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198화 (197/202)

198. 복수의 계절 (4).

“이거 뭔가 이상한데?”

투명한 보호막 너머.

“그러게요…. 내분이라도 난 건가? 완전 개판인데요?”

보호막 안의 신전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외부에선 수십억 마리의 몬스터가 함대와 정벌군을 몰아내기 위해 파상공세를 펼치고 있는데 정작 보호막 안의 신전에선 새하얀 로브를 걸친 신도들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싸움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지금 들어가?”

“당연히 지금 들어가야지.”

연우 형의 물음에 답한 건 구 영감님이었다.

“어차피 다 때려죽일 놈들인데 기다릴 필요가 있겠나?”

그리고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신도와 사도라는 놈들은 죽어 마땅한 놈들이다.

수십억 인류를 배신한 배덕자들에게 죽음 외에 다른 벌은 있을 수 없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정벌군이 피를 흘리고 있을 터.

그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작전이 빨리 끝나야 했다.

통통.

구 영감님이 눈앞에 있는 투명한 막을 두드리며 내게 물었다.

“이거. 열 수 있겠나?”

지금도 수천 발의 마나 레이저를 버텨내고 있는 보호막.

이만한 공격에 흠집 하나 나지 않는 걸 보면 신의 힘이 깃들어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없습니다.”

공간지배라는 권능까지 가지게 된 내게 이제 이 정도 보호막을 뚫는 것쯤은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퉁.

허공에 손을 가져다 대자 묘한 반발력이 내 손을 밀어내는 게 느껴졌다.

‘역시 신성으로 만들어 낸 보호막이야.’

신성은 마나보다 상위의 힘.

명색이 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보호막이니 마나 레이저 포격으로 뚫을 수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지만 신성이 있는 존재라면 어렵지 않게 뚫을 수 있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연우 형 정도면 이 보호막을 깨부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쉬운 길을 두고 굳이 힘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권능사용. 공간지배.’

우웅.

공간지배의 권능을 사용하자 손끝에서 시작된 떨림이 보호막을 타고 파문처럼 번져갔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작은 조약돌처럼.

보호막 위에 투영된 공간지배의 권능은 서서히 자기 영역을 넓혀갔다.

‘무리할 필요는 없지.’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신성 스탯을 확인한 나는 대여섯 명이 드나들 만한 구멍을 만들고 권능의 확장을 멈췄다.

굳이 전부 없앨 필요는 없다.

이게 다 내 피 같은 신성 스탯이 소모되는 거니까.

훅!

보호막의 일부가 사라지자 그 사이로 뜨끈한 공기와 함께 비릿한 혈향이 풍겨왔고.

그것을 느낀 원정대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럼….”

쿵!

선두에 서 있던 구 영감님이 크게 걸음을 내디뎌 보호막 안으로 들어서고.

“…우리의 복수를 시작해볼까?!”

그 말이 공격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원정대원들이 신전을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전 세계를 대표하는 100여 명의 초강자.

서로 칼질하기 바쁜 신도들 속으로 그들로서는 막아내기엔 버거운 재앙이 스며들었다.

***

신전 점령은 빠르게 이뤄졌다.

아직 꽤 많은 수의 신도들이 살아있었지만, 그들은 공동의 적이 나타났음에도 서로를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신도들을 제거하는 것쯤은 원정대에겐 너무 쉬운 미션이었다.

사도들의 저항이 조금 거세긴 했지만, 그마저도 셋밖에 되지 않아 도연우와 강현에 의해 손쉽게 제거당했다.

신전 내부.

신도들이 믿고 따르던 12신의 거대한 신상이 벽면을 따라 세워져 있는 반구형의 돔.

돔의 중앙엔 거대한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제단 위에 떠 있는 우윳빛 수정을 바라보던 강현이 도연우를 향해 물었다.

“저게 신계로 통하는 입구란 거죠?”

“응. 미루가 말한 대로라면 저게 입구 역할을 할 거야.”

“그 말 믿을 수 있는 걸까요?”

“여기까지 왔는데 믿어야지 뭐.”

하긴, 그 말이 맞았다. 이미 원정대와 함께 여기까지 온 이상 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 수밖에.

‘아니면. 공간지배의 권능으로 문을 열 수도 있으니까….’

