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인내의 계절(2).
이해찬은 눈앞에 놓인 물건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새하얀 외장갑과 유려한 곡선이 인상적인 2m 크기의 로봇.
“어…. 형 요즘 새로운 취미 생기셨어요?”
“음? 그게 무슨 말이야? 새로운 취미라니.”
“실사 피규어 모으시는 거 아니에요?”
자신을 S급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믿을 수 없는 말에 혹했던 그였지만 정작 강현이 꺼내 놓은 로봇 피규어를 보자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 내가 뭘 기대했던 건지…. S급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오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S급은 깨달음의 경지.
아무리 재능이 출중한 이라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10년이고 20년이고 그 높다란 벽에 가로막혀 좌절하게 된다.
강현을 만나 말도 안 되는 속도로 A급까지 승급한 이해찬이었지만, 그것이 정말 터무니없는 행운이었단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 현이 형이라고 해도 S급 승급은 무리겠지….’
눈앞에 있는 강현이 불과 1년 만에 SS급으로 승급했지만, 강현은 애초에 자신과 비교가 불가능한 존재였지 않나.
F급일 때 상위 보스인 여왕개미를 잡았던 인물이니 비교 자체가 안 되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이런 장난은 좀….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강현이 자신에게 장난을 친 걸로 생각한 이해찬이 샐쭉한 눈으로 강현을 바라봤다.
“뭐냐 그 불손한 눈빛은?”
그 눈빛의 의미를 읽어낸 강현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알파 원. 인사해. 네 주인님이시다.”
“주인님이라니 그게 무슨…?”
무슨 19금 소설에나 나올 법한 대사에 놀란 이해찬이 강현의 정신상태를 의심하려던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나직한 공명음과 함께 멀뚱히 서 있던 피규어의 눈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엉?”
멍청한 이해찬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들려오는 목소리.
“알파 원 가동 시작합니다. 신규 사용자 등록 절차를 진행합니다. 이름을 말씀해 주십시오.”
“어…이해찬?”
“사용자 이름을 확인합니다. 어이해찬 님이 맞습니까?”
다시금 들려온 알파 원의 물음에 이해찬은 얼굴을 붉혔고 강현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니. 이. 해. 찬. 이해찬이라고.”
하지만 이해찬은 그런 강현의 얼굴을 확인할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반갑습니다. 이해찬 님. 사용자 각인 절차를 진행하겠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어. 어?”
철컥. 지이잉. 철커덕.
그저 실물 크기의 피규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말을 하는 것을 넘어 움직이기 시작했고.
“어? 어어…….”
정말 ‘어어’ 하는 사이에 알파 원이 이해찬을 잡아먹었다.
정확히는 이해찬이 갑옷을 착용한 것이었지만.
***
해찬이가 착용한 갑옷은 전투 보조 AI 알파 원이 내장된 ‘능동형 전투 보조 외골격 기계 갑옷.’ 줄여서 전투 기갑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아폴론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랄까?
대량 생산에 맞게 기능을 축소하고 인공지능의 자율성과 학습능력을 제한해 오로지 전투 용도로만 사용할 수 있도록 생산해낸 전투 기갑.
전투 기갑의 아이템 등급은 A급.
공장에서 찍어내는 대량 생산품이라 아폴론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운그레이드된 성능을 가지게 됐지만 그런데도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사용자의 등급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성능을 보여줬다.
완전 마도 과학 만세다.
‘A급 아이템이 상위급 각성자를 등급업 시킨다는 건 판타지 소설에서도 나오지 않을 설정이니 넘어가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전투 기갑을 사용해 가장 극적인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S급의 벽을 넘지 못해 A급에 머물러 있는 각성자들이었다.
전투 기갑은 교단과의 전쟁에 참여할 10대 길드를 비롯한 몇몇 길드에 속해 있는 각성자들에게만 제공될 예정이었지만 나는 수익 일부를 포기하면서까지 전투 기갑 100벌을 빼 왔다.
‘기껏 거간꾼 역할을 했는데 남 좋은 일만 시킬 수는 없지.’
