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아낌없이 주는 나무 (1).
신과의 싸움.
연우 형에게 간 ‘미루’라는 신만 강림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은색 머리칼과 짙은 보라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소년.
“저 빌어먹을 면상을 마주하는 건 오늘 계획에 없었는데….”
죽음을 형상화한 것 같은 어둠을 아지랑이처럼 흩날리는 녀석, 리퍼는 불길한 죽음을 흩뿌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치-이익….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죽음.
빛.
공기.
대지와 그 위를 덮고 있던 눈.
그 기운에 노출된 모든 것이 생기를 잃었다.
녀석이 딛고 있던 대지는 먼지로 화해 허공으로 흩어졌고 녀석은 마치 ‘신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어필하려는 것처럼 허공에 몸을 띄운 채 나를 내려다봤다.
오만한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오랜만이네….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아?”
놈은 마치 오래전에 헤어진 첫사랑이라도 만난 것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살기를 줄줄 흘리면서 그딴 말 하지 말라고 이 새끼야.’
아직은 신과 직접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강림엔 재물이 필요한 거 아니었어? 아무런 재물 없이 던전에 강림하는 게 가능한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조심했을 텐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저런 대적(大敵)을 눈앞에 두고 딴생각을 하는 것도 위험하기 그지없는 짓이기도 하고.
계획에 없던 만남에 흔들리는 멘탈을 붙잡으려 하는 내게 녀석이 질문을 던졌다.
“기억하나?”
“…뭘?”
“영원히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해주겠다는 말.”
그제야 사망 선고 권능을 얻을 때 놈이 외쳤던 말이 떠올랐다.
“좀생이 새끼. 여태껏 그날 일을 곱씹고 있었어? 네 권능 쩔더라. 잘 써먹었어.”
“하찮은 것…. 넌 여전히 천박하고 무례하구나.”
칭찬을 해줬는데도 돌아온 말엔 가시가 촘촘하다.
여린 가슴에 스크래치 나게시리.
“우리 고귀한 죽음의 신께서는 그 하찮은 것에게 패해서 권능과 신성을 털리셨지 아마? 나 같으면 혀 깨물고 죽었을 텐데. 아-, 죽음의 신이라서 자살 같은 건 못하시나?”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고운 법.
나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리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게 그 사실적시 명예훼손 뭐 그런 건가?
신에게도 그 법이 적용되는지는 모르겠다만 꼬우면 고소하던가.
“그 혓바닥의 날카로움은 신검(神劍) 못지않구나. 시스템의 비호 덕에 비루한 목숨을 겨우 부지한 주제에….”
“에베벱. 패배자 새끼가 지껄이는 말이라 잘 안 들리네? 방금 뭐라고 했어?”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린 리퍼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일단 네놈의 혀부터 잡아 뽑고 나서 대화를 이어가자꾸나. 비루한 것아.”
“하-. 그 새끼 대사 참 진부하네. 좀 창의적인 대사 없냐?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다가 얻어터진 건 머릿속을 리셋해서 지웠니?”
“…….”
애초에 혀를 잡아 뽑는데 어떻게 대화를 하니. 미친놈아.
당장이라도 혀를 잡아뽑으려 달려들 것 같던 녀석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지그시 노려보기만 했다.
이 정도 도발했으면 발끈해 공격해 올 법도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 사이 철이 든 건 아닐 테고….’
녀석이 유형화된 죽음의 기운을 줄기줄기 흩뿌린 덕에 파도처럼 몰아치던 몬스터들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상태.
덕분에 숨돌릴 시간이 조금 생겼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꼴에 신이라고 빈틈이 없네, 빌어먹을 새끼.’
신급 아이템 디뷰에이프가 제공하는 전투보조 시스템으로도 놈의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녀석이 빈틈을 조금이라도 내보였다면 디뷰에이프가 먼저 공격을 했을 거다.
디뷰에이프에 달린 네 개의 팔 중 두 개는 전투보조 시스템이 제어하니까.
‘도발도 안 먹히고…. 어떻게 해야 하지?’
안타깝지만 시간은 내 편이 아니다.
지금도 디뷰에이프의 착용 가능 시간은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남은 가동시간은 박박 긁어모아 봐야 1시간 남짓인데.’
나는 그 안에 리퍼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 시간이 지나면 리퍼에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 박제될 가능성이 농후하니까.
