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던전을 먹는 각성자 (1).
청심원에서 가족 버프를 받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승급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런 맹목적인 신뢰를 받았는데 언제까지 침울해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분명 스탯 포인트는 과할 정도로 많이 투자했어. 그런데도 성장이 더디다는 생각이 드는 건 단지 스탯을 많이 찍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지.’
다른 각성자들처럼 승급을 위한 깨달음의 벽이라도 있는 걸까?
하고 생각을 해보면 그건 또 아니다.
스탯을 투자하면 확실히 투자한 만큼 강해졌으니까.
그런데도 내가 성장이 멈춘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는 하나였다.
아마 처음과 달리 하나의 스탯 포인트를 투자해 얻는 효율이 달라졌기 때문이리라.
스탯 총합이 60에 불과할 때 투자되는 1포인트와 6만 포인트를 향해 가고 있는 지금 투자되는 1포인트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처음 스탯 포인트를 투자할 땐 1포인트만 올려도 강해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면 지금은 커다란 수영장에 간장 종지로 물을 퍼붓는 느낌이었다.
티도 안 난단 말이다.
‘그만큼 내가 강해졌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그것은 SS급에서 SSS급으로 넘어가기 위한 스탯량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방법이 없을까?’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언젠가는 SSS급으로 올라설 거란 확신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우리가 교단을 치기 전 교단 쪽에서 먼저 우리 쪽으로 쳐들어올 수도 있고 신이 강림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래서 이토록 조바심이 생기는 거다.
내가 멈춰 있는 지금도 적들은 여전히 강대하기 그지없다.
‘영락했다곤 하지만 반신급 존재가 무려 열둘.’
재해급 몬스터, 십이사도, 교단 같은 건 그저 곁가지일 뿐이다.
메인디쉬 옆에 딸려 나오는 사이드디쉬.
반찬 몇 개 맛있게 먹었다고 배가 부를 리 만무했다.
‘12신이라는 지구의 위협을 깔끔하게 먹어치워야 배가 부를 테지.’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들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다.
그러니 답은 정해져 있다.
내가, 그리고 내 주위의 강해질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최대한 강해지게 하는 것.
시스템이 주는 퀘스트를 깨 보상을 받는 건 좋지만 그 뒤가 없는 게 문제였다.
아공간을 들어갈 때마다 매번 퀘스트가 발생하는 것도 아니었고.
‘레벨업밖엔 답이 없네.’
내가 강해질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
나는 그 답이 레벨업이라고 생각했다.
***
던전은 크게 두 분류로 나누어진다.
다섯 명에서 열 명으로 이뤄진 파티 단위로 공략을 하는 파티 던전과 100명이 넘는 인원이 들어가 공략하는 공대 단위 던전.
던전이 분류되는 기준은 보통 던전의 넓이와 몬스터의 등급 등을 종합해 나뉘지만, A급 이하는 파티 던전, S급 이상은 공대 던전으로 분류된다고 보면 편했다.
그 말은 SS급인 내가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선 공대 던전에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고, 현행법상으로 나 혼자 던전에 들어갈 방법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나한테 그건 디버프나 다름없지.’
길드원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모태 솔로 특성 때문에 홀로 사냥할 때 더욱 강해지는 나에게 공대 사냥은 족쇄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고?
잔머리를 조금 굴리니 방법이 떠올랐다.
‘법 때문에 홀로 사냥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법에 저촉되지 않는 곳으로 가면 된다.’
그래서 이곳에 왔다.
휘이잉-.
한반도엔 봄이 찾아왔음에도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부는 이곳.
만주.
중국도 한국도 관리를 포기한 버려진 땅.
몬스터 필드.
중국에선 여전히 만주가 자기네 땅이라 우기지만, 알게 뭔가?
민간인은 물론이고 군대조차 없는 땅인데.
키--에엑!
크르렁-!
조금만 귀를 기울여도 몬스터들이 내지르는 괴성이 쉼 없이 들려오는 이곳은 내게 레벨업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여긴, 필드에 풀려있는 몬스터도 많지만, 던전도 많거든.
그래서 뭘 할 거냐고?
‘뭘 하긴? 눈에 보이는 건 죄다 때려잡아야지.’
