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인내의 계절 (3).
서태촌과 구정철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깨달음의 화두를 풀어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을 때.
크롸롸롸--!
“빌어먹을 브레스!”
도연우 또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다.
키에엑!
콰르르릉-.
번-쩍!
그 상대는 토플란 시스템에 의해 반신급으로 분류되는 몬스터.
드래곤.
일전에 태초의 별에서 태고룡 쿠아르탐파를 상대해 본 적이 있는 도연우였지만 그는 토플란 시스템 속 드래곤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도연우는 그때보다 강해졌지만, 그것은 그가 상대하는 드래곤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태고룡 쿠아르탐파.
몸길이만 2㎞에 달했던 놈과 비교하면 시스템 속 드래곤은 상당히 아담한 사이즈였다.
쿠아르탐파와 비교하면 고작 10분의 1 크기에 불과한 체구였으니까.
하지만 이 반신급 드래곤은 쿠아르탐파에게는 없던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용암의 바다.
혹한의 냉기를 품고 불어닥치는 얼음의 폭풍.
하늘을 뒤덮고 떨어져 내리는 낙뢰의 비와 그 중간중간 시퍼런 불꽃을 내뿜으며 폭발하는 화염 구름.
그것은 바로 권능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월등한 마법 능력이었다.
“저 공간이동만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하지만 그중 도연우를 골머리 썩게 만드는 것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자신의 위치를 바꾸는 드래곤의 공간이동 마법이었다.
도연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킬 중 가장 빠른 일섬을 사용해 봤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공간이동 마법 때문에 도연우의 공격은 모조리 허공만 헛되이 꿰뚫는 중이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난 삼 개월간 포기하지 않고 공략을 시도한 끝에 드래곤의 공격 패턴에 익숙해졌다는 것이고.
“이제 근접전인가?”
슬슬 놈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쿠오오---!
마침내 허공에서 마법을 쏟아붓던 드래곤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며 강하를 시작했다.
후오오오.
압도적인 질량의 추락에 주변에 있던 공기가 밀려나며 먼지를 피워 올렸다.
크롸롸롸-!!
분노한 드래곤이 피어를 쏘아내고.
우우웅-.
빛으로 이루어진 창을 움켜쥔 도연우가 드래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드래곤의 등급은 반신급.
아직 EX급에 불과한 자신이 이기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도연우도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내가 꼭 너를 꺾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래곤을 향해 쇄도해 가는 도연우의 입꼬리는 위로 말려 올라가 있었다.
아주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꽈앙!
원래부터 게임 폐인이었던 도연우에게 토플란 시스템 안에서의 전투는 게임과 다를 게 없었다.
적을 처치해 성장하고 공략방법을 찾아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RPG 게임.
현실에선 그렇게 귀찮아하던 몬스터와의 싸움조차 즐길 수 있을 정도로 그는 토플란 시스템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도연우는 오늘도 느리지만, 분명히 한 걸음씩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인간을 초월한 초월자가 나아가야 할 다음 걸음, 반신이라는 등급을 향해서.
***
해찬이에게 알파 원과 함께 숙제를 전달한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연우 형은 토플란 시스템에서 나올 생각이 없다고 했고, 두 영감님은 한바탕 푸닥거리 중이시고, 강 회장님은 지금 진행 중인 일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하셨고….”
모처럼 휴일이라 생각하고 나선 길이었지만 협소한 인간관계로 인해 만날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기적 형님은 새로 오픈한 경매장 때문에 바쁘단다.
강남 대참사 때. 오프라인 경매장이 박살 난 관계로 이참에 길드와 경매장을 분리해 사옥을 확장 이전했다.
길드 인원도 늘어났고 경매 사업도 날로달로 커지는 중이었으니까.
덕분에 난 휴일임에도 집돌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커피 한잔할 사람이 없냐…. 쩝.”
원래 사람 만나는 걸 그다지 즐기지 않았던 나지만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공간이나 청소할까?”
전용 던전의 입구가 있는 창고 쪽을 바라보던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쉬는 날엔 쉬어야지….”
성장이 멈춘 것에서 조바심이 생겨 요 한 달 동안 쉬는 날도 없이 전용 던전을 드나들었더니 기겁한 지아가 출입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조바심 내다가 꼭 사고가 난다면서.