그래서 가열하게 혓바닥을 놀려 도발을 날렸는데 반응이 영 미적지근하다. 젠장.
일 초 일 초가 천년같이 지나가며 입안이 바싹 말라 갔다.
실시간으로 생명력이 줄어드는 느낌이랄까?
슬슬 초조함과 조바심이 가슴 한구석을 간질거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쿠웅-!
“??”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커다란 울림이 던전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굼뜨긴, 쯧. 이제야 끝난 모양이군.”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두 눈을 둥그렇게 뜬 나와는 다르게 리퍼는 입꼬리를 더욱 길게 찢으며 미소지었다.
신이라기보단 악마와 같은 형상.
“이제 그 잘난 주둥이를 찢어놓을 수 있겠구나.”
어…. 아까의 도발이 좀 과하게 먹힌 것 같았다.
흉흉한 살기를 흩뿌리며 다가오는 리퍼를 보자 온몸에 소름이 일어났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내 물음에 녀석은 더욱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공간을 분리해 네게 향해 있던 시스템의 가호를 차단했지.”
“…뭐?”
아니, 전 우주를 관장하는 시스템이라며 고작 반신 나부랭이가 그걸 차단할 수 있다고? 그게 말이 돼?
믿기지 않는 말에 혹시나 해서 시스템창을 열어 확인을 해봤다.
“…….”
순간적으로 멘탈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스템은 내게 적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리퍼의 말처럼 연결이 차단된 상태였다.
상점창은 열리지만, 검색과 구매는 불가능했고 원래라면 이런저런 메시지로 정신없어야 할 메시지창은 멈춰 있었다.
‘시스템 없이 저놈을 상대할 수 있나?’
흔들리는 멘탈을 간신히 부여잡은 나는 나의 현 상태를 파악하려 노력했다.
‘뇌신일체는 사용되고 있고, 디뷰에이프도 착용 중이야. 다른 스킬과 특성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고…. 시스템이 차단되긴 했지만 사라진 건 아니야.’
그렇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리퍼를 상대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아마도 놈은 저번처럼 시스템에 의해 제약당할 것을 염려해 뭔가 조치를 한 모양이다.
그렇게 상태창을 확인하던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거 왜 안 줄어?’
…….
[특수 스탯]
뇌기:29647
신성:614
…….
디뷰에이프를 착용하고 있기에 실시간으로 줄어들어야 할 신성 스탯이 614에 고정되어 있었다.
뇌신일체를 사용하고 있어 느려진 시간 속에 있다지만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저…. 병신.’
고개를 들어 리퍼를 바라봤다.
싸움에서 이길 것을 확신하는 듯 짙은 미소를 베어 물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뭐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아니고….’
녀석 덕분에 난 디뷰에이프를 신성 스탯 소모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젠 고맙다는 말도 못 하겠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지 못한 채 득의양양해 있는 녀석을 보자니 괜스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애가 좀 모자란 것 같지만 그래도 살신성인을 몸소 실천하려는 녀석을 놀리는 건 못 할 짓이지 않은가.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당황했다고 생각한 걸까?
사박. 사박.
이 친절한 죽음은 방긋 쪼개며 날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
그 시각.
도연우와 미루는 한참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절대영도의 공간.
한 줄기 빛이 구원의 등불처럼 솟아오르며 얼어붙은 세상을 녹이기 시작했다.
이미 주변의 몬스터들은 찬란한 빗줄기 아래 녹아 사라진 지 오래.
‘상성이 좋지 않아.’
미루는 얼굴을 찌푸린 채 자신의 권능을 부수고 탈출한 도연우를 노려봤다.
자신의 권능인 혹한으로 만들어낸 감옥을 부수고 탈출한 빛 덩어리.
도연우는 마치 작은 태양처럼 자신의 몸을 불태우고 있었다.
혹한을 뚫고 주변의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도연우.
‘이건…. 할 만한 정도가 아니네. 아주, 재미있어.’
그는 지금 한껏 흥이 오른 상태였다.
도연우는 처음 미루와 마주했을 때만 해도 그녀가 내뿜는 위압감과 권능에 수도 없이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하지만 극한의 상황이 그를 각성이라도 시킨 걸까?
싸움이 진행될수록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폭발시키기 시작했다.