공간지배라는 대안이 있으니 크게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강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신도들을 처리하기 위해 신전 곳곳으로 퍼져나갔던 원정대가 돔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슬슬 준비해야겠네요. 형이 하실 거죠?”

“응.”

강현의 말에 입구 쪽을 힐끗 돌아본 도연우가 제단을 향해 나아가며 신성을 끓어 올렸다.

그의 손바닥 위에 만들어진 주먹만 한 크기의 빛 덩어리.

우우우웅---.

뜨거운 열기와 싸늘한 한기가 동시에 느껴지는 신성 덩어리가 도연우의 손을 떠나 수정에 닿자 수정이 크게 진동했다.

두웅-!

마치 거대 몬스터의 심장처럼 둔중한 울림을 토해내면 진동하던 우윳빛 수정에서 이내 신성력이 폭사 되어 나오며 포탈을 만들어냈다.

원래라면 테라포밍이 완료된 후, 신들의 강림을 위해 사용되었어야 할 차원 포탈이 역으로 신계 진입을 위해 활용되었다.

신의 강림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인지 기존 포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포탈.

어느새 다가온 구정철이 포탈을 보며 거칠게 말했다.

“그 빌어먹을 신이라는 것이 거짓을 말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군.”

아직 전투의 흥분이 걷히지 않은 그의 목소리엔 짙은 살기가 맺혀 있었다.

그것은 서태촌도 다르지 않았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이 이런 것일까?

한 자루 칼처럼 전신에서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내는 서태촌.

그는 고개를 돌려 등 뒤의 원정대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막 전투를 끝내고 와서인지 전투의 흥분을 지우지 못해 눈가에 번들거리는 살기를 내비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살아 돌아오지 못할 테지.’

저 포탈을 넘어가면 원정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신들과의 싸움이었다.

원정대의 대부분이 SS급 각성자인 이상 그들의 피해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가야 한다.’

이번 작전은 대외적으로 비밀리에 이뤄진 작전이다.

교단의 첩자가 있을지 몰라 작전 브리핑도 출정식이 거행될 때 하지 않았던가.

만일 신들의 강림을 기다려 싸움이 벌어진다면 승리한다 해도 지구 인류는 어마어마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승리하지 못하면 어차피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싸움이야.’

그래서 이번 작전이 수립됐다.

신들이 지구에 강림하기 전 그들을 처리할 마지막 기회.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

저벅.

원정대의 얼굴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긴 서태촌이 묵직한 걸음을 내디뎠다.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지금도 밖에선 정벌군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을 테니까.

서태촌이 포탈을 넘자 그 뒤를 따라 원정대원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포탈을 넘었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남은 싸움이 절대 쉽지 않다는 걸.

***

공간의 신 에리아는 눈앞에서 벌어진 참상을 보며 말을 잊지 못했다.

“…왜?”

삼 개월 전 강현과 도연우의 손에 리퍼와 미루가 소멸하고 신계의 신들 사이엔 위기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제약을 받지 않은 신이 인간에 의해 둘이나 소멸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엔 미루의 신지를 공간 분리해 고립시킨 에리아를 향한 의심이 시작이었고, 이후엔 온건파와 강경파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그렇게 얄팍한 믿음으로 묶여 있던 신들의 동맹엔 균열이 생겼고 서로를 불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시작이 누구였는지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바로 전에 강경파의 마지막 신이었던 ‘종말의 신 케르티안’이 소멸하며 남은 신은 단둘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에리아는 깨달았다.

이 싸움의 끝에 가장 많은 이득을 본 신이 누구인지.

“대체 무엇 때문에…?”

에리아의 물음에 답한 것은 붉은 머리칼을 사자 갈기처럼 휘날리는 신이었다.

“지금 상황에 이유가 궁금한가?”

선이 굵은 얼굴과 어울리는 묵직한 목소리.

붉은 눈동자를 움직여 에리아를 바라보는 무신(武神) 백오.

그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는 명백히 에리아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소멸의 순간이 다가왔음에도 얼토당토않은 의문이나 품는 아둔한 자를 향한 비웃음.

하지만 에리아는 그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음을 이어갔다.

“난 알아야겠어. 네가 왜 이런 선택을 한 건지. 왜 신언으로 맺은 맹약을 어긴 건지.”

에리아의 그 물음에 백오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고 헛헛한 얼굴로 허공을 올려다봤다.

