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복수의 계절 (2).
밖에서 성대한 출정식이 열리고 있을 때.
나와 연우 형을 비롯한 두 영감님은 기함 풍백의 회의실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약 100여 명의 인원.
그중 선두에 앉아 있는 세 사람.
푸른 눈에 백발에 가까운 금발 머리를 가진, 연륜이 느껴지는 중후한 얼굴의 노신사.
그저 앉아 있는 자세만으로 ‘나는 귀족입니다.’라고 어필하고 있는 저 남자의 이름은 아서 게일.
영국을 대표하는 각성자이자 SSS급 헌터이며 대마법사다.
그 옆에서 출정식에 맞춰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수녀 복장의 중년 여인은.
저스티나 로셀.
미국의 보물이자 성녀라 불리는 SSS급 힐러다.
그 옆에는 멕시코 갱처럼 흉악한 문신이 가득한 얼굴의 노인네가 시가를 물고 뻐끔거리며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호세 카를로스.
SSS급 근접계열 각성자이자 남아메리카의 제왕.
일신의 무력으로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를 점령해 남아메리카에 자신만의 왕국을 세운 독재자다.
다른 두 사람은 몰라도 솔직히 저 영감이 올 줄 몰랐다.
그냥 와꾸만 봐도 지구 평화 같은 건 1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노인네였으니까.
그 외에도 각 나라를 대표하는 각성자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지만, 이름값으로는 저 세 사람에게 비빌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물론, 나와 함께 자리하고 있는 연우 형과 두 영감님을 제외하고.
“그래. 우리는 교단 공격엔 참여하지 않는다고 했소?”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호세 카를로스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불퉁하다.
그런 호세의 말을 받은 것은 구 영감님이었다.
“그렇소이다. 이곳에 모인 인원은 교단을 공격하는 대신 다른 작전에 투입될 거요.”
“다른 작전?”
“우리는 신들이 모여 있다는 신계(神界)로 넘어가 그들과 싸울 것이오.”
웬일로 잔뜩 무게를 잡고 말하는 구 영감님의 말에 호세는 시가를 힘껏 빨아들이더니 짙은 연기를 내뿜었다.
“후우…. 신과의 싸움이라….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은데….”
미묘하게 말끝을 흐리던 호세가 얼굴을 씰룩이며 험악한 인상을 짓더니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 그 결정을 당신들 마음대로 하지?”
‘아….’
난 그제야 호세가 왜 이렇게 불편한 분위기를 만드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양반. 주도권을 잡고 싶은 거구만?’
지금 호세가 시도하고 있는 건 원정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기 싸움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잘못되었다.
상대는.
쾅!
“어째 내 귀엔 그 말이 인류의 운명이 달린 중차대한 전쟁을 앞두고 알력 다툼이나 하자는 소리로 들리는구만. 맞나?”
걸어오는 싸움은 마다하지 않는 싸움에 미친 괴물.
투신(鬪神) 구정철이니까.
자신의 앞에 있던 탁자를 박살 내곤 몸을 일으킨 우리의 근육 몬스터 구 영감님.
호세는 그런 구 영감님을 향해 거침없이 도발을 날렸다.
“후우-. 그 중차대한 일에 늙어 총기가 흐려진 당신 같은 영감이나 저런 햇병아리보다야. 내가 대표가 되는 게 낫지 않겠어?”
그 거침없는 도발의 대상은 구 영감님 하나가 아니었다.
내 옆에 앉아 폰 게임에 열중하고 있던 연우 형이 슬쩍 고개를 들며 반문했다.
“음? 나?”
“그래 너 말이다. 애송아. 네가 인류 최초의 EX급 각성자라지? SSS급으로 승급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EX급이라니 등급측정을 제대로 한 것인지 의문스럽군.”
호세의 말에 다른 각성자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제 객관적으로 봐선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다.
SSS급 승급한 지 1년도 안 돼 EX급 승급이라니. 옆에서 보지 않았다면 나도 믿지 못했을 테니까.
연우 형의 옆에 앉아 있어서였을까?
