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우주 난민.
광속을 넘어선 속도로 순식간에 내 앞에 도달한 수십 대의 샤이닝 세이버.
-전뢰화 [유지시간: 00분 11초]
전뢰화의 남은 시간은 10초 남짓이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내가 두 주먹을 틀어쥐고 플리피인들에게 선물할 뇌전 다발을 만들어내고 있을 때였다.
‘사령관님. 플리피 측에서 대화를 요구해 왔습니다.’
씨드의 말에 나는 가만히 눈동자를 데구륵 굴렸다.
마치 호위기사처럼 내 앞을 막아선 아폴론.
‘이것도.’
그리고 머리 위에 떠서 날카롭게 빛나는 샤이닝 세이버.
‘저것도. 허락 없이 꿀꺽했는데 나랑 대화하겠다고?’
마음 씀씀이가 좋은 것인지, 아니면 대적 불가의 적이라 판단하고 지레 포기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더 피 볼 일이 없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내가 뭐 사람 죽이는 거 환장하는 학살자도 아니고.
‘좋아. 해 보자. 대화.’
그래서 나는 그들의 대화 요청에 응했다.
절대. 아폴론과 샤이닝 세이버를 탈취한 게 미안해서 대화에 응한 건 아니다. 진짜로.
***
“어…. 그래서. 지구에 정착하고 싶다고요?”
나는 눈앞의 사내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그대에게 선공했던 우리가 할 말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소.”
민망한 듯 볼을 긁적이던 난쟁이가 다시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소행성의 폭격을 피해 플리피를 떠난 지 벌써 천 년. 우리는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유랑생활에 지쳐 있소이다. 낯부끄러운 말이지만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오.”
놀라웠다.
어떻게 신장이 2㎜에 불과한 이가 이처럼 거대해질 수 있는 거지?
자신을 국가대회의 의장이라고 밝힌 사내는 놀랍게도 내 무릎에 닿을 정도로 몸을 키운 상태였다.
마법이라고 해도 놀랍고, 마도 과학이라면 꼭 배우고 싶은 기술이었다.
“…그대. 내 말을 듣고 있는 것이오?”
잠시 플리피인의 마법과 마도 과학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나를 일깨운 건 여전히 근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의장이었다.
“아. 물론이죠. 경청하고 있습니다.”
미심쩍은 눈으로 흘깃 바라보던 의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 양반 이름이 뭐라 그랬더라?
엘류온? 엘프? 뭐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체구는 작지만 잘생기긴 겁나게 잘생겼다.
“큼.”
넋을 잃고 그 찬란한 외모를 감상하던 내 귓가에 의장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아. 실례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씀이시라.”
“…괜찮소.”
플리피인들이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이 빌어먹을 아공간에서 빠져나가 인공 태양이 아닌 진짜 태양을 마주하는 것.
애초에 이 아공간을 만든 이유가 그것이었단다.
소행성 충돌로 산산조각이 나버린 행성 플리피.
플리피인들은 해성의 충돌을 막기 위해 모든 마도 과학을 총동원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패했다.
소행성을 폭파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잔해물들이 플리피를 덮쳤고.
말 그대로 미티어 파티가 시작됐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네, 우주에서 쏟아지는 운석의 비라니.’
쏟아져 내리는 미티어 샤워 속에서 플리피인들은 인류와 문명을 보존할 방법을 찾았고.
그것이 바로 지금 내가 들어와 있는 이곳.
아공간 방주 노아(NOAH)였다.
아공간을 방주로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정말 인간의 상상력이란 대단하구나 싶었다.
“…광속의 열 배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 내부에 아공간을 장착하고 우리가 살던 대지 일부를 뜯어내 아공간 안으로 옮겼소. 그리고 플리피를 탈출했지.”
엘류온의 얼굴엔 깊은 회한이 서려 있었다.
“수십 대의 방주가 우주로 향했고 우린 생존했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지.”
문제는 아공간을 싣고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가던 우주선이 소행성대를 지나다 파괴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다른 방주와 연락이 끊기고, 기체 고장으로 아공간을 열 수 없게 되면서 우린 이 안에 갇히게 된 거요. 급조된 피난계획의 폐해였소….”
