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아낌없이 주는 나무 (3).
“이게…뭐야.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미루.”
강현을 꼬리에 달고 미루가 있는 곳에 도착한 리퍼는 처참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미루의 상태에 할 말을 잃었다.
팔다리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고, 투명하고 영롱한 빛을 내뿜던 미루의 피부는 금이 가 곧 깨질 것 같은 유리잔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어. 새로운 손님인가? 어서 와. 어째 낯이 익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미루보다 먼저 그를 반긴 건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는 도연우였다.
“넌….”
“오랜만이지? 저번엔 신세 많이 졌다.”
도연우가 말한 저번이란 각성자 센터 테러 당시 리퍼와 마주쳤던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리퍼는 도연우를 기억하지 못했다.
“…누구지?”
리퍼가 기억하는 그날의 기억 중 지분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강현뿐이었으니까.
필멸자에 불과한 강현에게 권능과 신성을 빼앗긴 기억이 워낙 임팩트가 있었기에 그저 수많은 필멸자 중 하나였을 뿐인 도연우를 기억하는 것은 무리였다.
“허…. 이래서 때린 놈은 발 뻗고 자고 맞은 놈은 웅크리고 잔다는 말이 생긴 거지?”
리퍼가 뿜어낸 죽음의 기운 하나 감당하지 못해 허둥거렸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도연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어쩔 수 없네…. 다시는 날 잊지 못하게 만들어 주는 수밖에.”
그 말과 함께 도연우의 몸에선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 너. 그때 그 버러지 중 하나였던가? 이름이…. 도연우?”
리퍼는 그제야 미루가 왜 이런 꼴로 널브러져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신성이 깃든 손을 휘둘러 도연우가 뿜어내는 빛을 지워버린 리퍼의 시선이 미루를 향했다.
“고작 이딴 놈에게 그 꼴이 된 거냐 미루? 신의 권위가 바닥에 나뒹구는군.”
리퍼의 힐난에 미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네가. 에리아 그년과. 벌인. 협잡질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 꼴이 되었을까?”
“협잡질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몰라서 묻는 건가?”
“비꼬지 말고 제대로 말해 미루. 내가 에리아와 무슨 협잡을 했다는 거지?”
“왜 공간을 차단했지?”
미루의 물음에 리퍼는 그녀의 오해를 풀어주고자 입을 열었다.
“그건 시스템의 개입을 막고자 한 일이야. 결코, 널 어떻게 해보려는 속셈 같은 건 없었다고.”
그 말에 미루는 코웃음을 쳤다.
“방금 그 말. 신언(神言)으로. 맹세할 수. 있나?”
“뭐?”
“침략이 끝난 후. 영토를 놓고. 경쟁하게 될. 경쟁자 하나를. 미리 제거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었다고. 신언으로. 맹세할 수 있냐고. 물었다.”
“그건….”
“강현과 도연우. 저 둘을. 제거하고 나면. 그다음은 나였을 테지. 아닌가? 아니라면. 신언으로. 맹세해라. 리퍼. 그럼. 내가 너에게. 사과하지.”
미루의 물음에 리퍼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신언으로 맹세를 한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신언을 어긴 신은 우주의 법칙에 따라 소멸을 맞이하게 되니까.
신격을 잃고 영락해 반신이 되어버린 리퍼는 그런 제약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수천만 년을 신으로 살아온 습관이 그를 머뭇거리게 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리퍼를 바라보던 미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와-. 너 정말 나쁜 새끼구나? 어떻게 신이라는 게 동료의 뒤통수를 칠 생각을 하지?”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도연우가 둘 사이를 가로막으며 끼어들었다.
“비루한 것이, 상성 덕에 미루에게 약간 우위를 점한 것 가지고 너무 기고만장하네? 버러지 주제에.”
저 빛이 ‘침묵하는 겨울의 신’ 미루에겐 상극일지 모르나 죽음의 신인 자신에겐 그저 조금 뜨겁고 강렬한 빛일 뿐이었다.
고작 그딴 힘을 믿고 신의 대화에 끼어드는 도연우의 행태에 리퍼는 기분이 나빴다.
자신은 미루와 다르다는 듯이 말하는 리퍼를 보며 도연우는 헛웃음을 토해냈다.