왠지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그리 곱지 않았다.
‘어…. 그 애송이엔 저도 포함이었던 건가요?’
생각해 보니 각성한 지 1년 만에 SS급이 된 것도 말이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구나. 제길.
“어. 나,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아. 이거 그거지…?”
해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입을 연 연우 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호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대가리 결정전.”
세상에. 대가리 정하기라니. 저 멋대가리없는 명칭은 또 뭐란 말인가?
저 인간 분명 어제 뭔가 이상한 애니메이션을 본 게 틀림없다.
내가 뜨악한 눈으로 연우 형을 바라볼 때였다.
“리더를 정하는 거라면 저도 빠질 수 없겠군요.”
호세 카를로스 옆에 있던 아서 게일이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뭔 일어서는 몸동작 하나까지도 기품이 느껴졌다.
“대영 제국의 공작인 제가 여왕 폐하가 아닌 다른 이의 명령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이게 저 먼 영국에 있을 여왕까지 들먹여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고?
캉캉!
갑자기 들려오는 쇳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기도를 하고 있던 저스티나 로셀이 양손에 은색의 건틀릿을 끼고는 그것을 부딪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 힐러 아니었어?’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저스티나가 가볍게 성호를 긋더니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 저는 전투 수녀라서요.”
전투 수녀가 뭔진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러니까. 딜도 되고 힐도 된다는 거지?’
해맑게 웃는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기는 근접계열 각성자인 호세 못지않았다.
그렇게 내가 잠깐 저스티나에게 한눈을 판 사이.
웅성웅성.
어느새 자리에 앉아 있던 100여 명의 인원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모두 각자의 나라에서 한 손에 꼽히는 강자들이다 보니 등급에 상관없이 호승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하…. 작전 회의는 개뿔.’
그렇게 신계 원정을 위한 작전 회의 때문에 모인 회의실 안에서 난데없이 지구 최강자를 가리기 위한 천하제일 무술대회가 개최됐다.
***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10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연우 형과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연우 형 혼자서 모두를 제압해버린 것이었다.
“에구구. 젊은 놈이 노인 공격하네-.”
그렇다.
“허…. 이놈이 어디서 좋은 걸 먹고 왔나. 언제 이리 강해졌나? 이놈아 좋은 것 있으면 이 노인네들한테 양보해야지 너 혼자 챙겨 먹고 다니니 좋더냐?”
‘연우 형과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바닥에 나뒹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엔 서 영감님과 구 영감님도 포함되어 있었다.
“노인 공격은 무슨? 영감님들이 먼저 선빵 치셨잖아요. 저는 그저 가볍게 제압해 드린 것 말곤 잘못 없습니다.”
“그게 노인 공격이지 이놈아!”
앓는 소리를 내던 구 영감님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지만, 연우 형은 귓구멍을 후비며 가볍게 흘려 버렸다.
“EX급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분들이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시면 욕먹어요.”
“쩝.”
연우 형의 핀잔에 쓰게 입맛을 다신 구 영감님이 끙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나를 쳐다봤다.
“그나저나. 자네는 왜 멀뚱히 서 있는 게야?”
갑자기 왜 가만히 있는 나한테 불똥이 튀지?
“스승이 이런 일을 당하면 복수의 칼을 가는 게 제자의 도리이거늘!”
뭔가 사극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날리는 구 영감님.
나는 멀뚱히 영감님을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연우 형한테도 배웠는데요?”
“어, 어?”
“아시잖아요. 연우 형한테 창술도 배우고 스킬도 배우고. 두 분 어르신한테 배운 것처럼 똑같이 배웠어요.”
“아….”
나는 서 영감님에겐 검술을 구 영감님에겐 근접 박투술을 연우 형에겐 창술을 배웠다.
누구 한 명이 아니라 세 분이 내 스승이라는 말씀.
내 대답을 들은 구 영감님이 팩하고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에잉…. 그때 확 낚아챘어야 했는데. 쩝.”