일단 인벤토리에서 아폴론과 씨드를 꺼냈다.
플리피인들에게 주문 제작한 샤이닝 세이버 100기와 함께 허공에 떠 있는 씨드의 모습이 위풍당당하기 그지없다.
내 욕심 같으면 함대를 좀 더 늘리고 싶었지만, 씨드 혼자서 제어할 수 있는 샤이닝 세이버가 최대 100대라니 어쩔 수 없었다.
이제까지 함께한 의리가 있지 새로운 관제 AI를 들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사냥을 시작하겠습니다. 사령관님.”
이미 의논을 마친 상태였기에 씨드는 인벤토리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샤이닝 세이버를 조종해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고.
순간, 몬스터들이 토해내는 비명과 괴성이 고막을 울렸다.
그리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레벨업. 보너스 스탯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역시 RPG는 레벨업과 아이템 빨 이다.
한 번의 레벨업으로 얻을 수 있는 스탯 포인트는 고작 5에 불과했지만 그게 태산만큼 높이 쌓이면 얘기가 달라지니까.
“사령관님 저도 사냥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아폴론도 내 곁을 떠나갔다.
저 녀석은 씨드가 상대할 수 없는 몬스터들을 상대할 거다.
샤이닝 에로우에서 샤이닝 세이버로 업그레이드됐다지만 씨드의 한계는 명확했다.
S급.
S급 몬스터까지는 사냥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상성이 안 좋으면 S급 몬스터도 사냥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아폴론은 그런 놈들을 처리하는 데 필요했다.
명색이 SSS급의 병기니까.
디뷰에이프는….
일단 봉인상태다.
‘사용할 때마다 신성 스탯을 소모한다는 놈을 함부로 착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미약한 신성의 샘이라는 권능을 얻었지만 지난 3개월간 얻은 신성 스탯은 고작 900 정도에 불과했다.
미약한 신성의 샘 권능으로 하루에 쌓을 수 있는 신성 스탯은 10.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수치라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천마만 하더라도 지니고 있던 신성을 소모해 내가 사용한 사망 선고 권능을 무효화하지 않았던가.
‘12신이 영락했다곤 하지만 반신이라 불리는 놈들이니 천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겠지.’
신성 스탯은 최대한 아껴야만 했다.
그래서 디뷰에이프는 당분간 봉인.
아폴론과 씨드, 둘을 떠나보낸 나는 걸음을 옮겼다.
난 뭘 할 거냐고?
몬스터는 필드에만 있는 게 아니다.
만주부터 시베리아까지.
이 넓은 땅덩어리를 몬스터로 가득 채운 근원.
던전을 청소할 거다.
SSS급 던전이건 F급 던전이건 가리지 않고 모조리.
‘아폴론과 씨드는 필드에서, 나는 던전에서.’
이것이 나의 레벨업을 위한 마스터 플랜이다.
***
“F급 던전이네. 쩝.”
만주 벌판에서 처음 들어온 던전은 F급 던전이었다.
그것도 나와 인연이 깊은 고블린이 나오는 던전.
젠장. 그 못생긴 면상을 보니 1년 전 이맘때 죽을 뻔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고블린 한 마리 잡겠다고 개싸움을 벌이다가 사경을 헤맸는데. 이제는 뇌기를 발현해 던전을 가득 채우는 것만으로 고블린 50마리를 몰살시켰다.
격세지감이란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던전 안에 인벤토리 하나도 없는 걸 보니 정말 여기가 사람이 살지 못하는 만주라는 게 실감이 났다.
‘우리나라에선 던전에 들어가기만 해도 죽은 이들이 남긴 인벤토리가 나를 반겼었는데.’
전인미답(前人未踏)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나는 순백의 설원에 발 도장을 찍듯 걸음을 옮겨 던전 코어가 있는 보스룸으로 향했다.
보스룸이라 해봤자 고작 F급 던전.
문 안으로 들어서자 시커멓게 탄화되어 쓰러져 있는 고블린 족장 한 마리와 허공에 떠 있는 던전 코어가 나를 반겼다.
저벅.
고블린 족장의 시체를 지나 던전 코어를 향해 다가갔을 때였다.
-특성: 공간의 미학 SSS (LV1)가 발현됩니다.
