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인내의 계절 (1).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미약한 신성의 샘이라는 권능을 각인한 강현은 느리지만, 신성 스탯을 쌓기 시작했고 멈추지 않고 전용 던전을 공략했다.
아폴론에게서 배운 ‘신성력’의 마나 회로는 신성과는 전혀 연관이 없었다.
하지만 크롤러를 상대할 때는 최고의 효율을 자랑했다.
SSS급에 불과한 아폴론이 EX급의 크롤러를 무난하게 저지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것은 강현이 아공간 포식으로 잡아먹을 수 없는 세 가지 색의 아공간을 공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덕분에 공략속도가 빨라졌다.
공략을 마치고 나온 아이템 중 강현이 쓸 것을 제외한 아이템들은 대현 토털 아이템으로 전해졌고.
“왜?! 왜 일을 하는데 일이 줄지를 않는 거냐고!!”
“마나 미사일 날리면 강 이사님 죽일 수 있을까? 아니, 다치면 가져오는 아이템이 줄지 않을까?”
“아서라. 그 정도로 다칠 양반도 아니고, 상처를 입더라도 힐링 포션으로 치료하면 그만인데 뭐….”
대현 토털 아이템의 연구원들은 기쁨에 겨운 환호성을 내지르며 강현을 저주했다.
그래도 속속들이 신규 아이템을 출시하며 역시 공돌이와 자본을 갈아 넣으면 안 되는 게 없다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강현이 먹이를 물어 나르는 어미 새처럼 전용 던전을 들락거리는 동안 각국 정부들 또한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각종 묘약을 수입해 각성자 수를 늘리기 시작했고 토플란 시스템을 구매해 그 역량을 키우는 데 집중했으며.
“인류를 배신한 교단의 쓰레기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음지에서 활동 중인 교단의 신도들을 찾아내기 위한 움직임 또한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밝혀진 놀라운 사실.
그동안 민족주의와 서로 다른 이념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던 테러리스트와 무장세력들.
그동안 그들이 교단의 지원 아래 활동을 해왔다는 게 밝혀지며 각국 정부는 다시 한번 발칵 뒤집혔다.
“테러리스트! 사회를 좀먹는 그들을 박멸해야 합니다! 그들이야말로 교단과 결탁하여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12신의 하수인들입니다!”
결국, 테러 단체와 무장세력들은 원래 있던 테러리스트라는 이미지 위에 인류의 배신자라는 프레임까지 덧씌워졌다.
그렇게 자신들도 모르고 있었던 비밀을 알게 된 단체 몇몇은 내분과 구성원들의 탈주로 와해되기까지 했다.
그렇게 인류는 지구에 드리워져 있던 교단과 12신들의 영향력을 착실히 줄여나갔다.
물론 교단과 12신들이 넋 놓고 처맞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콰앙!!
“신의 이름으로!!”
각지에서 테러와 유혈 사태가 일어나고.
‘…대서양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쓰나미가 남아메리카 동부 연안을 덮쳐 현재까지 사상자 수가…….’
‘그린란드에 있던 본 드래곤이 남하하며 캐나다 북부가 사람이 살 수 없는….’
재해급 몬스터들이 움직이며 각국 정부와 군대를 압박했다.
하지만 과거에 비하면 그 위험도가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었다.
강현과 도연우를 비롯한 대한민국 각성자들에 의해 처치된 재해급 몬스터의 개체 수는 구름 가오리를 시작으로 무려 여섯 마리에 달했고.
‘배덕자 율리아, 호주 중부 맥케이 호 부근에 교단의 신전이 있다 밝혀.’
‘미국 정찰위성을 통해 신전의 흔적 발견.’
인형사부터 천마까지, 제거된 사도들만 해도 무려 일곱에 달했으니까.
그렇게 삼 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인류는 여전히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지만, 자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절을 흘려보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구름 가오리의 폭주, 욱일회의 테러, 거기에 천마가 만들어낸 강남 대참사까지 지난 일 년간 수많은 부침을 겪어야 했던 도시.
아직 천마가 만들어낸 파괴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는 강남의 한복판에 거대한 건축물이 완공됐다.
정부가 승인하고 10대 그룹과 10대 길드 주도하에 불과 3개월 만에 완공된 이 건물은 국제 워프 게이트 터미널(International Warp Gate Terminal)이었다.
그리고 오늘.
수많은 시민과 기자들이 몰려있는 입국 게이트 앞으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왔다!”