지금 말하는 ‘그때’라는 건 아마 태초의 별에 건너갔을 때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그전까진 구 영감님과 나는 빈말이라도 좋은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네놈이 한번 붙어보자 그래서 꼴이 이게 뭐야. 나이 어린놈한테 발리니까 좋냐? 좋아?”
“…….”
불퉁한 얼굴로 툴툴거리던 구 영감님은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던 서 영감님의 핀잔에 입을 꾹 다물었다.
연우 형은 할 일이 끝난다는 듯 원래 자리에 앉아 다시 게임을 시작했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이들은 괴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세 사람을 쳐다봤다.
‘그래도 세 사람을 상대로 5분이나 버티다니 대단한데?’
먼저 시비를 걸었던 호세 카를로스를 비롯한 100여 명의 인원이 바닥에 나뒹구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5분.
남은 5분은 연우 형과 두 영감님의 싸움이 결판나는 데 걸린 시간이다.
비록 목숨을 걸고 한 싸움은 아니었지만 까마득한 실력 차를 느끼기엔 충분한 시간.
짧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시간이었으나 반신과의 싸움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속도 속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뇌신일체 스킬을 사용하면 시간이 느려지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연우 형이나 다른 반신들도 신속(神速)의 속도로 전투를 펼치기에 5분은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니란 뜻이었다.
그런데 세 사람을 맞아 5분이나 버텼으니 충분히 내 예상을 벗어났다.
‘잘하면 반신 셋 정도는 붙잡아 둘 수 있겠어.’
그들에겐 앞으로 싸워야 할 반신이라는 것들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미리 체험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연우 형이나 나는 우리의 전력을 평가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
싸움의 여파로 난장판이 되다시피 한 회의실 안.
작전 회의를 위해 모였지만 사실 작전이라고 부를 만한 건 없었다.
애초에 반신이라는 적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별로 없었으니까.
연우 형이 미루에게서 얻어낸 정보로 대략적인 신들의 능력은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을 100%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당장 자신이 소멸하는 마당에 억하심정을 가지고 거짓 정보를 넘겨줬을 수도 있으니까.
덕분에 작전은 단순했다.
두 영감님과 원정대원들이 반신들 몇을 상대로 버티는 동안 나와 연우 형이 최대한 빠르게 남은 반신들을 정리한다.
그 말을 들은 원정대의 시선이 이번엔 내게 쏠렸다.
그리고 그 눈빛엔.
‘네가? 어떻게? 설마 네가 저 괴물과 같은 급이라고?’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하긴, 각성한 지 고작 1년 3개월 지난 놈이 지구 최강자일지도 모르는 이와 동급이란 소리니 믿기지 않을 수밖에.
공식적인 내 등급은 SS급이기도 했고.
‘그래서 뭐? 드잡이질 한 번 더 하자고?’
나야 오케이다. 힘 빡 주고 뇌기 한번 풀어제끼면 여기 있는 인원 중 절반은 한 방에 기절시킬 수 있다.
거기에 권능까지 더하면 다이렉트로 황천길 편도 티켓도 끊어줄 수 있고.
‘나랑은 서열정리가 안 끝났다는 거지?’
이쯤 해서 힘을 한번 내보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뇌기를 일으켰다.
나도 이들에게 얕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빠지지직.
불길함이 느껴지는 검은 뇌전이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가 순식간에 내 몸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헐.”
“왓더….”
여기저기서 경악이 섞인 외침이 터져 나온 뒤, 의문 석인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이들이 슬쩍 시선을 돌렸고.
“어…. 방금 보셔서 알겠지만, 강현 씨의 능력은 결코 도연우 씨보다 아래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 계획을 믿고 따라주셨으면 좋겠군요.”
이어진 구 영감님의 말에 반론을 꺼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서 게일도 저스티나 로셀도, 심지어 가장 반골 기질이 엿보이던 호세 카를로스조차도.
모두가 경악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 씨…. 이러다가 신들과 싸우기 전에 얼굴에 구멍 뚫려 죽겠네.’
그리고 나를 향한 그 불편한 시선은 출정식을 마친 함대가 호주 대륙을 눈앞에 두었을 때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