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177화 (176/202)

177. 인류의 배신자들 (2).

신도들 틈에 섞여 서태촌, 구정철 등을 지켜보고 있던 율리아는 강현이 진을 해제하고 모습을 드러내자 암담함을 느꼈다.

‘천마가 패했어?’

교단 내에서 천마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혹자는 천마가 신의 선택을 받아 초월자가 되었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가 이미 반신의 경지에 이르러 신들과 함께 신계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그를 시기하는 자들은 천마가 주제를 모르고 설치다가 신벌을 받아 죽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건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랬다면 무신의 영역이었던 중국을 다른 신들이 그대로 놓아둘 리 없었으니까.

25년 전 은거를 했다는 천마.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그는 무신의 사도가 되자 은거했고 그가 초월자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교단 내에서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런 천마가 죽었다.

각성한 지 일 년도 안 된 풋내기 헌터 나부랭이에게.

‘초월자의 경지에 올랐다는 천마도 죽음의 권능 앞에 한낱 인간일 뿐이라는 건가?’

시커멓게 탄화되어 널브러져 있는 숯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신들이 오판한 걸지도 몰라.’

드러난 결과만 본다면 강현은 그녀가 상대했던 도연우보다 강하다.

이번 작전은 강현의 죽음과 천마의 생존을 염두에 두고 계획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천마가 죽고 강현이 살아 돌아왔다면 시작부터 계획은 틀어졌다고 보는 게 맞았다.

힐끗.

주변을 둘러보자 신도 사이에 섞여 있는 다른 사도들도 난감한 듯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꼬인 것 같은데 이대로 퇴각하는 건 안 되겠죠?”

인이어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

숲과 짐승의 신의 사도 카를로스였다.

“그럴 수 없습니다. 신의 명은 지엄한 것, 사도 된 자로 신의 명을 거역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침묵하는 겨울의 신의 사도 제슈프.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카를로스의 의견을 반대했다.

“그럼 교단으로 돌아가서 신들께 보고하는 건? 신께서도 이 상황을 알게 되시면 퇴각을 허락해 주실걸?”

하지만 이어진 엘레나의 말에 제슈프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신의 사도라더니 저 얼음덩어리도 녹여버린 모양이었다.

“그럼 누가 가서 신께 보고할래?”

여기서부터는 눈치싸움이다.

모든 사도가 전장을 비울 수는 없으니 한 사람 혹은 두 사람만 가야 하는데 율리아는 정말 이곳에 남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신들의 강림 후 펼쳐질 영광된 미래를 살고자 사도가 된 것이지 자살특공대가 되어 죽고자 사도가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너무 나무라지 말게. 지아 양이 아니었다면 도 길드장의 상세가 이렇게 호전되지도 못했을 테니.”

“…그렇습니까?”

서 영감님의 말에 조막만 한 머리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맘 같아서는 딱밤이라도 한 대 먹이고 싶지만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었으니 나무랄 수도 없었다.

연우 형을 진법 밖으로 데리고 나올 땐 그렇게 상태가 심각한 줄 몰랐는데.

‘아직 정신을 못 차릴 정도면 정말 상태가 안 좋았었나 보네.’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걱정하는 걸 보면 꽤 심각한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이 작자들은 대체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군. 이젠 그냥 한번 붙어보고 싶을 정도야.”

퉁명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구 영감님이었다.

당장이라도 적들을 향해 달려나갈 것처럼 근육을 꿈틀거리는 것이 한 마리의 성난 황소를 보는 것 같았다.

“좀 기다리게. 도 길드장을 저대로 두고 싸움을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걸 말리는 것은 당연히 서 영감님의 몫.

서 영감님이 아니고서야 저 고삐 풀린 황소를 제지할 수 있는 이는 이곳에 없었다.

“언제까지? 저놈들이 준비를 마치고 수만 개가 될지도 모르는 스킬을 우리한테 쏟아낼 때까지?”

“우린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이 친구야.”

연우 형 곁에 몰려 있는 백의 사제단을 흘끔 바라본 구 영감님이 팽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위대한 초인이라도 눈먼 화살을 피할 수는 없는 법.

이대로 전투가 벌어지면 저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기에 보인 반응이었다.

“그 문제라면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음?”

“저한테는 아공간이 있잖아요. 좀 답답하긴 할 테지만 그 안에 들어가 계시면 전투에 휩쓸릴 일은 없죠.”

내 말에 구 영감님이 반색하면 손뼉을 쳤다.

“옳지. 그런 방법이 있었구만!”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어. 내 저 친구들 의견을 물어보고 오겠네.”

백의 사제단.

