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190화 (189/202)

190. 던전을 먹는 각성자 (3).

빙호가 나온 던전이라서 그런지 나오는 몬스터들이 전부 빙계열 몬스터들이었다.

연우 형이 향한 방향과 정 반대쪽으로 왔지만, 이곳에도 설인이 수만 마리가 존재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놈들이 나나 아폴론에게 위협이 되는 건 아니었다.

“이거 뭐 저글링도 아니고, 어디 해처리라도 펼쳐놨나…. 끝이 없네. 젠장.”

죽이고 또 죽이고.

아무리 칼춤을 춰도 줄어들지 않는 놈들의 머릿수에 나는 조금씩 지쳐갔지만.

서걱.

콰지지지-직!

퍼퍼펑!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는 아폴론은 좀체 지칠 기미가 안 보였다.

아폴론의 에너지원은 플리피 시티 위에서 타오르던 엄지손톱 크기의 태양.

태양이 꺼지지 않는 한 아폴론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저러니까 디뷰에이프에 의태한 ‘검은 어둠’의 공격에서도 도시를 지켜낼 수 있었던 거겠지.

“저건 좀 부럽네.”

아폴론의 칼춤을 지켜보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나는 씨드에게 말을 걸었다.

“촬영 잘 되고 있어?”

“네 사령관님. 외부 송출도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그럼 지금쯤이면 전부 알았겠네.”

지금 시드가 맡은 임무는 던전의 맵핑과 정찰, 그리고 즈믄나래 채널을 통한 라이브 방송 송출이었다.

이 계획은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 세운 계획이었다.

만일 우리가 이곳에서 죽는 일이 생기더라도 누군가는 이 던전을 클리어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이 던전을 클리어한다면 이 영상은 다른 용도로 사용될 거다.

세계최초로 SSS급 던전을 클리어한 증거로 말이다.

세계최초. 세계최강.

이 단어들엔 역시 남자의 심장을 울리는 마력이 깃들어 있는 게 틀림없다.

내 심장이 이토록 두근거리는 걸 보면.

***

공간의 신 에리아의 신전.

“흐응-. 드디어 물고기가 그물 안으로 들어왔네?”

허공에 떠 있는 화면을 응시하던 에리아는 동그란 머리를 불량감자처럼 일그러트리며 중얼거렸다.

지금 지구에 생성돼 있는 던전은 그녀의 권능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

처음 강현이 F급 던전 코어를 포식하는 순간부터 그녀는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강현의 던전 포식 활동이 단지 F급 던전에서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예견했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네.”

해서, 강현의 다음 표적으로 가장 유력한 시베리아 SSS급 던전의 주인인 미루를 이 자리에 불러놓은 것이었다.

북풍한설을 흩뿌리는 ‘침묵하는 겨울의 신’ 미루.

차가운 한기를 토해내며 말을 마친 미루는 함께 앉아있던 에리아를 훑어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신지를 침범한 어리석은 필멸자를 멸하기 위해.

미루가 걸음을 옮기려는 찰라, 그녀의 등 뒤에서 에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해. 그 녀석 리퍼의 권능 말고도 공간계열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 같으니까.”

에리아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얼음 조각처럼 투명한 미루의 얼굴엔 싸늘한 조소가 맺혔다.

“지금. 내게. 조심하라고 말. 한 거지? 내가. 나의 신지에서. 고작 필멸자 둘을. 처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그녀의 말과 함께 절대영도에 가까운 한기가 풀려나와 주변을 뒤덮었다.

신지(神地).

신이 전지전능의 권능을 무한히 발현할 수 있는 오롯이 신을 위한 공간.

이제는 신격을 거세당해 영락한 반신이 되었기에 전지전능의 권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지만.

수천만 년을 신으로 살아온 미루에게 에리아의 걱정 어린 조언은 그녀를 향한 모욕과도 같았다.

자신의 신지에서 고작 필멸자 둘을 상대하는데 조심하라니….

미루의 격한 반응에 당황한 에리아가 마름모꼴 팔을 흔들며 자기 뜻은 그런 것이 아님을 피력했다.

“아니 난, 혹여 네가 리퍼처럼 권능이라도 빼앗기면 어쩌나 해서….”

