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아낌없이 주는 나무 (2).
‘꿈인가…?’
리퍼는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이게 꿈일 수 없다는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신은 꿈을 꾸지 않으니까.
수천만 년을 신으로 살아온 리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긴 시간을 신으로 살아온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쾅!
퍼걱!
찌직-! 촤아아악-!!
날카로운 손톱이 쉼 없이 그의 몸을 헤집으며 찢어발겼다.
리퍼가 기괴한 갑옷 정도로 생각했던 디뷰에이프는 그저 그런 갑옷이 아니었다.
공방 일체의 전투 병기.
신의 권능을 무효화하며 신의 육신과 영혼을 분쇄하는 신살 병기.
디뷰에이프의 위용은 몬스터가 아닌 신을 상대할 때 더욱 빛을 발했다.
그야말로 신살 병기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위력.
디뷰에이프의 무자비한 폭력 아래에서 리퍼의 몸뚱이는 잘게 찢겨 나가고 복원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런 게 존재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어….’
저런 괴물은 신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무구다.
하지만 그 무구가 자신을 향해 사용될지도 모르는데 어떤 미친 신이 신을 죽이기 위한 무구를 만든단 말인가.
‘놈은 대체 어디서 이런 걸 얻은 거지?’
더욱 이해되지 않는 것은 강현이 디뷰에이프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디뷰에이프는 필멸자가 가지고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리퍼는 권능을 펼쳐 죽음의 칼날을 만들어냈다.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거무튀튀한 칼날이 리퍼의 손짓에 따라 강현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스륵.
하지만 죽음의 칼날은 디뷰에이프를 뚫지 못하고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이게 전부라면 실망인데?”
강현의 이죽거림에 리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리퍼는 권능이 통하지 않는 전투를 벌여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신이 된 이후 그의 전투는 오직 죽음의 권능을 기반으로 펼쳐졌고 그것이 신에겐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아까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해주겠다고 말했던 신은 어디 갔어?”
리퍼의 권능이 디뷰에이프를 뚫지 못한다는 걸 확인한 강현은 신이 난 상태였다.
“…….”
수천만 년의 생을 살아온 리퍼였지만 단언컨대 이런 무력한 기분을 느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록 패하긴 했지만, 저 관리자들과의 전쟁도 이렇게 일방적이지는 않았으니까.
콰가가각!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몸을 분쇄하려는 듯 해체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몸을 수복했다.
죽음의 신인 리퍼의 신성은 ‘죽음’에서 기인하고 이 공간에 죽음이 존재하는 한 소멸하지 않으니까.
“신이라며? 고귀하고 위대한 신!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면서 그렇게 어깨에 힘을 줬던 거야? 리퍼?!”
“닥쳐!”
물론, 그것이 다행이라곤 말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저 빌어먹을 주둥아리가 나불대는 말을 꼼짝없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불운이었으며.
두 번째는 이 던전 안에 모든 생명체가 죽음을 맞이해, 한 생명이 생의 종말을 맞이하는 현상, 즉 죽음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그 순간이 리퍼의 마지막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시스템의 제약을 피하고자 공간을 차단했던 것이 되레 자신에게 화가 되었다는 걸 그는 모르고 있었다.
유일한 희망은 에리아가 차단을 푸는 순간까지 소멸하지 않고 버티는 것뿐.
퍼버버벅!
디뷰에이프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이렇다 할 반항도 하지 못하고 얻어맞고 있는 리퍼를 보며 강현이 이죽거렸다.
“신. 별거 없네?”
그렇게 리퍼는 죽지 않는 샌드백이 되어 강현에게 일방적으로 구타당해야만 했다.
***
죽음의 신 리퍼.
전뢰화 권능이 없었다면 상대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강했던 놈이다.
퍼퍽!
그런 놈의 몸뚱이가 가벼운 손짓한 번에 터져 나갔다.
“신. 별거 없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이것이 온전히 나의 능력이 아닌 디뷰에이프의 권능이며 나는 그저 들러리일 뿐이라는걸.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사태를 냉정하게 봐야 한다는 것도.
스륵.
디뷰에이프의 공격에 터져 나간 리퍼의 몸이 다시 회복됐다.
언뜻 보기엔 불사의 능력을 지닌 듯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눈치챘다.
‘다른 생명체의 죽음으로 자기 죽음을 대체하는 건가?’
