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신살(神殺) 병기 (3).
상대해야 할 적의 진짜 정체를 알았으니 공략할 방법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아공간 청소부와 아공간 조작.
지금껏 크롤러를 상대할 때 만능 치트키처럼 사용되어 왔던 특성들이다.
물론 사용법을 익히는 과정에서 피도 좀 보고 세포 하나하나가 뜯겨나가는 것 같은 고통도 느껴야 했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과거니 접어두자.
문제는.
‘과연 저 녀석에게도 그게 통하느냔데….’
디뷰에이프라는 최강의 갑옷을 두르고 있는 ‘검은 어둠’에게 내 특성이 적용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신의 권능으로 만들어낸 만뢰마저도 ‘후루룩 짭짭’ 흡수해버린 디뷰에이프이니 내 특성 정도야 입가심 거리도 되지 않겠지.
-특성: 아공간 조작 S (LV2) 가 발현됩니다.
-대상을 지정해 주십시오.
-대상 지정에 실패했습니다. 아공간 조작 특성이 취소됩니다.
지금도 봐라. S급 특성을 날파리처럼 튕겨내지 않는가.
왜 리퍼는 되고, 디뷰에이프는 안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나도 모르겠다.
‘대상의 차이인가?’
그저 SS급에 불과한 욱일회주의 몸뚱이에 강림했던 리퍼와 신급 신살 병기인 디뷰에이프 안에 똬리를 튼 검은 어둠의 차이 정도로 이해할 뿐.
반신급 영혼이 담긴 깨진 사기그릇과 역겨운 쓰레기를 담아놓은 아다만티움 휴지통 정도의 차이랄까?
리퍼의 강림을 해제하는 데 필요했던 건 깨진 사기그릇을 부수는 일이었지만, 검은 어둠을 소멸시키려면 아다만티움 휴지통을 부숴야한다는 것이다.
한숨이 다 나오네. 시발.
디뷰에이프라는 사상최강의 휴지통을 어떻게 부숴야 할까 하는 생각에 골머리를 썩일 무렵.
‘저건 왜 아까부터 움직이지도 않고 저렇게 멍하니 서 있는 거야?’
도시의 중앙.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순백의 로봇이 눈에 들어왔다.
결전 병기 아폴론.
플리피인들이 만들어낸 마도 과학의 결정체.
‘저거…. ’검은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했지?’
갑작스럽게 든 의문.
플리피인들은 고작 SSS급에 불과한 아폴론을 가지고 어떻게 디뷰에이프를 상대하려 했던 걸까?
아니, 어떻게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걸까?
무려 신살 병기라 불리는 이 괴물에게서.
그때 머릿속에 한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검은 어둠을 막아내던 푸른 보호막.
그것이 사라지자 아폴론이 만들어냈던 우윳빛 보호막.
‘분명 플리피인들은 크롤러를 막아내고 있었어.’
교룡의 외피로 만들어지고 겔로드 족의 탈모제로 강화되었던 씨드의 외장갑마저 부식시켜버리던 그 강력한 공격성.
거의 모든 방어구를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던 그 놀라운 특성을 생각해보면 정말 놀라운 마도 과학 기술이 아닐 수 없었다.
‘결전 병기를 만들어낸 걸 보면 디뷰에이프와 싸울 준비도 해왔던 것 같고….’
지금은 동상처럼 멍청히 서 있지만 아까 나를 공격할 때를 떠올리면 전투 AI 아폴론이라는 것도 성능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확실히 탐났다.
‘어차피 내가 이 녀석을 처리하면 저 로봇은 쓸모가 다한 거 아닌가?’
검은 악마를 처리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녀석이니 내가 디뷰에이프와 크롤러만 처리한다면 그 효용은 다한 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내 생각이다.
플리피인들 생각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생각을 정리한 나는 씨드에게 뇌파 통신을 보냈다.
‘씨드. 저 로봇 제어할 수 있겠어?’
멍텅구리가 되어있는 로봇, 결전 병기 아폴론을 제어할 수 있겠느냐는 내 물음에 씨드는 마지못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재 해당 기체는 전투 AI 아폴론에 의해 제어되고 있으며 아폴론은 플리피 의회의 의원들 통제에 따릅니다.’
역시 말이 길어진다.