리퍼는 감추려 했지만 이미 강현이 리퍼의 사도가 아니란 소문이 신들 사이에 펴진 상황.

비록 강림체에 불과했다지만 신이 필멸자와의 싸움에 패하고 거기에 권능까지 빼앗겼다니.

모든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강현이 신들의 예상보다 강하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기에 일견 에리아의 걱정은 당연하였다.

물론, 미루의 입장에선 불쾌하기 그지없는 걱정이었지만.

“흥. 그. 걱정 같지도 않은. 걱정은. 거부하도록 하지.”

싸늘한 대답을 남기고 신전의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미루.

그녀가 떠난 자리엔 그녀가 남기고 간 한기가 여전히 주변 온도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슥.

가볍게 팔을 흔들어 공간을 잠식해 들어가던 한기를 치워버린 에리아는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화면을 주시했다.

두 개로 분할된 화면.

한쪽에선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신에 도전할 자격을 갖춘 초월자 도연우가 학살을 벌이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선 신들 사이에서 주의할 인물이 된 강현이 아폴론과 함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저런 광경을 봤으니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테지.”

지금 저들이 학살을 벌이고 있는 몬스터들은 그저 그런 몬스터들이 아니었다.

강현과 도연우가 공략하고 있는 SSS급 던전의 몬스터들은 과거 미루가 온전한 신이었던 시절 그녀를 섬기던 휘하의 천사들과 신도.

신이었던 미루가 창조한 온전한 그녀만의 피조물이었다.

미루가 영락해버림과 동시에 지성을 잃고 몬스터화 되어버렸지만, 지금 미루가 지닌 신성은 그 지성을 잃은 피조물들에게서 나오는 것.

그런 피조물들이 공격을 받고 있으니 미루가 저리 분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뭔가 불안해.”

에리아의 둥근 머리가 다시 한번 불량감자처럼 일그러졌다.

미루가 아무리 반신이 되었다지만 자신의 신지에서 필멸자에 불과한 이들에게 패한다는 건 상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왠지 에리아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그러진 머리를 이리저리 갸우뚱거리던 에리아는 이내 뭔가 결심한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무래도 확실히 하는 게 좋겠어.”

12신 중 지금 강현에게 이를 갈고 있는 것은 권능을 빼앗긴 리퍼.

그가 지구의 생명체들을 모조리 멸절시키자고 주장하는 강경파인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지금 가장 이용하기 좋은 패는 리퍼였다.

***

“뭐지?”

아폴론과 함께 몬스터를 사냥하던 나는 갑작스러운 이질감에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령관님?”

곁에 있던 씨드가 말을 건네왔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몸이 떨리고 호흡이 가빠졌다.

순간, 주변의 기온이 급속도로 내려가며 밖으로 노출되어 있던 피부가 갈라졌다.

“컥! 커억!”

억지로 쥐어 짜낸 날숨이 밖으로 나옴과 동시에 얼어붙어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미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SS급, 모태 솔로 특성으로 SSS급에 준하는 스탯을 가진 내가 추위를 느끼다니.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캉! 콰과광!

텅-!

일방적으로 몬스터를 학살하던 아폴론이 커다란 굉음과 함께 튕겨 나와 바닥에 나뒹굴었다.

새하얀 흉갑에 새겨진 주먹 모양의 상흔.

자체적으로 수복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파괴력이었다.

‘아폴론을 튕겨냈어?’

아폴론이 상대하던 몬스터를 바라봤다.

SS급 몬스터 설인.

외형은 분명 여태껏 학살하다시피 일반적으로 사냥했던 몬스터가 맞았다.

하지만 공간시가 보여주던 정보는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이름: 신의 축복을 받은 설인]

[등급: SSS]

[설명: 침묵하는 겨울의 신 미루의 독실한 신도. 신의 강림과 함께 지성이 깨어났다.]

단지 설인이라고 적혀있던 이름 앞엔 ‘신의 축복을 받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SS급이던 등급은 SSS급으로 승급됐다.

설명까지 읽은 나는 이질감의 원인을 알게 됐다.

‘신이 강림했다.’

침묵하는 겨울의 신 미루.