분명 유명한 힐러 연합이었다.

하지만 SS급과 그 이상의 괴물들이 판치는 전투에서 무탈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전투에 참여한다고 해서 도움이 될지도 미지수이고.

백의 사제단 단장의 등급이라고 해봐야 S급에 불과했으니까.

‘겸사겸사 지아도 같이 들어가라고 하면 되겠지.’

물론 내게 중요한 건 동생의 안전이었지만.

잠시 후.

분리해낸 아공간 안으로 백의 사제단과 연우 형을 밀어 넣었다.

상황이 안 좋다는 걸 아는 지아도 군소리 없이 그들의 뒤를 따라 아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자-. 이제 한판 붙어볼까?”

우득.

동네 건달처럼 목을 꺾으며 앞으로 나서는 저 사람이 대한민국 전 대통령이라니.

백색의 결계가 마도 위성과 드론들을 막아준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대한민국 국격이 떨어질 뻔했잖아.’

후우우우-웅.

그렇게 고삐 풀린 황소가 적진으로 돌격을 한 후.

퍼퍼퍼퍼펑!!!

“으아아악!!!”

비명과 육편이 난무하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음? 뭔가 이상한데요?”

“뭐가 말인가?”

나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째 아까보다 인원이 줄어든 것 같지 않아요?”

“흠…. 그러고 보니 좀 준 느낌이군.”

“저기. 지금 저거 게이트를 넘어오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거죠?”

꾸역꾸역 이쪽으로 사람을 밀어내던 워프 게이트가 구 영감님의 돌격 이후엔 꽉 막혀있다가 뚫린 하수구처럼 사람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어어-? 저것들 튄다!”

누군가의 외침처럼 그들은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치고 있었다.

“허-. 어딜 도망가려고.”

선빵을 구 영감님에게 뺏기긴 했지만 나 또한 저들에 대한 분노가 그리 옅지 않았다.

“스킬 사용. 뇌신일체.”

내 동생과 내 스승들을 독 안에 가둬 놓은 쥐처럼 압박하고 있던 게 불과 몇 분 전의 일인데 살아서 돌아가겠다고?

안 될 말이다.

꽈르르르릉-!!

뇌신일체 스킬을 사용한 나는 뇌기를 한계치까지 끌어올렸다.

시간이 느려지고.

그 느려진 시간 속에서 나는 자유롭게 놈들의 머리 위로 몸을 띄웠다.

웅-웅웅-.

만 개의 그림자에 실린 만 개의 벼락을 한곳에 끌어모으니 이명과도 같은 공명음이 울렸다.

만뢰.

자고로 한번 배운 건 자주 복습을 해줘야 까먹지 않는 법이다.

마위현이라는 위대한 스승이 목숨을 바쳐가며 가르쳐준 것인데 잊어버릴 수야 있나.

꼭꼭 씹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파직! 빠지지직!

느릿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번개의 구.

주먹만 한 크기의 구체가 인파 사이로 떨어져 내리고.

쫘-좌-좌좌좍----!!

뇌격의 폭풍이 동심원을 이루고 퍼져나가며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

동심원의 중심에 있던 자들은 비명 한번 내지르지 못하고 잿가루가 되어 흩어졌고.

“끄어어….”

그나마 외곽에 있던 자들은 시커멓게 탄화된 채 생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었다.

물론 어느 쪽이 더 사정이 나은지는 내 알 바 아니었다.

“쥐새끼같이 잘도 숨어 있었군.”

만뢰를 맞아 쓰러진 사람들 사이로 멀쩡하게 모습을 드러낸 다섯 명의 인영.

신도들과 똑같이 새하얀 로브에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뿜어내는 기운이 달랐다.

사도.

12신에게 선택받아 인류를 배신하는 데 앞장선 배덕자들.

그들이 사도라는 것을 눈치챈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이노오옴!!”

갑자기 상대를 잃고 어리둥절해하던 성난 황소가 그중 하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캉! 카카카캉!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후방을 지키고 있던 서 영감님도 전투에 합류했다.

“빌어먹을!! 후퇴해! 신전으로 돌아가!!”

사도 중 하나가 큰 목소리로 후퇴를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수적 우위는 이미 뒤집혔고 사도 하나당 길드장 두셋이 달라붙은 상황이었으니까.

“젠장! 성물을 사용해!”

성물?

어디선가 들어본 단어였다.

‘그 인형사 놈이 연우 형을 가둘 때 사용했던 게 성물이었지?’

각성자 센터 테러 때 인형사가 신이 하사한 성물을 내놓으라며 난리를 치던 게 떠올랐다.