알파 원을 받은 대가로 교단과의 전쟁에 참여해야겠지만.
그건 해찬이 녀석이 알아서 할 일이다.
길드장으로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길드를 설립하고 몇 개월 동안 내버려 둬 버린 덕에 길드는 해찬이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몇 달 전 신성 그룹의 그림자인 신화에서 빠져나온 인원들을 흡수한 뒤 조금 입지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제는 제법 자리를 잡고 부 길드장 역할을 수행 중이다.
덕분에 제법 길드가 꽤 커졌다.
10대 길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사무직을 제외한 길드원이 모두 200여 명에 달하니 중견 길드 급으로 성장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처음 다섯 명으로 시작한 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성장이지.’
물론 그 성장에 내 이름값이 없다곤 말할 수 없지만, 그 많은 인간군상을 컨트롤하고 길드를 유지하는 것은 오롯이 해찬이의 능력이었다.
애초에 인간이란 게 세 명만 모여도 파벌을 만들어내는 이해할 수 없는 종족 아니던가.
‘이제 우리도 전면에 나설 때가 되었지.’
교단과의 전쟁이라는 빅 이벤트.
여기에 숟가락 얹지 않으면 대형길드로의 발돋움은 힘들다고 봐야 한다.
우리의 계획대로 교단을 토벌하고 12신을 무찌르고 나면 던전이나 몬스터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처럼 던전과 몬스터가 유지된다는 보장이 없어.’
지금 지구에 퍼져 있는 던전과 몬스터들은 12신이 지구에 마나를 퍼트리기 위해 만들어낸 장치였다.
너무 먼 미래의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12신을 토벌하고 나면 더 는 던전이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당장은 시베리아나 만주 벌판과 같은 몬스터 필드라고 불리는 곳에 수많은 몬스터가 존재하지만.
‘지금처럼 마나의 묘약을 복용한 각성자가 늘어나고 거기에 알파 원까지 시중에 풀리면 모를 일이지.’
몬스터가 없는 세상.
나는 그 시절을 살아본 게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강 회장님은 죽기 전에 다시 그런 세상을 보시고 싶은 모양이었다.
우주 전함도 알파 원도 강 회장님이 정력적으로 앞장서서 일을 진행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빠르게 생산될 수 없었을 테니까.
애초에 게임 체인저가 될지도 모르는 저 거대한 우주 전함과 알파 원을 제작하는데 정부 허가 없이 진행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강 회장님이 나섰음에도 일의 진행은 순조롭지 않았다.
‘괜히 10대 그룹과 길드들을 참여시킨 게 아니지.’
대현의 호랑이가 진행하는 일이었음에도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숟가락 하나 얹어보려는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있었고,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교단의 신도들에 의한 제조공장 테러 또한 끊임없이 벌어졌다.
‘그나마 강산호 회장님 정도 되니까 이 정도까지 일을 진행한 거지 아니면 진작에 뻐그러졌지.’
10대 그룹과 길드들을 이번 계획에 참여시키고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전함이 완성되고 알파 원이 양산에 들어간 것이었다.
물론, 거기엔 테러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 내 노력도 적지 않았다.
한마디로 해찬이가 입고 미친놈처럼 춤을 추고 있는 저 알파 원에는 내 파와 땀이 녹아 들어가 있다는 말씀.
“형! 이거 미쳤어요!”
그러니 내가 저걸 다른 사람 입에만 넣어주고 싶겠는가?
내 몫도 챙겨야지.
“응 그래. 미친 건 네 춤 실력인 것 같으니까 지랄은 그만 멈춰주겠니?”
내 말에 알파 원을 입은 채 낙지처럼 흐느적거리던 녀석의 움직임이 멎었다.
푸시익-.
알파 원을 벗은 해찬의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런 걸 좋아하는 걸 보니 아직은 애다 싶었다.
“이거, 어디에서 나신 거예요? 이것도 형이 만드신 거예요?”
초롱초롱한 눈을 빤짝이며 얼굴을 들이미는 녀석을 밀어냈지만, 이해찬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연신 재잘거리며 떠들어댔다.