지엄하신 동생님의 말씀이니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집을 빠져나온 나는 청심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청심원으로 향하는 골목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라그라주 군락을 보러온 관광객들이었다.
‘구름 가오리를 잡기 위해서 뿌린 씨앗이 이렇게 관광 상품이 될 줄은 몰랐네. 하하.’
라그라주 덕분에 지역경제가 살아났다는 평가마저 있을 정도니 말해 뭐하랴.
식당과 카페, 라그라주 가지를 깎아 만든 공예품과 잎사귀 등을 파는 공예품점이 들어선 골목엔 활기가 가득했다.
덕분에 나도 쏠쏠하게 포인트를 챙기는 중이다.
-강미선 님이 라그라주를 보며 감탄합니다. 0.1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윤철호 님이 라그라주 가지로 만든 공예품을 붙들고 가족의 건강을 빕니다. 0.1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아무런 효과도 없는 공예품을 붙들고 왜 소원을 비는지 모르겠지만, 뭐 누이 좋고 매부 좋으면 된 거지.
까르르르.
청심원이 가까워지자 담벼락 너머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봄이라 부르기엔 쌀쌀한 날씨인데 아이들은 역시 추위를 모르나 보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잔디밭 위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보였다.
조금 큰아이들은 죄다 학교에 가 있을 시간이지만 그런데도 마당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서른 명은 넘어 보였다.
아이들이 많이 늘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 모두에게서 황금빛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
아름다웠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은 저마다 가슴에 하나둘 상처가 있는 아이들이다.
어렸을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시절 청심원은 정말 열악했다.
이건 어머니의 노력과 별개의 이유 때문이었다.
빅 웨이브.
그 빌어먹을 재난 때문에 죽은 이만 무려 100만 명.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을 기존의 보육 시설에서 감당하기엔 그 수가 너무 많았다.
머리가 좀 영글고 나서 안 일이었지만 빅 웨이브 전까지만 해도 청심원에 머물던 아이들은 열 명 정도였다고 했다.
그런데 빅 웨이브가 일어나고 총원이 서른 명으로 늘어나 버렸으니 어머니 혼자서 감당하기엔 무리였을 터.
정부나 지자체의 보조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려버렸다.
아직 국토를 좀먹고 있는 몬스터들을 모두 정리하지 못했을 때니까.
그러니 당연히 보육원 사정이 열악해질 수밖에.
그래서 저 나이 때 나는 웃지 못했다.
어머니는 서른이 넘는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노력하셨지만 그건 한 사람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아이들이 웃고 있었다.
물론 저 맑은 웃음의 이유가 전적으로 내 덕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0.1% 정도는 내 공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오셨어요?”
“어? 응.”
김미소였다.
던전 연쇄살인마들에게 아버지를 잃은 아이.
부도덕한 아버지의 친구 때문에 사채업자에게 협박을 받던 아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악의에 휩쓸려 무너져 내렸던 아이가 생긋 웃으며 나를 반기고 있었다.
“마침 애들 점심 먹이려던 참인데 잘 오셨네요. 들어가셔서 같이 식사해요.”
듣자 하니 동생과 함께 보육원에서 머물며 사회복지사 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하더니.
“얘들아 들어가자-! 점심 먹을 시간이야-.”
이젠 애들 다루는 것도 곧잘 한다.
마치 양치기 개가 양 떼 몰이를 하는 것처럼 애들을 몰아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김미소의 뒤를 따라, 보육원 안으로 들어서는 내 입가엔 나도 모르게 미소가 맺혔다.
***
“하아-. 죽겠네.”
10분.
보육원 안으로 들어선 내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10분이면 족했다.
“어머니는 대체 이걸 어떻게 혼자 하셨던 거야?”
서른 명이 넘는 미취학 아동들에게 밥을 먹인다는 건 그런 거였다.
차라리 크롤러랑 드잡이질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
재단에서 고용한 복지사분들과 자원봉사자분들이 있는데도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는 건 전쟁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나는 장렬하게 전사했다.
미운 다섯 살, 미친 여섯 살이란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밥 한 끼를 먹는데도 여기저기서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했다.
이걸 하루에 세 번이나 하다니 새삼스럽게 복지사분들과 자원봉사자분들이 존경스러워졌다.
달그락.
“식사하세요. 아저씨.”