놈이 치명적인 상처를 회복할 때마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몬스터 중 일부가 이유도 없이 죽어 자빠지는 것이 확장된 감각 영역으로 느껴졌다.
아폴론은 내 등 뒤에서 방어 모드로 전투를 관전하는 중이니 연우 형과 미루라는 신이 아니라면 저 몬스터들이 죽은 원인은 리퍼일 터.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자기 죽음을 몬스터들에게 전가하고 있었다.
‘그 말은 몬스터들이 사라지면 놈이 상처를 회복할 수단이 사라진다는 건데.’
하지만 그게 당장 되겠냐고….
내 감각 영역에 느껴지는 몬스터 개체 수만 해도 수십만.
이 던전 안에 얼마나 많은 몬스터가 있는지는 추측할 수조차 없었다.
수백만, 어쩌면 수천만일 수도.
그 많은 SSS급 몬스터를 단박에 죽일 수 있는 능력은 내게 없다.
‘이러다 차단이 풀리고 다시 신성 스탯이 소모되기 시작하면 답도 없는데….’
최악의 상황엔 리퍼에게 내가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다 문뜩 내가 놓치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신성 스탯!
‘디뷰에이프를 사용하는데 신성 스탯이 소모되지 않는다면 사망 선고 권능도 스탯 소모 없이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순간 머릿속에서 번개가 내리치는 것 같았다.
“하. 하하하!!!”
싸움을 하다말고 멈춰서 웃음을 터트리자 리퍼가 미친놈을 보는 것처럼 나를 바라봤다.
나도 내가 미친 것 같았다.
이게 가능하다면 미쳤다고 손가락질해도 받아줄 생각이다.
“사망 선고.”
“뭐?”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뜬 리퍼의 얼굴 위로 시스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대상을 지정해 주십시오.
역시 외부와 차단되었지만 내게 적용된 시스템은 그대로다.
내가 가진 신성 스탯은 614 이걸로 반신을 죽일 수 있을까?
저번엔 천마를 죽이기 위해 100의 스탯을 소모해 사망 선고를 사용했지만 죽이지 못했었다.
‘오히려 분노한 놈이 눈에 불을 켜고 내게 달려들었었지.’
그렇다는 건 리퍼가 가진 신성 스탯이 614보다 높다면 죽일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리퍼에게 사망 선고를 사용하지 않았던 거다.
명색이 반신인 녀석이니 내가 3개월간 아득바득 모은 신성 스탯보다 녀석이 지닌 신성 스탯이 높을 게 불 보듯 뻔했으니까.
‘하지만 저 몬스터들이 대상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생각대로만 된다면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학살할 수 있게 되는 거다.
-대상에게 절대적인 죽음이 선고됩니다.
“케엑-!!”
메시지와 함께 내 감각 영역 안에 있던 설인 하나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너…. 감히 내 권능을 잘도…….”
분노한 리퍼가 뭐라 뭐라 조잘거렸으나 흘려넘겼다
지금 중요한 건 리퍼가 아니었으니까.
614.
신성 스탯의 소모는 없었다.
상태창을 확인한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 감각 영역 안에 있는 수십만 마리의 SSS급 몬스터.
녀석들이 내 일용할 경험치가 되는 순간이었다.
***
미루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리퍼…. 이 빌어먹을 신 놈이 잘도 내 권속들을….’
폭풍처럼 몰아치는 도연우의 공격과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한 권속들의 죽음.
불과 몇 초 사이에 신지 안에 존재하던 권속 중 절반이 죽었다.
리퍼의 권능을 빼앗아 갔다는 강현이 권능을 사용했을 거란 가정은 그녀의 머릿속에 없었다.
‘리퍼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지만 필멸자에 불과한 강현이 수백만이 넘는 권속을 죽일 수 있을 턱이 없어.’
이건 죽음의 신인 리퍼의 짓이라야 말이 된다.
죽음으로부터 신성을 얻는 리퍼의 특성상.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죽음은 리퍼의 신성이 되어줄 테니까.
‘찢어 죽일 에리아! 빌어먹을 리퍼! 내 이 위기만 넘기면 너희 두 연놈을!!’
“역시 신이라 레벨이 다른 건가? 이 상황에서 한눈을 파네?”
‘이 위기만…. 벗어나면.’
“본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거라면 나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겠는데?”
‘이 위기만….’
“그러니까 지금부턴 진심으로 싸워줘. 신답게.”
