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추락 (1).
서태촌과 백오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문답무용(問答無用).
신계에 들어선 이상 서태촌에겐 상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번-쩍!
한줄기 섬광이 허공을 가르고 백오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서태촌의 발도술이자 SS급 스킬인 단천세.
초월을 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오(參悟)를 거듭한 그의 단천세는 SS급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진정 하늘을 갈라버릴 것처럼.
하지만 상대는 무신 백오.
일신의 무(武)가 극(極)에 이르러 신이 된 사내.
꽈-과과광!
백오는 서태촌의 벼락같은 일격을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 박살 냈다.
이어 에리아를 돌아본 백오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말이 많다 했더니, 이걸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백오의 물음에 에리아는 일그러졌던 머리를 펴며 대꾸했다.
“너만 좋은 꼴을 보게 놔둘 수는 없잖아.”
“이들과 날 싸움 붙이고 어부지리라도 취하겠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네 말대로 모두 죽는 것보단 누군가가 살아남는 게 좋지 않겠어? 그렇게 될 것 같진 않지만…….”
사-라락.
에리아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공간의 일부가 분해되며 그녀를 빨아들였다.
신계는 에리아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공간.
그녀는 도망치려 했다면 언제든 도망칠 수 있었다.
그래 봐야 신계 안쪽이라 백오가 마음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찾아낼 수 있기에 시도하지 않았을 뿐.
번-쩍!!
카카칵!
하지만 지금처럼 백오를 붙잡아둘 누군가가 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다.
“아쉽군. 그 모가지를 썰어버릴 수 있었는데 말이야.”
서-걱!
퍼펑!
다시 한번 공간을 잘라내는 듯한 절삭음과 함께 검격을 토해내는 서태촌의 환두대도.
어느새 그의 등 뒤엔 100여 명의 원정대가 늘어서 있었다.
“인간들은 이런 걸 두고 외통수라고 하던가? 쩝.”
백오는 에리아가 머물던 자리 쓰게 입맛을 다셨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에리아를 찾아 소멸시키고 싶었지만, 그의 앞에 있는 적이 녹록하지는 않았으니까.
선두에 선 서태촌과 원정대 그리고 구정철을 훑은 그의 시선이 원정대의 가장 뒤쪽으로 향했다.
“너희가 강현과 도연우겠군.”
강대한 신성을 몸속에 지닌 두 사람.
신을 향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초월자들.
그들을 바라본 백오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어찌 보면 너희가 이곳에 온 것이 내겐 전화위복이 될지도 모르겠군.”
에리아가 말했던 것처럼 백오는 신계를 정리한 후 지구에 강림할 계획이었다.
죽을 날만 기다리는 가축처럼 신계에 갇혀 살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원정대가 신계로 직접 찾아왔으니 당연히 반색할 수밖에.
“죽을 자리를 찾아오다니. 너희들의 운도 여기까지인가 보다.”
백오는 승리를 자신했다.
아홉 개의 권능.
화수분처럼 마르지 않고 차오르는 신성.
비록 신격이 없어 신이라 불리진 못 하겠지만 그가 지닌 신성은 중급신이라 불려도 무방할 정도로 강대했다.
“내 이름은 백오. 너희의 목숨을 거두어갈 자이니 알아두어라.”
수천만 년을 신으로 살아온 그의 신생(神生)에서도 단 한 번도 지녀본 적 없는 강대한 힘.
그것이 백오가 승리를 자신하는 이유였고.
현 상황을 오판하게 된 계기였다.
***
“저거 지금 지 동료들을 다 처먹은 거지?”
오만한 얼굴로 원정대를 바라보는 붉은 머리의 신.
자신의 이름을 백오라 밝힌 신을 바라보는 연우 형의 눈에는 경멸이 어려 있었다.
“느껴지는 신성을 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저런 눈빛이라…. 저것도 상종 못 할 놈이네.”
그 말을 들은 것인지 우리를 노려보는 백오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백오.
들어본 이름이다.
신명(神名)은 무신(武神).
미루가 말하길 천마를 사도로 부리던 신이라 했다.
그리고 연우 형은 그 천마에게 패한 적이 있었다.
강남 대참사.
그 현장에서.
그래서일까? 연우 형의 눈에선 유독 호승심이 짙게 느껴졌다.
