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언데드 100만-32화 (32/318)

# 32

< 내 언데드 100만 >

제 32 화  친구 (1)

“설마 실패할 줄이야.”

여명의 빛이 밝아오는 이른 새벽.

네로폴리스 도시 상공에서 붉은 코트를 입은 사내 한 명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의 신봉자들이 일으킨 언데드 군단 사건으로 네로폴리스 도시는 뒷수습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 좋아.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사내는 사람 상체 크기만 한 수정구를 바라봤다.

사내의 눈앞에 가만히 떠 있는 거대한 수정구.

수정구 내부에 가득 차 있는 검은 문양이 화염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게 오리지널 안드로말리우스의 수정구였다.

어둠의 신봉자 간부들이 가지고 있던 수정구들은 전부 레플리카였다.

오리지널보다 떨어지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둠의 신봉자 간부들에게는 충분했다.

그리고 레플리카 수정구를 통해서 상당한 마이너스 에너지를 모을 수 있었다.

“어둠의 신봉자 놈들이 궤멸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이 정도 모았으면 그분 앞에서 체면은 지킬 수 있겠지.”

등까지 내려오는 긴 황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미남자, 페르젠.

페르젠은 붉은 코트를 펄럭이며 네로폴리스 도시 상공에서 사라졌다.

*       *       *

덜컥, 위이잉.

낮은 기계음과 함께 캡슐의 덮개가 열렸다.

네로폴리스 도시 여관에서 보상을 확인한 한성은 일단 게임을 종료했다. 어둠의 신봉자들 미션을 수행하면서 장시간 게임을 했던 것이다.

“졸리네.”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이었다.

캡슐에서 일어난 한성은 방을 나섰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부모님이 계시는 안방은 문이 닫혀 있었다.

거실을 지나 부엌에 들어간 한성은 냉장고에서 닥터페이커를 꺼냈다.

“캬. 이제 잠 좀 깨이네.”

달달함을 좋아하는 한성에게 항상 게임을 하고 난 다음 마시는 닥터페이커는 꿀맛이었다.

한성은 닥터페이커를 들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동영상 편집만 하고 자야지.”

티르 나 노이에서 스마트 밴드워치로 인터넷에 접속해 동영상을 방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편집부터 먼저 해야 했으며, 무엇보다 얼굴을 모자이크해야 했다.

‘블랙 레이븐 놈들에게 꼬리를 밟히지 않으려면 말이야.’

티르 나 노이에서 한성의 모습은 블랙 레이븐 클랜에 있을 때와 많이 달랐다.

직업부터가 확연히 다르고 장비도 달라져 있었으니까.

얼굴만 들키지 않는다면 아무도 한성이 트레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한성은 언데드 군단과 싸우는 모습을 녹화한 영상들 중에서 괜찮은 것들만 골라 뽑으며 편집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관방에서 루루의 귀여운 모습을 촬영한 동영상을 조금 손봤다.

“이 정도면 되겠지.”

남은 건 티르 나 노이에 접속해 채팅 방송 방을 개설해 동영상을 흘리면 된다.

“그럼 내일을 위해서 자 볼까?”

내일도 한성은 티르 나 노이에 접속해 게임을 할 생각이었다.

본래라면 한창 대학교를 다니고 있을 나이.

하지만 한성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상현실 게임에 뛰어들었다.

왜냐하면 한성에게는 꿈과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카슈발을 필두로 한 블랙 레이븐 클랜의 추적자들에게 당하면서도 게임을 접지 않았다.

‘빨리 예전 레벨로 복구를 해야 할 텐데…….’

침대로 향하는 한성의 머릿속에는 레벨을 올려야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다음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오가 한참 지난 시간에 눈을 뜬 한성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이 덜 깬 몽롱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 한성은 욕실로 직행했다.

욕실에서 대충 씻고 나온 한성은 거실로 나왔다.

토요일이었지만 부모님들은 일을 하러 나가셨기에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빛이는 없나?’

최한빛은 한성의 여동생이었다.

올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대학교에 들어간 풋풋한 여대생이기도 했다.

현관문 근처 신발장에 최한빛의 신발이 없는 것을 보니 어디 잠깐 밖에 나간 모양이었다.

오늘 토요일로 학교에는 가지 않으니까.

“아, 나. 혼자 라면이나 끊여 먹어야겠네.”

대충 머리를 말린 한성은 부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항상 라면을 보관하는 찬장을 열어 봤다.

“어?”

순간 한성은 나라를 잃은 국민의 표정으로 멍하게 서찬장을 바라봤다.

찬장 안이 텅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아니 완전히 비어 있지는 않았다.

작은 쪽지가 하나 있을 뿐.

[아들. 라면만 너무 먹지 말고 밥도 좀 먹어. 게임도 적당히 하고.]

“…….”

한성은 조용히 침묵했다.

꼬르륵.

하지만 뱃속은 전쟁이 나 있었다.

한성은 부엌에 있는 전기밥솥을 열어 봤다.

한 솥 가득 잡곡밥이 있었다.

집에서 게임만 하는 백수 아들을 위해 그래도 어머니가 밥은 먹고 하라고 준비한 것이다.

어머니의 마음 씀씀이에 한성은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 밥만 있으면 뭐하나요. 반찬이 없는데…….”

확실히 밥은 준비되어 있었지만 문제는 반찬이 없었다.

아니 반찬이 없는 건 아니었다.

냉장고를 열어 본 한성의 눈에 반찬통이 여러 개 보였다.

“이건 뭐 풀밭이네. 초원이 따로 없구만.”

김치부터 시작해서 시금치, 검은콩, 장아찌, 마늘쫑 등등.

20대 초반의 건장한 청년 한성에게 풀밭 반찬 세트는 부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풀밭에 동물이 있어야 되는데 동물이 없네.”