미루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에 생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저놈은 왜 날 죽이지 않는가?’
팔다리를 유리장처럼 녹여 없애고 몸뚱이의 절반을 박살 내놓고도 무엇을 바라고 자신의 죽음을 유예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루와 도연우의 상성은 너무 상극이었다.
얼음이 빛을 이길 수는 없다.
만고불변의 진리.
그나마 초반엔 격의 차이와 지닌 권능의 힘으로 우세를 점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역전되어 버렸다.
원인은 도연우의 괴물 같은 성장.
잠재력을 깨운 천재는 전투를 치르며 한계 따윈 모른다는 듯이 성장했고, 천적에 가까운 상성 덕이지만 이젠 반신급 존재마저 제압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미루는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자신을 농락하는 도연우를 보며 말했다.
“더는 나를. 능욕하지 말고. 죽여라. 필멸자여.”
신으로서 권위를 내려 놓지는 못 했지만, 그녀의 말은 부탁과 다름없었다.
자신에게 더는 모욕을 주지 말아 달라는, 신으로서 명예롭게 소멸을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
하지만 도연우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매몰찼다.
“그럴 순 없지. 이제껏 너희들이 저지른 일들이 있는데…. 편안하게 죽겠다고? 꿈 깨.”
도연우의 대답에 미루는 놀란 눈으로 도연우를 바라봤다.
“너…. 어떻게. 신어를…?”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대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 이거? 인류 문명의 위대함이랄까?”
미루의 반응에 도연우는 자신의 귓불 밑에 붙어있는 스티커를 톡톡 두드렸다.
플리피인들이 설계하고 대현에서 제조한 일회용 통역 마법진이었다.
물끄러미 그런 도연우를 바라보던 미루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뭘. 원하느냐. 필멸자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뭐?”
“내가 만족할 만한 정보를 꺼내 봐. 그럼 네가 원하는 그 죽음을 기꺼이 선물해 줄 테니까.”
찬란한 빛을 발하며 악동처럼 미소를 짓는 도연우.
미루는 도연우의 그 미소가 과거 그녀가 신이었던 시절 싸웠던 마왕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
그 시각.
리퍼는 혼신의 힘을 다 해 도주하고 있었다.
‘이건…. 관리자 놈들의 농간이 분명해. 저런 게 고작 필멸자의 힘으로 가능할 리 없잖아.’
리퍼는 강현과 관리자 사이에 뭔가 거래가 있었다고 확신했다.
꽈르르릉.
빛과 같은 속도로 도주를 하고 있는 그의 등 뒤로 천둥소리가 울리며 한 줄기 뇌전이 그를 쫓아왔다.
‘미루…. 미루를 만나서 놈을 합공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 돌아갈 수 없다.’
수십만에 달하던 몬스터들이 한순간에 썩은 짚단처럼 스러지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 리퍼의 머릿속에선 홀로 강현과 싸우겠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그런 권능의 사용은 과거 그가 신이었던 시절, 넘치는 신성을 지니고 있던 시절에나 가능했었다.
즉, 반신으로 영락한 지금, 사망 선고를 그런 방식으로 사용하는 건 권능의 주인인 리퍼에게도 무리였다.
‘이건 하찮은 필멸자가 가진 능력으론 불가능한 권능의 사용이야. 분명 인간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던 그 관리자 놈들이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해.’
과거 12신이 속했던 진영이 관리자들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관리자들은 12신이 속했던 진영의 신들에게 하나의 선택지를 줬다.
하나는 그들처럼 관리자가 되어 필멸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신 같지 않은 생을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격을 잃고 영락한 채 필멸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일반적인 필멸자보다 기나긴 삶을 살아갈 것이었다.
반쪽이지만 신은 신이었으니까.
리퍼를 비롯한 12신들은 그중 후자를 택한 신들이었다.
필멸자를 위한 부속품으로 살아가느니 반쪽짜리 신에 불과하지만 필멸자들 위에 군림하기를 택한 것이었다.
그렇게 전쟁에 패해 우주의 중심에서 쫓겨 난 그들이 정착을 위해 선택한 행성은 지구.
우주 외곽 변두리, 이름 없는 은하계에서도 가장 오지에 있는 항성계였다.
물론 그 선택마저도 해피니스 시스템 사용자인 강현의 등장으로 잘못된 선택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콰르르릉!!
그리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할 시간이 천둥소리와 함께 리퍼의 등 뒤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