인형사와 대적하기 위해 만들어냈던 SSS급 스킬 일섬(一閃).
그 빛에 대한 깨달음은 목숨을 건 전투를 치르며 성장했고 어느 순간부턴가 그의 주 무기였던 창을 놓게 했다.
그렇게 수라장을 거쳐 미루와 마주한 지금, 그는 스스로를 불태울 수 있게 되었다.
마치 태양처럼.
꺼지지 않는 빛과 열기를 뿜어내며 그는 얼어붙은 세상을 녹이고 있었다.
치이이-익.
얼어붙었던 공기가 녹아 흐르기 시작하자 하얗게 죽어가던 세상이 생을 머금었다.
‘토플란 시스템보다 실전이 성장엔 더 효과적이란 소린가…?’
도연우는 미루와의 일전을 벌이며 실시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성장 폭은 토플란 시스템 안에서 상대했던 드래곤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마치 미루라는 신이 성장을 위한 자양분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보다 높은 격을 지닌 상극에 가까운 적과의 싸움으로 인해 극한으로 몰린 상황.
그는 자신 안에 잠들어 있던 잠재력을 격발시켜 진정한 초월을 향해 한걸음 발을 내디뎠다.
“으음….”
도연우와 싸우며 그의 성장을 실시간으로 체감하고 있는 미루는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 초월에 이르긴 했지만 단지 그뿐. 미루는 전투 초반까지만 해도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믿음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위험할지도….”
상식의 한계를 부숴버리는 급속한 성장.
수천만 년의 세월을 살아오며 꽤 많은 초월자를 만나본 그녀였지만 단언컨대 저런 괴물은 본 적이 없었다.
“점점. 내 권능이 파괴되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어.”
위험하다.
그녀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저 괴물을 더 성장하게 내버려 두는 건 위험하다고.
에리아는 지구 침략의 가장 큰 걸림돌로 강현을 꼽았고 그 의견엔 미루도 동의했었다.
그래서 도연우를 먼저 제거하고 강현과 싸우려 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도연우가 강현보다 더 큰 위험이라고 판단했다.
“에리아. 지원이. 필요해.”
해서, 민망함을 무릅쓰고 에리아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그제야 미루는 자신의 신지가 다른 공간과 차단된 상태라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그제야 아까 공간이 울렸던 것이 떠올랐다.
저 멀리 느껴지는 리퍼의 기운.
그리고 차단된 공간.
미루의 머릿속에 움트기 시작했던 불신의 싹이 자라 꽃을 피웠다.
“에리아. 배신한 건가?”
강경파인 리퍼를 자신의 신지에 밀어 넣고 공간을 차단했다.
공간 차단은 공간의 신인 에리아만이 가능한 권능.
에리아가 배신한 게 아니라면 지금 상황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강현을 상대하는 동안 시스템의 개입을 방지하기 위한 리퍼의 의견을 에리아가 받아들이면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미루로서는 당연한 의심이었다.
“빌어먹을 년. 감히. 나를?”
그리고 그 의심은 그녀 안에서 확신으로 변화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교단, 12신이라는 것은 지구 침략을 위한 한시적인 동맹에 불과했다.
지구 침략이 완료된 후, 각자의 신지가 지구와 융합되면 행성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전쟁이 일어날 것은 자명한 사실.
그 때문에 미루는 이것이 에리아의 배신이라 확신했다.
강경파와 손잡은 에리아가 리퍼를 이용해 자신을 소멸시키려는 수작이라고.
빠드득.
분노한 미루가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내가 우스웠나 봐? 싸움에 집중 못 하는 걸 보면.”
미루의 눈앞에 빛으로 일렁이는 머리 하나가 불쑥 솟아났다.
어느새 자신이 각성한 빛의 능력을 능숙하게 펼치기 시작한 도연우였다.
흠칫 놀란 미루가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렸지만 늦었다.
“도망가려고?”
그녀가 물러난 것보다 더 빠르게 그녀를 따라잡는 도연우.
그는 이미 빛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그러면 쓰나. 이제 좀 재미있어지려는데.”
미루는 자신이 도연우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에 빛보다 빠른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녀가 온전한 신이었을 때라면 모르지만 신격을 잃고 반신이 되어버린 지금.
그녀는 빛보다 빠른 신속(神速)을 펼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오롯이 혼자 힘으로 상극인 도연우와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