“할러웨이 국무 장관님! 82년 만에 최초로 한반도 땅을 밟은 외국인이 되셨는데 소감이 어떠십니까?”
“이번에 설립될 국제 연합(United Nations)의 목적이 단순히 교단과 12신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알아듣지도 못하는 언어로 폭풍처럼 질문을 쏟아내는 기자들의 모습에 당황스럽기도 하련만 할러웨이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수행원들과 함께 터미널을 빠져나갔다.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버린 할러웨이에 기자들이 실망한 것도 잠시, 기자들의 눈은 다시 한번 반짝였다.
“영국 윌리엄 국무장관이다!”
또 다른 먹이가 나타났으니까.
아무런 대답 없이 가버리면 어떠랴.
속속들이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세계 각국의 대표들을 향해 기자들이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 고스란히 방송국 카메라에 의해 전파를 탔고.
그 방송을 지켜보던 이들의 가슴속에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세계 유일의 국제 워프 게이트 터미널을 보유한 국가.
고대에 로마 제국이 유럽을 지배하며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을 만들어냈듯이 지금 모든 길은 대한민국으로 연결되었다.
82년 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던 동아시아의 약소국이 세계의 중심에 서는 순간이었다.
***
대한민국에 모여든 세계 50여 개 국가의 대표들.
표면적인 이유로는 교단과 12신에 대항하기 위한 국제 연합 창설을 내걸었지만, 그들이 이곳이 모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정말…. 엄청나군요…….”
경기도 화성시.
그곳에 있는 대현중공업의 메가 팩토리를 방문한 각국 대표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정말로 우주 전함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물체.
하얀색으로 도색된 날렵한 선체는 그 길이만 500m에 폭은 80m가 넘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다.
“지금 보고 계시는 전함이 1호기인 풍백이며 2호기 조립에 필요한 부품들도 전국 각지에서 제작 중이니 2호기인 운사도 조만간에 이곳에서 조립될 겁니다.”
국가 기밀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정보를 친절하게 브리핑해 주는 국방부 장관의 말에 옆에 있던 프랑스 대표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전함을 우리에게 판매하겠단 말입니까?”
“전함 자체를 판매한다기보단 설계 및 생산기술을 판매한다고 보시는 게 맞을 듯싶습니다.”
“그 말이. 그 말 아니요…. 이런 전함의 설계도와 생산기술을 이전해 준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그의 의문은 당연했다.
이 전함만 수십 대 만들어낸다면 세계정복도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전함의 설계와 생산기술을 이전해 주겠다니 이해가 되지 않을 수밖에.
그때 등 뒤에서 굵고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우리 앞에 공동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단한 체구에 선이 굵은 얼굴을 한 장년인.
“오셨습니까? 대통령님.”
국방부 장관이 인사를 하자 풍백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던 각국 대표들의 시선이 대통령에게 쏠렸다.
그 시선을 한몸에 받은 대통령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우리 인류는 지금 생존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과거에 무수했던 민족 혹은 국가 간의 싸움이 아니라 외계신이라는 전무후무한 적과의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대통령은 각국 대표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쳤다.
“일개 국가와 민족의 갈등이 아닌 인류의 생존 그 자체가 걸린 문제이니 최신기술이라고, 군사기밀이라고 꽁꽁 싸매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와 눈을 마주친 이들 중 일본 대표와 중국 대표의 눈이 바닥으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각성자 센터 테러를 일으킨 욱일회는 일본 제국주의를 추종하는 무리였고.
강남 대참사를 일으킨 천마는 중국의 각성자였기 때문이다.
교단과 십이사도들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며 책임을 회피하기까지 했던 두 나라였는데.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그런 나라에까지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니 아무리 얼굴이 철면피라 해도 뻔뻔하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흠. 말발이 좀 먹힌 듯싶군.’
그런 두 나라 대표들의 얼굴을 확인한 대통령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까먹은 국방예산을 채울 수 있겠어.’
전함 한 대 만드는 데 무려 10조 원의 예산이 들어갔다.
그런 것을 무려 세대나 만들려니 허리가 휠 지경이었는데 설계도와 생산기술을 이전해 주면 구멍 난 예산을 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판매하겠다고 말했으니 거짓말한 건 아니지. 뭐.’
대통령은 전함 내부를 둘러보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각국 대표들의 뒤통수를 보며 생각했다.
‘얼마나 받아낼 수 있을까?’
뽑아먹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뽑아먹을 생각이었다.