장렬하게 탁자 위로 널브러져 있는 내 옆으로 식판 하나가 놓였다.
“원래 점심시간이 제일 힘들어요. 아침이나 저녁은 큰애들이 애들을 보살펴줘서 좀 수월하거든요.”
나는 미소가 챙겨준 식판을 사양 않고 내 앞으로 끌어왔다.
“그래. 고마워. 잘 먹을게.”
지금은 뭐라도 먹어야 체력이 회복될 것 같았다.
SS급 각성자의 체력을 30분 만에 깎아내다니. 저놈들은 천사의 얼굴을 한 마귀가 틀림없다.
그때 내 옆으로 식판 하나가 놓였다.
“야. 너 언제 왔어?”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 어머니 대신 보육원을 관리하느라 바쁜 정혜 누나였다.
“아까. 점심시간 전에.”
“아저씨가 애들 밥 먹이는 거 도와주셨어요.”
“킥. 그래서 이렇게 초췌하구만?”
나는 입안 한가득 밥과 반찬을 욱여넣으며 물었다.
“우리 때도 이랬나?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완전 전쟁이 따로 없어.”
“우리 때라고 뭐 달랐을까? 그땐 먹을 것도 부족했으니까 더 심했겠지.”
“하긴….”
“그나마 네 덕에 애들 먹는 거 입는 거 걱정 없이 보육원 운영이 가능한 거야. 애들 볼살 통통한 거 봤지?”
재단을 설립하고 내가 유일하게 사용했던 이사장의 권한은 청심원을 최우선 지원대상으로 올리는 것이었다.
그거 말곤 전부 지아가 맡아서 운영 중이다.
“그럼다앵이고.”
“다 먹고 말해. 더럽게.”
“거참 우리 누이 너무하시네, 조금 전까지 내 덕이라고 치켜세워주더니.”
“그건 그거. 이건 이거. 나이가 몇 갠데 식사예절이 다섯 살배기 아이랑 똑같니?”
“쿡쿡.”
나직이 들리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드니 미소가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젠장, 재단 이사장의 권위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하늘 요양원에.”
“거참 쉬시래도….”
“어머니가 쉬길 바랐으면 재단 이사로 올리지 말았어야지.”
어머니는 재단 이사가 되시고 더욱 왕성하게 복지 활동을 하시기 시작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돌아다니신다는 보고를 받고 처음으로 유클리안 잎사귀 차를 드린 걸 후회했다.
일흔이 넘으신 분이 이렇게까지 활동적일 줄 난들 알았을까.
“행여 엄한 생각 하지 마. 엄마 요즘 최고로 행복해하시는 중이니까.”
“쩝. 알겠어….”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도와줄까 해서 팔을 걷어붙였던 나는 미소에게 등 떠밀려 원장실로 들어와야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이야 보육원을 다 오고. 무슨 일 있어?”
“응?”
“너. 애들한테 괜히 부담 주기 싫어서 보육원 잘 안 왔었잖아. 그런데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무슨 일 있지 싶어서.”
“아…. 그게 티나?”
“어. 무지.”
정혜 누나의 대답에 나는 피식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싸워야 할 적은 강한데, 성장이 멈춘 것에서 오는 조바심. 초조함.
감춘다고 감췄는데 그게 잘 안된 모양이었다.
“그냥….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그저 고민을 털어놓기 위한 서두를 열었을 때 너무나도 단호한 대답이 들려왔다.
“더할 나위 없이 잘하고 있지.”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한 단호한 목소리.
“그러니까 지금 하는 것처럼만 하면 돼. 뉴스에서 어떤 병신이 그러더라 지금이라도 12신을 받아들이고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고. 그래야 인류가 생존할 수 있다나?”
정혜 누나는 내 눈을 직시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런데 너는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서 싸우려고 하는 거잖아?”
“…그렇지.”
“그럼, 이기겠네. 난 내 동생을 믿거든. 서태촌이니, 구정철이니, 도연우니 하는 이름값 높으신 분들보다 내 동생 강현을 믿어. 그러니까 망설이지 마. 넌 잘하고 있어.”
정혜 누나의 눈동자 속엔 나를 향한 단단한 믿음이 자리해 있었다.
나는 그 눈을 보며 누나처럼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역시 가족이 최고다 이렇게 조건 없는 믿음을 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