‘공간의 미학’이 발현되며 눈앞의 세상이 이지러졌다.
-특성: 공간시 SS (LV1)가 발현 중입니다.
-공간의 미학과 공간시가 시너지를 일으킵니다.
-공간의 정보가 시각화됩니다.
이지러진 세상은 이내 점과 선 그리고 수많은 도형으로 채워졌다.
점과 점이 만나 선을 이루고 선과 선이 만나 면을 이루며 다시, 면과 면이 만나 하나의 입체적 도형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도형은 서로 연결되어 이내 하나의 공간을 이뤘다.
그리고 그 공간의 중심에 던전 코어가 있었다.
수만 개의 바늘이 뇌를 찌르는 것만 같은 끔찍한 고통이 두부(頭部)를 후벼 팠다.
“끄윽!”
이 빌어먹을 특성은 항상 예고도 없이 발현된다.
적어도 깜빡이는 켜고 들어와야 대비를 할 것 아닌가.
‘눈알 빠지는 줄 알았네. 젠장.’
두 눈을 질끈 감고 심호홉을 하며 마음을 다스리던 나는 다시 눈을 뜨고 던전 코어를 바라봤다.
휘청.
준비는 했지만, 갑자기 몰려드는 정보의 파도에 다리가 풀려 몸이 휘청였다.
-F급 던전 코어의 정보를 추출합니다.
-F급 던전 코어 정보 추출 중…. 1%…….
‘끄으윽….’
이 고통은 도무지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가 없다.
그렇게 속으로 신음을 흘리며 던전 코어를 주시하길 얼마나 지났을까?
-F급 던전 코어의 정보가 각인됩니다.
“에…?”
던전 코어의 정보를 얻은 후 공간의 미학을 중지시킨 나는 멍한 눈으로 시스템 창을 바라봤다.
-이제 아공간 포식 스킬을 사용해 F급 던전을 포식(捕食)하실 수 있습니다.
“…던전을 포식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무기가 내 손에 쥐어지는 순간.
“X바. 이거 완전 X 된 것 같은데….”
내 머릿속에는 아주 끔찍한 생각이 떠올랐다.
시스템은 말했다.
F급 던전을 포식할 수 있다고.
그 말은 E급부터 SSS급까지 이 빌어먹을 짓거리를 반복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 끔찍한 고통을 여덟 번이나 더 겪어야 한단 말이지?’
빈말이 아니라 정말 눈앞이 노래졌다.
포기할 수도 없다.
던전이 나타난 이래로 던전의 소멸은 인류의 숙원사업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건 둘째치고 놈들의 수작질을 미리 방지할 수 있으니까.’
빅 웨이브.
한 번 통한 방법이니 다시 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우리가 가정한 최악의 상황 중엔 교단을 처리하기 위해 정예병력이 빠져나간 후 놈들이 다시 한번 빅 웨이브를 일으켜 후방을 교란하는 상황도 있었다.
그런 상황을 미리 막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는데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있나. 대가리가 깨져도 얻어야지. 문제라면 그 대가리가 내 대가리라는 거였지만.
“하-. 씨. 인생 진짜….”
나직하게 한숨을 토해낸 나는 아공간 포식 스킬을 사용해 던전 코어를 집어삼켰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란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라는 것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
“으아….”
머릿속이 용광로처럼 달궈졌다.
장담하건대 지금 내 머리 위로 주전자를 올려놓으면 10초도 지나지 않아 끓어오를 거다.
“그래도 어찌어찌 S급까진 끝을 냈는데 남은 게 문제네.”
이제 남은 건 SS급 던전의 던전 코어.
하지만 SS급의 던전은 공대 단위가 아니라 국가 단위의 각성자들이 모여 공략해야 하는 던전이다.
우리나라도 이전까지는 SS급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선 10대 길드의 정예들이 모두 모여 공략을 해야 했다.
그게 3년에 한 번이라 다행이지 F급 던전처럼 한 달 주기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다면 진즉 인류는 멸망했을 거다.
그런 던전을 혼자 들어가느냐 마느냐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금 튀어나온 따끈따끈한 SS급 보스 몬스터.
쿠오오오---!!
엘리멘탈 드레이크를 토해낸 던전 입구가 눈앞에서 나를 유혹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