전함의 설계와 기술 이전 비용이 싸다곤 말한 적 없으니까.
“그나저나 이거 신통방통하구만. 이것도 대현에서 만든 거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는 대통령.
그곳엔 지름 1㎝ 정도의 작은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네. 대현 토털 아이템에서 출시한 통역 마법 스티커입니다.”
“저 전함도 그렇고, 평택에서 만들고 있는 ‘그것’도 그렇고, 정말 대현 그룹에서 외계인 고문하고 있는 거 아니야?”
대통령의 말에 비서실장이 가만히 생각해보더니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계신이 침략해 오는 마당에 외계인이 없으란 보장은 없으니까.
“한번 조사해 볼까요?”
“놔둬. 외계인을 고문해서라도 그 빌어먹을 신들을 쳐낼 수 있으면 된 거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현 그룹의 진실에 접근한 대통령과 비서실장이었다.
물론 고문 같은 건 없이 거래라는 이름의 사기를 치고 있었지만.
***
“어…. 너 안 본 사이에 많이 컸다?”
난 오랜만에 만난 해찬이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와-. 형. 길드도 그렇고 저한테도 너무 무관심하신 거 아니에요? 제가 A급 단지가 언젠데….”
오랜만에 들른 길드 사무실. 해찬이는 그새 A급 각성자가 돼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대충 4개월 전.
그사이 간간이 길드 운영상황에 대해서 보고를 받긴 했지만 직접 만나는 건 딱 그 정도 만이다.
“A급 언제 달았는데?”
“3개월 전이요.”
“그렇게 빨리 달았어?”
내가 놀라서 되묻자 믹스 커피 한 잔을 내 앞에 내려놓은 녀석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하…. 형이 저한테 그런 말 하는 건 기만 아닌가요? 형은 각성한 지 1년 만에 SS급 되셨잖아요.”
“어떻게 알았어?”
“신문이고 방송이고 온통 형 이야기뿐인데 어떻게 몰라요. 좋으시겠어요? 세기의 천재를 뛰어넘은 천천재이시라서.”
“천천재? 그건 또 뭔 말이야?”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요. 모르셨어요? 요즘 다들 형을 그렇게 부르던데.”
며칠 전 각성자 센터에서 승급심사를 봤는데 그게 그새 기사화된 모양이다.
하여간 이놈의 동네는 비밀이 없어요. 비밀이. 각성자 정보 보호법은 개똥이지. 아주.
기분이 안 좋았다.
왜냐고?
솔직히 SSS급 정도는 됐을 줄 알았거든.
아공간도 열나게 청소하고 보상으로 받은 스탯도 알뜰히 분배했는데 난 여전히 SS급이었다.
석 달 전하고 바뀐 건 늘어난 스탯과 보상으로 받은 아이템 중 쓸 만한 것 몇 개가 고작이었다.
‘확실히 내가 그동안 시스템으로 너무 꿀 빨긴 했지….’
그동안 레벨업이고 승급이고 걸림돌 하나 없이 쭉쭉 달려서 SS급에 닿았다.
해찬이는 1년 만이라고 했지만, SS급에 올라선 건 3개월 전이었으니 각성한 지 9개월 만에 SS급을 단 거다.
그리고 3개월 동안 성장이 멈춰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성장은 하고 있지만, SSS급으로 가는 길이 너무 멀고 험난하달까?’
이 고민을 연우 형에게 말했더니 연우 형은 날 미친놈 보듯 쳐다봤다.
다른 각성자들 앞에서 그딴 소리 하면 언제 등 뒤에 칼 맞을지 모르니까 입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젠장. 레벨업 노가다하는 사람의 고충을 너무 몰라준다.
‘자기들은 승급만 하면 스탯 뻥튀기되면서….’
그렇게 지난날의 기억을 곱씹고 있을 때 해찬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웬일로 사무실까지 오셨어요?”
아 맞다. 나 지금 이 녀석과 대화 중이었지.
나는 녀석이 타다 준 믹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입을 열었다.
“너. 승급하는 데 토플란 시스템 덕 좀 봤지?”
“뭐, 그렇죠? 확실히 목숨이 걸린 상황이 아니다 보니 이것저것 색다른 시도를 해볼 수 있더라고요. 단계를 클리어할 때마다 지급되는 스탯 포인트도 쏠쏠하고요.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해찬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나랑 일하나 하자.”
“에…. 일이요?”
그리고 녀석을 낚기 위한 미끼를 던졌다.
“너, 내가 S급 만들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