나는 씨드의 말이 길어지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굳이 구구절절하게 내게 설명할 필요 없어. 제어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만 말해.’
능동형 AI 씨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씨드는 플리피인들이 만들어낸 최초의 인공지능이다.
그 말은 저기 멍텅구리처럼 서 있는 전투 AI 아폴론의 조상 격이란 말이었다.
내 말은, 씨드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세대를 거치며 진화하고 발전해왔을 인공지능 중 하나인 아폴론을 제거하고 저 결전 병기를 차지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고.
‘…….’
씨드는 당연히 망설였다.
우리 씨드, 처음엔 명령만 내리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실행했던 녀석인데 지구 생활 몇 개월 만에 사람이 다 됐다.
저렇게 감정에 휘둘리다니.
‘씨드, 망설일 시간 없어. 지금 디뷰에이프를 처리하지 못하면 나는 물론이고 네 고향의 마지막 남은 피난민일지도 모를 플리피인들도, 저 아폴론이라는 AI도 살아남지 못해.’
‘제가 사령관님을 도와드리면….’
하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
나는 씨드에게 다시 한번 현재 상황을 알려줬다.
녀석도 잘 알고 있지만 외면하고 싶었을 현실을.
‘네가? 무슨 수로?’
‘…….’
솔직히 어느 순간부턴가 씨드는 전투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씨드가 전투 외에 많은 분야에서 나를 서포트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지금은 서포터로서의 씨드가 아니라 직접 전투에 참여해 나를 도울 아군이 절실할 뿐.
그리고.
‘지금 아니면 씨드의 스팩을 업그레이드할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몰라.’
언제까지 씨드를 샤이닝 에로우에 묶어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씨드의 추측대로 플리피 행성이 멸망했다면 마도 과학 문명을 이룩하고 있는 플리피인들을 만난 지금이 그 마지막 기회라는 뜻이었으니까.
플리피보다 더욱 발달한 마도 문명을 찾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시 짧은 망설임의 시간이 지나고.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힘든 결정 내려줘서 고맙다 씨드.’
뭔가 많은 감정이 담긴 씨드의 대답을 들은 나는 다시 디뷰에이프에게 집중했다.
알겠다고 대답했으니 저 로봇은 씨드가 알아서 할 테지.
씨드가 로봇을 획득하는 건 차선책일 뿐.
가장 베스트는 나 혼자서 이 상황을 정리하는 거다.
***
틱! 톡!
시간이 흘러갔다.
-전뢰화 [유지시간: 01분 19초]
1년과 같은 1초가 쉼 없이 흘러 남은 시간은 고작 1분 19초.
그 길고 긴 시간 속에서 안 해 본 것 없이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론은 현상 유지였다.
빌어먹게도.
디뷰에이프의 껍질을 뒤집어쓴 크롤러를 소멸시킬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러다가 정말 뭣 될 판인데….’
결전 병기 아폴론을 제어하겠다던 씨드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저쪽도 사정이 녹록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지난 세월 동안 진화한 AI만큼 그 보안도 강화되었을 테니. 초기 인공지능인 시드가 단번에 그 보안을 뚫는다면 그것도 이상할 일이었다.
물론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7분이 넘는 시간 동안 보안을 뚫지 못한 것은 의외였지만.
‘창천국이 관리하는 마도 위성을 모두 탈취하는 데도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는데…. 그만큼 보안을 뚫기 힘들다는 건가, 아니면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 건가?’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전뢰화 덕분에 내 뇌기 스탯은 미친 듯이 성장했고 뇌전일체 스킬 또한 그 한계점을 돌파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 정도.
그래 봐야 권능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 당장은 별 도움도 안 되었지만.
‘하아-. 크롤러를 아공간 조작 대상으로 지정할 수만 있어도 이렇게 고민할 필요 없는데.’
한숨을 푹 내쉰 나는 다시 한번 전뢰화의 유지시간을 확인한 후 디뷰에이프를 바라봤다.
빠지지직!
우우우웅-.
덫에 걸린 맹수처럼 사납게 날뛰는 녀석 덕에 뇌전으로 만들어진 채찍이 끊어졌다가 이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나마 전뢰화를 사용 중이라 놈을 제압해 둘 수 있지만, 유지시간이 끝나면 어찌 될지 몰랐다.