‘이 새끼들 아직도 자기들이 상대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네….’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정보공유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리퍼가 다른 신들을 엿 먹이기 위해 고의로 정보를 숨기는 거라고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화악-!

순간 다섯 사도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두 영감님을 비롯해 길드장들을 집어삼켰다.

‘저 안에선 전능에 가까운 힘을 쓸 수가 있다고 했었지?’

내가 아공간 안에서 전능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사도들도 저 성물이라 불리는 결계 안에선 힘과 능력의 한계가 사라진다고 했었다.

‘그런데 상대를 잘못 골라도 너무 잘못 골랐어.’

전능한 존재가 되건 말건 상관없다.

놈들이 머무는 공간 자체를 부숴버리면 되는 거니까.

최대한 빨리 손을 써야 했다.

당시 SSS급이었던 연우 형조차도 저 안에서 나올 땐 초주검이 되어 나왔었으니까.

‘시간이 지체되면 두 영감님은 몰라도 길드장들은 100% 죽는다고 봐야지.’

이럴 땐 아공간 포식보다는 아공간 변환 스킬을 사용해야 한다.

잘못하면 아공간 안의 우리 편이 내 인벤토리에 갇히는 참사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사도들이 성물을 사용한 이후. 신도들을 빨아들이던 워프 게이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후퇴 어쩌고 하는 거로 봐선 게이트 너머가 놈들의 본거지였던 모양인데 아쉽게 됐다.

그래도 어쩌랴 중요한 건 이쪽인걸.

‘자, 그럼 시작해볼까?’

사도들을 족치면 뭐가 나와도 나오겠지.

***

“결국, 쓰고 말았어. 이 빌어먹을 성물을….”

율리아는 입술을 짓씹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성물이란 신이 사도에게 하사한 신성이 어린 물건.

하지만 율리아에겐 처치 곤란한 애물단지와 같은 것이었다.

“주려면 좀 제대로 된 것을 줄 것이지. 사용할 때마다 생명력을 소진하는 아이템이 무슨 성물이야.”

그녀는 공간의 신 에리아를 믿지 않았다.

단지 영광이 약속된 미래에 한자리 차지하고 떵떵거리며 살 생각에 사도가 된 것일 뿐.

그런 그녀에게 결계 안에서 힘을 사용할 때마다 생명력을 소모하는 성물은 그야말로 계륵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게 다 저 잡것들 때문이야.”

마치 뇌신과 같은 위용을 뽐내며 낙뢰를 떨구는 강현.

그의 손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성물을 사용해야 했지만, 그 분노는 그녀의 결계 안에 갇힌 세 길드장을 향했다.

“저것들만 아니었어도 워프 게이트를 통해 교단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한강에서 뺨 맞고 엄한 곳에 화풀이하는 격이었지만 뭐 어쩌랴.

이 결계 안에서 자신은 신과 같은 힘을 사용할 수 있고 저 버러지들은 그저 고통스럽게 죽어갈 텐데.

위잉-.

율리아가 제약돼 있던 힘의 속박을 풀자.

아찔한 힘이 그녀의 몸속에서 터져 나왔다.

“하아-.”

몸속 가득 차오르는 고양감에 저도 모르게 달뜬 신음을 흘리는 율리아.

이래서 성물은 한번 사용하면 끊기가 힘들다.

신과 같은 힘을 쥐고 사용할 수 있게 되니까.

힘에 취해 몸을 부르르 떨던 율리아의 눈이 떠지며 세 길드장에게 향했다.

“죽어라. 버러지들.”

율리아의 말에 결계가 호응했다.

강현이 사용했던 사망 선고처럼 한마디 말로 적을 격살하지는 못하지만, 결계와 함께하는 율리아의 힘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바닥에서 화염이 들끓고 하늘에서 눈보라가 휘날리며.

쿠르르릉!

꽈광!!

천둥과 번개를 토해냈다.

“으악!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이 길드장님 우선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베리어를 치겠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천재지변에 우왕좌왕하는 세 사람.

하지만 율리아의 관심은 이미 그들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강현을 결계 속으로 끌어들였으면 어땠을까? 이길 수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사망 선고라는 권능은 결계 안에서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테스트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곱게 접었다.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다른 사도들에게 갈 폭탄을 굳이 건드려 독박을 쓸 필요는 없으니까.”

신의 명이라면 자폭도 주저하지 않을 광신도들도 몇 있으니 자신은 여기서 시간 좀 죽이다가 눈치 봐서 도주하면 되리라.

제아무리 사망 선고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신의 신성을 머금은 성물을 파괴할 수는 없으니까.

율리아는 결계 안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쩌-적.

이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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