백오와 눈을 마주한 연우 형은 양손에 신성력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저건 우리가 맡을 테니 현이 넌 아까 도망친 그 신을 찾아서 정리해줘.”
“…괜찮으시겠어요?”
솔직히 조금 걱정됐다.
격은 모르겠지만 백오에게서 느껴지는 신성은 정말 무시무시했으니까.
“괜찮아. 그게 우리 원래 계획이었잖아. 네 특성을 발현하려면 그렇게 해야만 하고.”
원래 계획은 그게 맞았다.
하지만 지금 그 계획은 많이 틀어진 상태였다.
“달라진 건 없어. 어쩌면 오히려 쉬울지도 모르지.”
카카캉!
휘유우우우---.
퍼-퍼퍼펑!
그 순간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거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이미 백오를 향한 원정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무를 수도 없는 상황.
“그럼. 다녀올게요.”
번쩍!
내가 대답을 마쳤을 때 연우 형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한 줄기 섬광이 되어 백오에게 쇄도하는 연우 형.
퍼-어어어엉-!
곧이어 전장엔 냉기와 열기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연우 형까지 가세한 원정대의 싸움은 전혀 쉬워 보이지 않았다.
100여 명의 인간과 한 명의 반신.
백오의 손짓 한 번에 신체 일부분을 잃고 나가떨어지는 이들이 대다수였지만, 그들은 비명 한번 내지르지 않고 힐링 포션을 사용해 신체를 수복한 뒤 다시금 백오를 향해 달려들었다.
비명도 고함도 없이.
찰나의 순간 수백 개의 스킬이 만들어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그 싸움은 처절하면서도 장엄하고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저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싸움이 인류의 명운을 건 마지막 싸움이 되리라는 것을.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거드는 수밖에.’
나는 공간지배의 권능을 발현했다.
아까 사라진 여러 가지 도형을 뭉뚱그려 놓은 듯한 기괴한 형태의 신을 쫓기 위해서.
‘미루의 말대로라면 그 신이 공간의 신 에리아겠지.’
이곳 신계와 지구 침략을 위한 던전을 만들고 관리하는 신이라 했다.
어떤 의미론 신계의 신 중 가장 중요한 신이라 볼 수 있었다.
에리아를 소멸시키고 그 권능을 흡수하면 지구에 생성되는 던전을 관리할 방법이 생긴다는 뜻이었으니까.
‘모조리 없애버리면 편한데 그럴 수는 없으니까.’
던전이 모두 사라진다면 그 파급력은 엄청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지구 문명은 마나석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중요한 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 미리 준비해야 했다.
“스킬 사용. 금식충-디뷰에이프.”
스킬 명을 외치자 온몸의 모공에서 검은 어둠이 뿜어져 나와 내 몸을 감쌌다.
눈 한번 깜짝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내 몸은 어느새 묵빛의 갑옷에 뒤덮여 있었다.
절그럭.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두 개의 팔도 여전했고.
“스킬 사용. 금식충-케이돈.”
이어서 케이돈도 소환해 팔목에 착용했다.
무기나 방어구로 변환해 사용하면 효용이 좋은 녀석이니까.
버프 스크롤과 포션까지 사용해 풀 도핑을 마친 나는 뇌신일체를 사용해 몸을 날렸다.
꽈르르릉-!!
뒤이어 울리는 천둥소리.
공간시가 보여주는 정보와 공간지배의 권능.
번개로 변한 내 몸은 신계의 바닥을 파고 들어갔다.
대지라 불러야 할지 의문이 드는 이상한 선과 도형들로 이루어진 바닥.
공간지배로 파악한 신계는 상부가 평평한 깔때기 모양의 구조였다.
에리아가 숨어있는 곳은 그 최심부.
뇌신일체를 사용한 상태로도 한참을 아래로 파고 들어가고 나서야 나는 에리아를 만날 수 있었다.
***
신계의 심장부.
무색의 빛이 주변을 밝히는 새하얀 공간.
“네가 강현이구나.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 반가워.”
찌그러진 찐빵? 찢어진 종잇조각?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기괴하게 생긴 도형이 반가운 목소리로 나를 맞이했다.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네가 올 거로 생각했으니까.”
“어째서?”
“하하하. 그야 네가 공간 계열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당연한 예측 아닐까?”