‘아마 미쳐 날뛰는 맹수와 육탄전을 벌여야 하겠지.’
디뷰에이프란 단단한 껍질 속에 숨어 난리부르스를 추고 있는 크롤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놈을 대상으로 사망 선고를 사용해 봤지만 실패했다.
권능이 통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신성 스탯이 부족해서.
‘천마한테 사망 선고를 사용한 게 이렇게 타격이 올 줄 몰랐네. 젠장.’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정답이 없는 시험지를 받아들고 끙끙거리는 수험생처럼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사령관님.’
뇌파 통신을 통해 씨드의 목소리가 아닌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지 모르게 단단하고 묵직한 느낌의 목소리.
설마 역으로 잡아먹힌 거냐?
씨드가 아폴론이란 전투 AI에 흡수당한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 때였다.
‘능동형 전투 AI 아폴론입니다. 명령을 내리시겠습니까? 사령관님?’
명령을 원하는 아폴론의 목소리에 이어 친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마스터 코드를 재설정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다.
원래 제거보다 회유가 힘든 법이다.
그런데 씨드는 마스터 코드의 보안을 뚫고 재설정하는 방식으로 아폴론을 부하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림짐작으로도 그게 절대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은 알 수 있었다.
대단한 녀석이다.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저 거대로봇을 운영프로그램이 없는 제가 제어하는 것보다는 이 방법이 사령관님께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씨드에게 멋진 몸을 선물해(?) 주지 못한 건 조금 아쉽지만,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결국, 씨드는 로봇을 가지고 싶다는 소박한 내 욕심을 간파하고 거대로봇을 내게 귀속시킴과 동시에 자기 후손이라고 볼 수 있는 아폴론도 살리는 길을 찾아낸 것이니까.
그리고 다시 이어진 씨드의 말은 미약하게 남아있던 아쉬움이란 감정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새로운 우주 전함을 획득했습니다. 사령관님.’
‘새로운 우주 전함?’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새하얀 검 한 자루.
정확히는 손잡이 없는 날카로운 검 모양을 한 우주 전함이었다.
어찌나 그 움직임이 빠른지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새하얀 잔상만 눈으로 쫓았을 뿐 나조차도 제대로 된 대응을 못 했다.
‘우주 전함 샤이닝 세이버입니다.’
이름도 멋있었다.
***
이후 이어진 싸움은 허무하리만치 싱겁게 끝났다.
결전 병기 아폴론.
크롤러를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이 로봇은 플리피인들이 수천 년 동안 쌓은 마도 과학의 결정체라 봐도 무방했다.
제조에 걸린 시간만 무려 300년이란 말에 기함했지만, 그것이 플리피 행성의 시간을 기준으로 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플리피의 1년이 지구의 30일보다 조금 긴 정도라고 하니까.
‘아. 그래서 디뷰에이프를 어떻게 처리했냐고?’
아폴론이 운용했던 새하얀 마나.
아폴론은 신성력이라 부르던 그 마나의 운용법을 내가 배웠다.
아폴론을 통해 공격을 해봤지만, 디뷰에이프가 대가리를 흔들어서 이리저리 피해버리더라.
덕분에 나는 느려진 시간 속에서 꼬박 1분을 마나 회로를 익히는 데 써야 했고.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채찍을 디뷰에이프의 두 눈에 꽂아 넣는 것으로 싸움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싸움이 끝나자 크롤러의 갑옷 역할을 하고 있던 디뷰에이프는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 정말 보람찬 하루였다.’
로봇 따까리에 새로운 우주 전함도 얻고 거기에 신성력 마나 회로까지 얻었다.
‘거기에 아직 확인도 하지 않은 특수 퀘스트 보상까지 생각하면 안 먹어도 배부르네. 흐흐.’
디뷰에이프가 사라져 버린 건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게 기뻐하는 것도 잠시.
‘저건 또 뭐야?’
지름 100m 남짓한 코딱지만 한 땅덩어리 플리피 시티.
새하얀 건물들 사이에서 순백의 검들이 떠올라 내게 날아오고 있었다.
‘2차전이냐?!’
우주 전함 샤이닝 세이버.
씨드가 탈취한 한 기가 전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