“신이라…. 우리가 신인가?”

“…….”

짙은 허무와 자책이 담긴 물음.

그것은 에리아를 향한 물음이며 동시에 백오 자신을 향한 물음이기도 했다.

“신격을 잃고 영락해 버린 그 순간부터 우린 신이 아니었다. 신언은 더는 우리를 제약할 수 없어.”

허공을 올려다보던 백오가 고개를 내려 에리아를 바라봤다.

수많은 선과 점, 면과 도형이 얽히고 얽혀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

그것은 누가 봐도 신이라 보기에 무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너 자신을 봐라. 에리아. 던전을 만들고 신계를 유지하기 위해 권능을 남발한 덕에 붕괴하고 있는 네 모습을.”

신이었던 시절 그리고 반신으로 영락했던 초장기만 하더라도 에리아의 모습은 이러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신도 중 그 믿음이 충실하지 않은 율리아를 사도로 발탁한 이유.

그것은 율리아의 모습이 과거의 그녀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선택을 하면 안 됐어. 에리아.”

“난 네가 맹약을 깨고 이런 일을 벌인 이유를 물었어. 백오. 쓸데없는 말로 논점을 흐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녀는 백오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여전히 올곧은 목소리로 자신의 의문을 해소하고자 했다.

“…그래. 못 해줄 말은 아니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던 백오는 이내 말을 이었다.

“생존…. 생존을 위해서였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생존이라고?”

“리퍼와 미루가 소멸한 이후 이런저런 생각이 들더군. 이렇게 하나둘 소멸하며 적에게 권능과 신성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그것을 내가 취하는 게 옳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

그 말을 들은 에리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인 판단이네. 인간에 의해 우리의 불멸성이 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으니까.”

이대로 가면 지구의 테라포밍을 완료해 강림하기 전에 강현과 도연우라는 초월자들에 의해 신들이 소멸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신들이 가지고 있던 권능과 신성은 오롯이 적을 성장하게 할 자양분이 될 터.

백오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신이 모든 권능과 신성을 취해 그들과 싸우는 게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누가 뭐래도 12신 중 최강자는 자신이었으니까.

그렇게 그는 암중으로 강경파와 온건파를 자극해 싸움을 붙였고 끝내 자신의 목적을 이뤘다.

아홉 개의 권능과 넘치는 신성.

비록 온전한 신이었을 때처럼 신명까지 얻지는 못했지만 당장은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궁금증이 풀렸다면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군. 그들이 신전을 공격하는 것 같으니.”

“너, 나의 권능을 흡수해 강림을 위한 포탈을 열 생각이구나.”

“그래.”

“그 세계가 너를 감당하지 못할 텐데? 너의 격을 감당하지 못해 파편이 되어 부서질 거야. 아니 그전에 관리자가 개입해 너를 막을 테지.”

에리아의 말에 백오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남아 언제 죽을지 모를 날을 기다리며 가축처럼 살아가는 것보단 그게 낫겠지.”

“넌….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거구나.”

“우리가 멈춰 있는 동안 저들은 더욱 성장할 테니까. 신격을 거세당한 나는 두 번 다시 신이 될 수 없지만, 저들에겐 그 기회가 열려있어. 그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가 승리할 확률이 감소할 거고…. 지금이 내가 유일하게 승리할 수 있는 순간이다. 그게 내 판단이야. 관리자의 개입이나 세계가 부서지는 것은 그다음에 생각해야 할 문제야.”

백오는 그렇게 말하며 붉은 신성으로 물든 손을 에리아에게 뻗었다.

“너에게 사감은 없어. 에리아. 나는 단지 생존확률을 좀 더 높이고 싶었을 뿐이다.”

백오의 손이 찌그러진 에리아의 머리를 파고들려는 순간.

우우우웅---!

공간이 울리며 새하얀 포탈이 열렸다.

그것을 본 에리아는 낭랑한 웃음을 토해냈다.

“하하하!! 백오. 아무래도 네 판단은 조금 더 빨랐어야 했나 봐.”

전에 없이 명랑한 그 웃음소리에 백오가 와락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저벅.

깡마른 체형에 날카로운 칼과 같은 기세를 내뿜는 노인 하나가 포탈을 빠져나왔다.

검신(劍神) 서태촌이 무신 백오와 만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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