“풋. 기고만장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곤 네 꼴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데? 너도 현이와 상성이 안 좋았나 봐?”
“…….”
리퍼의 꼴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걸까?
쿠르르릉.
저 멀리서 울리던 천둥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한 줄기 뇌전이 도연우의 옆에 내리쳤다.
몬스터들에게 사망 선고 권능을 뿌리며 오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된 강현이었다.
***
“오오-! 대박! 그게 디뷰에이프야? 그냥 세워놓고 봤을 때랑은 또 느낌이 다르네?”
이 양반 왜 이렇게 하이텐션이야?
혹시나 미루에게 험한 꼴 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했는데 상황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대박은 형이 더 대박 같은데요?”
뭐가 이리 번쩍번쩍하는지, 온몸에서 빛이 나서 똑바로 바라보기도 힘들었다.
던전에 들어온 지 얼마나 지났을까?
길게 잡아도 한 시간은 넘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 양반은 그 짧은 시간에 또 강해졌다.
‘이 정도면 아예 종 자체 달라진 것 아닌가?’
나야 시스템 빨 플러스 아이템 빨로 온갖 버프를 받아서 그렇다지만 연우 형은 인간 자체가 치트인 것 같았다.
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성장하는 소년만화의 주인공도 아니고….
어떻게 강적만 만나고 나면 이렇게 급격한 성장을 하는 건지, 도통 알다가도 모르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연우 형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현아. 나 부탁 하나만 들어주라.”
“부탁이요?”
눈앞에 반신이 둘이나 있는데 갑자기 부탁이라니, 이 상황에서 갑자기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연우 형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만났는데, 이 새끼가 나를 기억 못 하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아, 이 양반 텐션이 높은 게 아니라 화가 난 거였구나.’
그제야 저 얼굴에 번져있는 미소가 단순한 웃음이 아닌 살소(殺笑)라는 걸 깨달았다.
난 그 살소의 대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은색 머리에 보라색 눈동자의 미소년이 살기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긴, 저 면상을 보고 화를 참는 건 무리지 싶었다.
‘그때 연우 형이 좀 무력하게 당하기도 했고….’
연우 형의 마음은 이해가 됐지만, 상황이 썩 좋지 못했다.
상성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제외하더라도 문제는 과연 우리에게 그만한 시간이 남아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차단이 풀리면 다른 신이 난입할 수도 있고, 디뷰에이프의 가동시간도 문제가 될 거야.’
여전히 내겐 614의 신성 스탯이 남아 있었지만, 차단이 풀리고 나면 그 스탯은 그다지 많다고 볼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며 머뭇거리는 내 귓가로 연우 형의 나직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후…. 미안하다. 형이 기분이 좀 별로라서 무리한 부탁을 했네. 그냥 빨리 마무리하고 나가자.”
“형….”
“괜찮아. 우리가 놀러 온 것도 아니고 지금 상황에 어린애같이 응석 부릴 생각은 없어.”
그렇게 말한 연우 형은 싱긋 웃어 보이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얼음 조각을 향해 걸어갔다.
“들었지? 이젠 정말 끝내야 할 시간이야. 걱정하지마. 네가 알려준 정보는 아주 요긴하게 써먹을 테니까.”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니 저 얼음덩어리가 연우 형이 상대하던 ‘침묵하는 겨울의 신’ 미루인 모양이었다.
“다행히. 가는 길이. 쓸쓸하지는. 않겠어.”
한 음절마다 뚝뚝 끊어지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한 미루가 눈동자를 굴려 리퍼를 바라봤다.
“너…. 설마 우릴 배신한 거냐? 신이 인간 따위에게 패배했다는 것도 기가 막히는데 그 목숨을 부지하겠다고 동료의 정보를 넘겨?”
저 새끼도 웃긴 새끼다. 지는 나한테서 살아보겠다고 도망친 주제에 뭐 저렇게 당당하지?
분노가 가득한 리퍼의 물음에 미루는 뭔가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신이라…. 리퍼. 우리는. 이제 신이. 아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우리가 신이 아니라면 누가 신이란 거지?! 저 빌어먹을 관리자 놈들이 신이라는 거냐? 신의 권위는 내팽개치고 인간들을 보육이나 하는 저것들이?!”
리퍼는 새하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선 근원을 부정당한 이의 분노 같은 것이 느껴 졌다.