그렇게 그들은 아공간에 갇히게 되었고 흐르고 흘러 내 전용 던전까지 오게 된 거다.
나는 그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했다.
순진한 건지 순수한 건지 이들은 내가 ‘검은 어둠’을 처치한 순간부터 내가 아군일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긴 처음 씨드에게 플리피인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도 놀라긴 했었지.
‘세상에 살인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종족이라니.’
거기다 사회적인 계급의 차이도 없단다.
우리식으로 치면 대통령이라 볼 수 있는 국가대회의 의장이라는 직책도 봉사직이라니 말해 뭐하랴.
이건 뭐 상상 속에 존재하는 이상향도 아니고.
이들에게 전쟁은 오직 몬스터를 사냥할 때를 말하는 것이란다.
“그대는 우리 필리피인들에게 천년 만에 온 탈출 기회요. 부디 우리를 도와주시겠소?”
그 간절한 목소리에 나는 해맑게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이건 뭐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것을 넘어 숫제 요리까지 끝내서 입속으로 떠먹여 주는 격이니 어찌 마다하랴.
플리피인들이 만들어낸 찬란하고 아름다운 고차원적인 마도 문명.
그것이 내 손아귀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
아공간 청소를 마치고 나온 나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드론에 몸을 실었다.
플리피인들은 어떻게 했냐고?
땅덩어리 고대로 내 인벤토리에 담았다.
그간 수천 개의 아공간과 인벤토리를 포식한 내 인벤토리는 이미 나도 그 넓이를 제대로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해져 있었기에 고작 지름 100m밖에 안 되는 땅덩어리 하나 담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누굴 만나러 가는 중이냐면….
“그래. 그간 조금 격조했지? 그동안 잘 지냈는가?”
호랑이를 만나러 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그간 별일 없으셨습니까?”
“관짝에 못 박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가 별일 있을 게 뭐 있을꼬. 그냥 사는 게지.”
말을 저렇게 하지만 여전히 눈빛은 부리부리하다.
과연 대현의 호랑이랄까?
“그래. 요즘 여기저기서 자네 이름이 많이 들리던데, 무슨 일로 귀한 걸음을 하셨는가? 혹시 사업 이야기인가?”
오랜만에 만나서 사담을 나눌 만도 하건만 강 회장님은 처음부터 몸속 깊이 돌직구로 찔러 들어왔다.
덕분에 나는 이야기를 꺼내기 편해졌다.
“어…음, 혹시 땅 가진 것 좀 있으십니까?”
“흠. 땅이라…. 있지. 있는데…….”
그르렁거리는 것처럼 말끝을 흐리던 호랑이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 눈을 직시했다.
“그냥 땅이 필요했으면 부동산을 찾아갔을 테고, 그런데도 나를 찾아왔다는 건 그저 땅이 필요해서가 아닌 것 같은데…. 맞나?”
관짝에 못 박을 날만 기다린다더니 그 관짝이 내 관짝이었습니까?
눈빛이 후덜덜하다.
“먼저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탁.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샤이닝 세이버 한 기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갑자기 검 비스무리한 것을 꺼내자 강 회장님 등 뒤에 서 있던 황 집사가 움찔했지만, 강 회장님이 한쪽 손을 살포시 들어 올리자 곧 멈췄다.
역시 호랑이다. 카리스마가 아주 끝장나.
“호오…. 이것이 무엇인고? 손잡이가 없는 걸 보면 쥐고 휘두르는 무기는 아닌 듯싶은데.”
눈앞에 날카로운 검 비스무리한 것이 놓여 있음에도 강 회장님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대단한 강심장이다. 아니면 그만큼 나를 믿는 것일지도.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우우웅.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샤이닝 세이버가 공명음을 내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혹시 MC 캠의 무기 버전….”
그것을 본 강 회장님이 눈을 반짝일 때였다.
“헛!”
“헐….”
갑자기 허공에서 똑 떨어져 내린 난쟁이를 본 두 사람이 놀라 눈을 치켜떴다.
어허! 황 집사님 칼 집어넣어요! 우리 편이에요. 죽이면 큰일 납니다!
순간적으로 칼을 빼든 황 집사였지만 다행히 휘두르지는 않았다.
탁.