“이거 정말 미쳤어요. 마법 연산 속도가…. 거기에 상위등급 마법도 보조해주고…. 자체적으로 마나석 엔진을 장착하고 있어서 마나 실드가 상시 작동되고…. 아! 움직임도 매우 편해요. 근접 계열 각성자들처럼 몸이 막 움직이는 게….”
어…. 잠시 이대로 놔둬야겠다.
한창 기분 좋은 녀석에게 전쟁터에 끌려가야 한다는 말을 할 수는 없지.
속이려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형으로서 동생을 배려하려는 마음? 그런 거라고.
가슴 언저리가 쿡쿡 쑤셨지만 외면했다.
나한테 이런 거에 찔릴 양심이 남아있을 리가 없잖아.
***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공간.
깨달음의 화두를 붙잡고 한없이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갔던 서태촌은 반개했던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쉽지 않군.”
쉽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깨달음의 문턱을 넘는 것은 더디고 고되다.
강현의 권유에 오리지널 토플란 시스템을 사용해 보기도 했지만, 자신에겐 그다지 매력적인 시스템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없을 때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일까?
토플란 시스템은 단지 알고 있던 것이 수치화되어 보인다는 것 말고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시스템 안에선 몬스터를 썰어내도 별 감흥이 없으니…. 다른 돌파구가 필요한 것인가?”
토플란 시스템이 제공하는 몬스터와의 전투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냐면 그것은 아니었지만, 뭐랄까 손맛이 달랐다.
현실에서 몬스터를 벨 때와는 다른 느낌에 오히려 이질감을 느꼈을 정도였다.
그동안 손에 피를 너무 많이 묻혔구나 싶었다.
그리고 토플란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 것은 그 자신만이 아니었다.
쾅!
수련실의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거구의 노인이 불빛을 등에 두르고 성큼 수련실 안으로 들어섰다.
“서가야! 한판 붙자!”
투왕. 아니 이젠 투신이라는 낯뜨거운 별호로 불리는 구정철이였다.
“저런 놈과 내가 동급이라니…. 에잉.”
전직 대통령이란 놈이 체면과 위신을 어디다 내다 버렸는지 하는 짓이 영락없는 뒷골목 건달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저놈 하는 꼴을 보면 대체 그때 왜 자신이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것인지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비 맞았냐 이놈아? 뭘 혼자서 중얼거리는 거야?”
저 봐라. 툴툴거리는 말투가 영락없이 건달 아닌가.
저런 놈이 어찌 얌전히 대통령직을 수행했는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쫄았냐? 이 위대한 투신과 싸울 생각을 하니 오금이 저려 칼도 뽑기 힘들어?”
건달이라는 말도 아까운 놈이다. 딱 양아치라는 말이 적당한 놈이지.
“…미친놈.”
“흐흐. 뭐 하고 있어? 쫀 거 아니면 그 잘난 작대기 빼 들고 덤비지 않고. 어디 고명하신 검신 님의 칼침 맛 좀 보자고!”
쾅쾅.
양 주먹을 맞부딪히며 도발을 하는 꼴을 보니 저놈도 풀리지 않는 화두에 몸이 단 듯싶었다.
충분히 이해됐다.
스릉.
하지만 이해가 되는 건 이해가 되는 거고.
번-쩍!
꽈아아앙!
“구가야. 이리 오너라. 그 쓸데없는 혓바닥을 잘라주마.”
자신을 도발한 죗값을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크하하하! 좋구나! 좋아!”
주먹을 휘둘러 단천세를 박살 낸 구가 놈이 대소를 터트렸다.
“미친놈.”
나직하게 중얼거린 서태촌은 자신의 애도를 들고 구정철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일단 그 쓸데없이 크기만 한 손모가지부터 잘라 내주마.”
하지만 서태촌은 알지 못했다.
구정철을 향해 쏘아져 나가는 자신의 입꼬리에도 흥겨움이 가득한 미소가 매달려있다는 것을.
“고작 그런 쇠 작대기 하나 가지고 그게 가능할까?”
콰릉!
그렇게 두 노인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깨달음의 화두를 풀어내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