 사실만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인데.”

한성을 바라보며 세이란은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성도 마주 웃었다.

지금 그들은 지금 서로 존댓말을 하며 착한 척 코스프레 중이었다.

서로의 허점을 찌르기 위해 각자 동영상을 찍고 있었으니까.

웃고 있는 미소 뒤로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도 이렇게 저와 끝내고 싶지는 않겠죠? 이대로라면 전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당연하다.

세이란 입장에서는 일부러 시작의 대륙까지 힘들게 찾아 왔다가 한성 때문에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한성이 그녀에게 빅엿을 날린 상황.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사실 그녀의 행동은 횡포와 다름없었다.

자기가 늦은 걸 한성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니까.

그래도 일단 한성은 그녀에게 한 번 물어나 봤다.

일종의 기회를 준 셈.

‘내 마음은 바다처럼 높고, 산처럼 넓으니까 말이야.’

자화자찬을 하며 반문한 한성의 말에 세이란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동영상 녹화 파일, 그리고 당신 이름이면 족해요.”

남자라면 누구나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미소.

거기다 은근 슬쩍 그녀가 평소 입고 다니는 노출이 좀 있는 은빛 갑주를 몸에 걸쳤다.

팔다리가 그대로 다 드러나고, 가슴 부분도 많이 파여 있었다. 그야말로 게임의 정석인 노출에 비례해서 방어력이 높아지는 갑주가 아닐 수 없었다.

아름다운 미소와 아찔한 몸매가 드러나는 은색 갑주.

이 두 가지라면 아무리 목석같은 눈앞의 방문자 놈이라도 마음이 흔들릴 터!

‘반드시 얼굴을 날려 주고 말겠어!’

세이란은 한성을 향해 영업용 스마일을 지어 보이며 속으로는 딴 마음을 품고 있었다.

동영상 파일과, 이름.

그 두 가지가 있으면 한성을 족치기가 쉬워지니까.

세이란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냥 달라고만 하지 않겠어요. 그 두 가지를 준다면 제가 좋은 걸 해 주죠.”

세이란은 상체를 살짝 숙이며 한성을 바라봤다.

그녀의 행동에 가슴골이 훤히 드러났다.

‘자기도 남잔데 안 넘어오고 배기겠어?’

지금까지 자신의 유혹에 100이면 100 다 넘어왔다.

특별한 취향이 아닌 이상 자신의 부탁을 무시하지 않을 터!

“지랄한다. 쯧쯧.”

쩌저적.

퉁명스럽게 내뱉은 한성의 말에 세이란은 얼어붙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한성의 마음을 사려고 한 것인데 지랄한다니?

“그딴 얕은 수에는 안 넘어가니까 그만 집에 가세요.”

“…….”

모든 걸 새하얗게 불태운 빛의 검성, 세이란.

설마 자신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을 줄이야!

“게이냐!”

“갑자기 뭔 소리야! 난 노멀하다고!”

갑작스럽게 소리치는 세이란의 말에 화들짝 놀란 한성도 마주 고함을 질렀다.

“여자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안 넘어오는 게 남자냐! 너 사실 게이지? 호모사피엔스 새끼야!”

“너도 나도 호모사피엔스 맞거든? 호모만 붙으면 욕인 줄 아냐? 깡통아!”

“뭐? 깡통? 나 보고 깡통? 야, 너 말 다 했어? 죽을래?”

어디선가 주워들은 단어로 대충 둘러댔을 뿐인데 멍청하다는 소리까지 듣다니!

세이란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바로 멍청하다는 말이었다.

그녀 앞에서 멍청하다는 말을 하고 무사한 인간은 없었다.

어느 누구라고 할 거 없이 그녀에게 물리고 나서야 끝이 났다.

“너 거기서 나오기만 해 봐!”

이성의 끈을 시원하게 던져 버린 세이란은 한성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내가 미쳤냐? 여기서 나가게. 너 혼자 밖에서 놀고 있어라. 난 던전 공략하고 그냥 바로 귀환할 거니까.”

한성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던전에서 보스를 잡고 나서 귀환 스크롤을 사용하면 마을로 갈 수 있었다.

다시 입구까지 나올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마을로 돌아갈지는 한성밖에 모른다.

세이란으로서는 그저 닭 쫓던 개가 지붕을 바라보듯 있을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빨리 끝을 내야지.’

세이란 때문에 시간을 지체했다.

던전 입구가 열리고 나서 시야 한쪽 구석에 공략 시간이 떠올라 있었다.

지금까지 흐른 시간은 약 3분 정도.

그래도 세이란의 반응이 재미있었기에 한성은 만족했다.

랭킹 9위 검성의 또다른 일면을 알게 되었으니까.

‘어차피 내 이름도 모르고, 녹화 파일이 있는 한 저쪽도 함부로 못 움직이겠지.’

한성은 속으로 씩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히든 던전 입구 밖에서 세이란이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제부터 히든 던전을 공략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한성은 준비한 스킬을 시전하기 위해 손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히든 던전, 잊혀진 유적의 제한 조건 일부가 해제됩니다.]

[축하합니다. 히든 던전 잊혀진 유적의 던전 입장 인원 제한이 해제되었습니다. 안전지대가 사라집니다.]

“헐? 씨발?”

갑작스럽게 눈앞에 떠오른 안내 메시지에 한성은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그리고 사색이 된 얼굴로 세이란을 바라봤다.

고고고고고고고고.

그곳에 아름다운 황금색 머리카락이 분노로 치솟아 오르고 불길한 검붉은 오러를 전신에서 내뿜고 있는 여성이 히든 던전 입구 앞으로 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가상현실 게임 티르 나 노이 전체 랭킹 9위.

빛의 검성, 세이란.

아름답지만 분노 중인 그녀가 한성의 눈앞에 등판한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