나직한 발소리와 함께 탁자 위로 내려선 난쟁이, 엘류온은 강 회장님을 바라보곤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엘류온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놀란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강 회장님.
“이것, 아니. 이 친구…. 이 존재는 뭔가?”
아. 통역.
내게 언어의 마법사 스킬이 있기에 강 회장님이 플리피어를 알아들을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간과했다.
“저분이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물론 엘류온도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했고.
‘내가 통역을 해야 하나? 아니면 씨드를 이용해 뇌파 통신으로 대화하도록 해야 하나?’
그런 내 고민을 알아챈 것인지 엘류온은 싱긋 미소를 짓더니 조용히 마법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다시 황 집사가 움찔하긴 했지만 이내 멈췄다.
저 양반. 정말 경호 하나엔 진심인 양반이다.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필리피인들을 대표하는 국민대회의 의장 엘류온이라고 합니다.”
“어? 한국어를?”
내가 놀라 그를 바라보자 엘류온이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통역 마법입니다.”
와. 9 클래스의 대마법사라더니 저런 것도 가능한가 보다.
하긴, 지금 저렇게 크기를 키운 것도 폴리모프라는 마법이라고 했으니 통역 마법 정도야….
배울 게 또 하나 늘었다.
“허. 허허허. 이 늙은이가 놀라 결계를 범했소. 나는 강산호라고 하오.”
정중히 인사를 하면서도 번뜩이는 눈빛을 보니 강 회장님도 돈 냄새를 맡으신 모양이다.
역시 사업은 사업가에게 맡겨야지, 어설프게 내가 건드려선 안 된다.
이제 강산호라는 전문가가 저 우주 난민들을 받아주는 조건으로 뽑아먹을 수 있는 건 전부 뽑아낼 거다.
***
강산호 회장과 엘류온.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시간은 고작 30분이 한계였다.
그건 엘류온이 플리피 땅을 벗어나 버틸 수 있는 시간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플리피 땅이 같은 차원에 존재한다면 체류 가능 시간이 지구 시간으로 한 달 정도 된다던데 아공간은 아무래도 다른 차원이라 한계가 더 빨리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럼 남은 이야기는 통화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친 엘류온이 다시 내 인벤토리 안으로 돌아가고.
“허허허. 역시 자네는 날 실망시키지 않아. 이번에도 꽤 재미있는 사업 아이템을 가지고 왔구만. 껄껄-.”
강 회장님은 뭐가 그리 좋은지 나를 보며 대소를 터트리셨다.
왠지 카리스마가 더 늘었다 했더니 강 회장님 몸속에서 마나가 느껴졌다.
D급 정도?
아마도 묘약 세트를 드신 모양이다.
그러면서 관짝에 들어가니 마니 하시다니 참 나쁜 영감님이시다.
“그래.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 볼까? 얼마나 원하나?”
“5대5 어떻습니까?”
“거간꾼치곤 너무 많이 뜯어간다는 생각 안 하나? 8대2. 내가 8일세.”
“글쎄요. 전화번호 몇 개 주고 700억 떼가신 분보다는 양심적인 비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현 그룹의 미래먹거리를 선물 보따리째로 들고 왔지 않습니까. 6대4로 하시죠?”
“허허허. 좀생이처럼 이미 끝난 거래를 이제 와서 들이미는 건가? 7대3.”
내 말을 들은 강 회장님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거간 비로 충분하지 않나? 흥정은 그만했으면 하는군. 어차피 공장을 세우고 아이템을 연구해 만들어내는 건 다 대현에서 할 것 아닌가.”
“흐흐. 그렇게 하시죠.”
애초에 많이 먹을 생각도 없었다.
공장을 만들고 아이템을 연구하고 생산해 내는 것 모두 사람이 필요한 일이다.
사업이라곤 경매장 하나와 길드 하나 만들어 본 게 전부인 내겐 어차피 무리다.
그마저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레벨업하기 바쁜데 이제 와 새로운 사업이라니 안 될 말이지.
‘지아에게 맡길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너무 늦어.’
언제 신이란 것들이 강림해 깽판을 칠지 모르는 마당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이것으로 우리는 교단과 신들을 상대할 새로운 카드를 손에 넣었다.
물론 그 카드를 사용하기 위해선 시간이 더 필요할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