고기가 없는 반찬에 한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다 못해 라면이라도 있었다면 허탈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라면이 짱이라니까.”

한성에게 라면이란 주식이 아니다.

밥을 먹기 위한 반찬이었던 것이다.

한성은 방으로 돌아가 스마트폰을 켰다.

그리고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카톡을 날렸다.

나: 어디냐?

우리동네 꽃돼지: 밖.

나: 야. 집에 라면 없다. 올 때 라면 사와.

우리동네 꽃돼지: 뭐래? 네가 사다 먹어.

나: 아, 좀. 집에 라면 없다니까. 어차피 너도 처먹을 거잖아.

우리동네 꽃돼지: 귀찮아.

나: 야 그러지 말고 좀 사 와라. 오빠 배고프다.

우리동네 꽃돼지: 배고프면 물이나 처마시던가. 집에서 게임이나 하지 말고 바깥에도 좀 나가고 그래라, 게임 폐인아.

나: 아오, 이년이 라면 갖고 말 겁나 많네. 야야 됐다. 더러워서 내가 그냥 사 먹고 말지.

우리동네 꽃돼지: 신짬뽕 매운맛으로.

나: 짬뽕 같은 소리하고 있네. 다이어트나 해라.

그 말을 끝으로 한성은 카톡을 닫았다.

까톡! 까톡!

그러자 여동생으로부터 까톡이 여러 차례 날아왔다.

하지만 한성은 전부 무시했다.

“집에 올 때, 라면 사 오는 게 뭐가 힘들다고. 예전에는 말 잘 들었는데 고등학교 졸업할 때부터 반항기가 생겨서는.”

한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예전에는 한성의 말에 순종하는 착한 여동생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놀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요즘에 와서는 되레 한성을 이용해 먹으려 드는 경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외향도 많이 변했지.’

예전에는 큼직막한 안경에 내성적인 성격과 통통한 몸매였던 여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들어서자 확 변했다.

안경 대신 콘택트렌즈를 끼기 시작했으며, 어느 틈에 다이어트를 했는지 날씬한 체형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거기다 성격도 소극적에서 적극적으로 변해 이제는 한성과 맞먹으려 들었다.

여동생과 티격태격하는 사이가 되긴 했지만 한성 입장에서 여동생의 변화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변하게 된 이유가 있을 터!

‘설마 남자친구가 생긴 건 아니겠지? 나도 아직 여자친구가 없는데!’

언제 한번 최한빛에게 남친이 있는지 없는지 조사를 해 봐야겠다고 한성은 생각했다.

꼬르륵.

“아, 배고프다. 뭐라도 좀 먹어야지.”

결국 집안에 있는 걸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티르 나 노이에 접속하기로 한성은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이내 날아갔다.

위이이잉.

스마트폰에서 전화가 왔다고 벨소리와 함께 진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꼬북작가 이재영]

“이놈이 웬 일이지?”

전화를 한 사람은 한성의 소꿉친구였다.

“어, 왜?”

- 잘 지내고 있냐?

“그냥 저냥 지내고 있지.”

- 다른 게 아니라 오늘 함 보자고. 우리 안 본 지 꽤 됐잖아.

“안 본 지 꽤 되긴, 개뿔. 아직 2주도 안 지났구만.”

한성은 피식 웃었다.

- 아무튼 볼 거야 말 거야?

스마트폰 너머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사실 그동안 서로 바빠서 연락을 잘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알았어. 점심은 먹었냐?”

“점심은 먹었냐?”

- 아니, 아직.

“잘됐네. 그럼 지금 보자. 나도 아직 밥 안 먹었거든.”

- 그래. 장소는 우리가 항상 먹던 그곳이면 되지?

“어.”

- 그럼 좀 있다 봐.

“오냐.”

간단하게 용건을 끝낸 한성과 이재영은 전화를 끊었다.

“이 녀석 뭔 일 있나. 얼마 전에 신작 준비한다고 바쁘다고 하더니만.”

어쨌든 한성이 신뢰하는 친구 녀석의 연락이었다.

한성은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       *       *

집에서 약 20분 거리인 감자탕 집.

한성과 이재영은 그곳에서 만나 감자탕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웬 일이냐? 네가 연락을 다하고. 한동안 바쁘다고 하지 않았냐?”

한성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재영을 바라봤다.

일본 만화 주머니 괴물에 나오는 꼬북이와 비슷하게 생긴 얼굴이 한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 그 이야긴 술 나오면 하자”

“왜? 진짜 뭔 일 있어?”

“큰일은 아니고. 그냥 좀 답답해서…….”

2주 만에 본 친구의 얼굴은 살짝 어두워 보였다.

“뭔 일인지 형님한테 이야기 해 봐.”

“형님은 무슨.”

이재영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다른 게 아니라 신작 때문에.”

“왜? 또 스토리 막혔어?”

“그것도 있고, 연재 사이트에서 연락이 없어서…….”

“얼마 전에 네가 쓴 원고 보낸 장르 소설 연재 사이트?”

“응.”

이재영은 장르 소설 초보 작가였다.

세 달 전 작품 하나를 완결 짓고, 지금은 신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분량이 쌓이자 장르 소설 연재 사이트에 원고를 보냈던 것이다.

“이제 한 달이 다 되가는데 연락이 없어서. 힘이 좀 빠지네. 계속 원고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 연재를 하지 않고 있으니 재밌는지 없는지 알 수도 없고…….”

이재영은 자신감이 사라진 표정으로 주섬주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인터넷 장르 소설 연재 사이트에 원고를 보냈는데 답변이 늦어지자 자신감이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야, 그거 내가 본 거 맞지?”

“응.”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이재영의 말에 한성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야, 지금 네가 쓰고 있는 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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