자신과 백오를 제외한 모든 신이 소멸하고 신계가 원정대에 의해 침략당한 상황에서도 에리아는 의외로 명랑했다.
“너. 무슨 꿍꿍이지?”
죽다 살아난 주제에 저런 명랑한 목소리라니, 당연히 의심스러웠다.
“글쎄 무슨 꿍꿍이일까? 맞춰볼래?”
“미안하지만 너랑 스무고개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빠지지지지-!
뇌기를 끓어 올리자 죽음의 권능이 어린 검은 뇌전이 들불처럼 일어나 녀석을 덮쳐갔다.
번쩍이는 검은 뇌광.
나는 그 속에 몸을 숨긴 채 에리아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 먼저 쏘아 보냈던 뇌기가 허공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그리고 나의 위치는 어느새 처음, 이 공간에 들어왔을 때처럼 에리아와 멀어져 있었다.
마치 녀석과 나 사이의 공간이 늘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아쉽겠지만, 여기선 이런 거 안 통해. 이 공간은 내 근원과도 같은 공간이거든.”
“…신지를 말하는 건가?”
“미루랑 리퍼가 참 많이도 떠벌렸네. 신지를 알고 있는 걸 보니.”
“넌 네 신지를 던전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나?”
“맞아. 네가 먹어치운 그것 중에 나의 신지도 끼어 있었지.”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내가 포식한 SSS급 던전 중에 에리아의 신지가 있었다면 이 공간은 그녀의 신지일 수 없으니까.
“지금 나랑 말장난하자는 거야?”
내 기분을 읽은 디뷰에이프의 두 팔이 검을 뇌전을 쏘아 냈다.
하지만 뇌전은 에리아에게 닿지 못했다.
“말장난이라니. 내가 존재한 이래 이렇게 진지해 본 일이 없는걸? 난 그냥 마지막으로 너와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야.”
쓱쓱.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움직이는 동그랗고 네모난 두 손.
에리아가 손을 움직이자 디뷰에이프가 쏘아 보낸 뇌기는 허공의 일부를 떼어낸 것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젠장.
내가 가진 가장 강한 무기가 먹통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것저것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백오를 상대하고 있는 원정대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싸우고 있을 테니까.
“사망 선고.”
죽음의 권능을 사용하자 신성 일부가 뭉텅 깎여나갔다.
대상은 에리아.
“하하하. 이런 건 안 통한다니까.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에서만큼은 과거 신이었을 시절의 힘을 쓸 수 있거든.”
신이었을 시절의 힘.
에리아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 신성 스탯의 절반 정도를 깎아 먹은 사망 선고는 녀석에게 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녀석이 그것을 막아냈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그리고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신의 힘이라…. 꼴을 보니 그 힘 무한하지는 않은 것 같네?”
“눈치를 챘나 보네?”
나의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녀석의 몸을 이루고 있는 도형들의 색이 연해진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공격을 하지 않는 지금도 에리아의 몸은 느리지만, 확실히 연해지고 있었다.
마치 존재가 지워지는 것처럼.
“너. 소멸하고 있구나.”
에리아는 서서히 소멸해 가고 있었다.
“이래서 눈치 빠른 애들이 싫다니까. 쩝.”
입도 없는 게 쓰게 입맛을 다신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왜 소멸해 가는 순간 되지도 않는 말장난이나 하려는 걸까?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건 자신일 텐데.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떠다녔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두웅-!
“이제 끝났네.”
공간, 신계 전체에 둔중한 울림이 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에리아의 몸은 더 는 주변 공간과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연해져 갔다.
“내가 너희에게 준비한 선물이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뭐?”
“뭐.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고. 하하하.”
마치 이 상황이 통쾌하다는 듯 큰 웃음을 터트리던 에리아는 그렇게 소멸했다.
그리고 에리아의 몸에서 떠오른 알록달록한 빛 덩어리가 내게 흡수되는 순간 나는 그녀가 왜 그런 웃음을 터트렸는지 알 수 있었다.
드드드드드.
거대한 진동음과 함께 분해되는 신계.
쩌-적.
쩌저적!!
에리아가 소멸하고 홀로 머물게 된 공간의 바닥이 떨어져 나가며 내 눈에 들어온 풍경.
그곳엔 떨어져 나간 신계의 파편들이 새빨갛게 달궈진 채 낙하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바로 푸른 별.
지구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