당장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것이 강림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강림한 ‘침묵하는 겨울의 신 미루’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이 어떻게 던전 속으로 강림했는지는 나중에 알아보면 될 일이다.

““크오오오!-!!”.”

““케-에에엑!!”.”

지금 내가 당면한 문제는 수십만이 넘는 SSS급 몬스터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씨드.”

“네. 사령관님.”

“샤이닝 세이버 모두 귀환시켜.”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또다시 전투에서 배제된다는 사실에 씨드가 약간 상심한 듯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아폴론. 너는 최대한 방어에 집중하도록 해.”

“네. 사령관님.”

“…….”

나는 몬스터들이 미친 듯이 환호성을 지르는 사이 놈들을 상대할 준비를 했다.

시무룩해져 말이 없어진 씨드와 샤이닝 세이버를 인벤토리에 챙겨 넣고 방송을 종료했다.

아폴론을 방어 모드로 전환한 나는 인벤토리에서 한 가지 아이템을 꺼냈다.

검은색 묵광이 일렁이는 기괴한 외형의 갑옷.

착용 시 소모되는 신성 스탯이 아까워 단 한 번도 착용해 본 적 없는 신살(神殺) 병기.

디뷰에이프.

나는 디뷰에이프에 마나를 불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언제 개시하나 했는데, 오늘이 그날이네.”

디뷰에이프의 등급은 신급.

신성 스탯만 충분하다면 영락한 반신 따위 겁낼 필요가 없다.

봐라.

내가 위험할 때면 항상 퀘스트를 던져주며 위기탈출 넘버원을 찍게 했던 관리자의 특수 퀘스트도 감감무소식이지 않은가.

‘해볼 만한 상대라 이거지….’

퀘스트가 없는 건 조금 아쉽지만, 나쁘지 않다.

그만큼 이번 싸움이 위험하지 않다는 뜻이니까.

우웅-.

나의 마나를 머금은 디뷰에이프가 공명음을 토해내며 작동을 시작했다.

관절부와 갑옷의 이음새가 벌어지며 내 몸을 감싸는 디뷰에이프.

-신살 병기 디뷰에이프를 착용하셨습니다.

-분당 10의 신성 스탯이 소모됩니다.

디뷰에이프를 착용하자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몸이 진정을 되찾았고 피부를 가르던 혹한도 사라졌다.

“그럼 어디 한번 놀아볼까?”

역시 게임이든 인생이든 템빨은 무시할 게 못 된다.

신급 아이템 하나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자신감이 뿜뿜하지 않은가.

“키에에….”

디뷰에이프의 착용을 마치자 환희에 찬 괴성을 내지르던 몬스터들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아까와는 다르게 새하얀 빛이 일렁이는 수십만 쌍의 눈동자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뭘 야려 새끼들아. 덤벼. 시간 없어.”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걸까?

““크오오오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몬스터의 파도가 나를 향해 밀려왔다.

그나저나 연우 형은 괜찮을지 모르겠다.

미루가 나에게 오지 않았다는 건 연우 형 쪽으로 갔다는 뜻이니까.

‘뭐. 잘 알아서 하겠지. 요즘 반신급 드래곤과 싸우는 중이라고 했으니까.’

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겠지.

***

같은 시각.

도연우는 강현의 예상대로 침묵하는 겨울의 신 미루와 마주하고 있었다.

투명한 얼음을 사람형상으로 깎아놓은 듯한 외형.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아니라면 장인이 정성스레 조각한 얼음 조각이라 믿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끔찍한 한기와 주변을 짓누르는 위압감.

도연우에게 학살당하고 있던 몬스터들은 마치 무언가에게 홀린 것처럼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하, 하하….”

그 모습을 본 도연우는 나직한 실소를 흘리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떨리는 몸뚱이와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

“…게임은 역시 게임일 뿐이었던 건가?”

도연우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십이 신…. 반신급이라더니, 드래곤하곤 비교도 안 되잖아.”

토플란 시스템 안에서 물리도록 사냥했던 반신급 드래곤.

미루가 뿜어내는 위압감은 시스템이 만들어낸 허상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했다.

하지만, 미루를 마주한 도연우의 가슴속엔 호승심이 끓어 올랐다.

미루의 투명한 눈동자가 도연우를 향했다.

침략하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되려 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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