“우리가 진정한 신이다! 우린 저, 하찮은 것들을 보육하기 위한 보모가 아니라 군림하고 지배하기 위한 존재란 말이다! 그것이 수십억 년 신들의 역사 속에 기록된 우리의 권리야!!”
“틀려.”
“뭐가 틀렸다는 거냐? 말해라 미루. 나를 이해시키지 못한다면 너는 하찮은 저것이 아닌 나의 손에 소멸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미루는 한껏 붉어진 얼굴로 콧김을 씩씩 뿜어내는 리퍼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철없는 남동생을 바라보는 누나처럼.
“우린 신이 아니다. 리퍼. 우리가 신격을 잃고 영락한 그 순간부터 우린 신이 아니었어. 이 우주 어디에도 너와 나의 신화(神話)는 없어. 단지 우리가 그것을 부정하고 있었을 뿐.”
죽을 때가 돼서 그런가?
미루의 말은 더는 한 음절씩 끊어지지 않고 매끄럽게 이어졌다.
“…말 같지도 않은 궤변이군. 우리의 신화가 없다고? 세계수에 기록되어 있다. 나의 신화가 버젓이 세계수에 기록되어 전승되고 있고 내가 살아 있어. 그런 내가 신이 아니라고? 웃기는 소리. 나는 다시 신격을 얻을 것이고 저 빌어먹을 관리자 놈들을 나의 우주에서 몰아낼 거다.”
잔뜩 흥분해 있던 리퍼의 목소리는 대화가 계속되자 조금씩 차분해졌다.
“꼴을 보니 넌 그 광경을 보지 못하겠군.”
그렇게 말을 마친 리퍼의 몸에서 죽음의 기운이 뭉클 뿜어져 나왔다.
“저런 하찮은 것의 손에 소멸을 맞이하느니 차라리내 손에 죽어라. 미루. 그렇게 내 일부가 되어 다시금 영광된 신화의 시대가 도래하는 데 일조하는 것이 네가 신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소명인 듯싶으니.”
그렇게 뿜어진 죽음의 기운이 미루를 뒤덮으려 했다.
혹여나 신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이젠 나서야 할 때였다.
죽 쒀서 개 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깔깔깔!”
갑작스럽게 미루의 입에서 터져 나온 커다란 웃음에 나는 움직임을 멈춰야만 했다.
저 얼음덩어리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박력 터지는 얼음덩어리였다.
웃음소리만으로 죽음의 기운을 밀어내다니….
확실히 연우 형이 상성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면 이기기 힘들었을 상대였다.
“네 꼴을 봐라. 리퍼. 네가 흘린 피를 봐! 우리가 흘린 피는 신혈이 아니야.”
미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리퍼의 외견을 훑었다.
상처는 없지만, 검은색에 가까운 피에 얼룩진 모습.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신혈이야 말로 신의 상징. 우린. 신격을 잃은 순간 신혈을 잃었어. 네 몸에 흐르는 피 어디에도 신성은 없어. 리퍼.”
미루는 다시 눈을 감았다.
“너와 에리아는 그 더러운 협잡질의 대가를 치를 거야. 내가 아닌 저들에 의해서.”
그리고 미루가 그렇게 마지막 말을 마치는 순간.
사라라락.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미루의 몸뚱이가 조금씩 바스러져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라?”
“저건 또 뭔…….”
바람 한 점 없음에도 나풀거리며 허공을 부유하다 사라져버리는 빛의 먼지들.
그 빛 속에서 불쑥 푸른색 구체 하나가 떠올랐다.
“어? 어어?”
시리도록 차가운 한기가 느껴지는 푸른 구체는 잠시 허공을 부유하는가 싶더니 곧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 연우 형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현아?”
어…. 무슨 일인지 저한테 물어보셔도 저도 처음 보는 거라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였다.
화아악--.
푸른 구체를 흡수한 연우 형의 몸에서 찬란한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시리도록 차가운 한기와 뜨거운 열기를 동시에 품은 빛무리는 순식간에 눈에 보이는 모든 공간에 퍼져나가는가 싶더니 곧 연우 형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나는 그 푸른색 구체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신성.
내 몸속에 자리한 신성 스탯과 비슷한 기운이 연우 형의 몸속에서 느껴지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