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176화 (175/202)

176. 인류의 배신자들 (1).

교단.

12신.

12사도.

숫자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교단은 단일 지휘체계를 가진 집단이 아니다.

지구를 침략하기 위한 열두 신이 교단이란 이름으로 뭉친 것일 뿐.

그들은 각자 독자적인 세력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집단이다 보니 당연히 교단 내에서도 신들의 성향에 따라 파벌이 나뉘어 있었다.

지구 인류를 모두 멸절하고 자신들만의 신지(神地)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경파와 지구 인류를 포용해 그들을 신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온건파.

그리고 지구에 신지를 만들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중도파로 나뉜 이들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특히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두드러졌는데.

대표적인 강경파인 리퍼가 지구에 강림했다가 피 봤다는 사실에 기뻐하던 온건파의 분위기는 지금 초상집과 같았다

공간의 신 에리아의 신전.

수많은 점과 선 그리고 도형들이 어우러진 기괴한 외형을 한 에리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리퍼가 권능중 하나를 사도에게 넘겼다고? 그 욕심쟁이가?”

온건파 신 중 하나인 그녀는 사도 율리아가 전해온 정보를 믿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경파 신인 리퍼는 자신의 사도조차 믿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으니까.

그런 리퍼가 사도에게 권능을 넘겼다는 말은 진실과 믿음의 신조차 의심할 만한 소리였다.

“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사도를 잃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새로운 사도를 임명하고 권능까지 넘겨?”

에리아의 물음에 답한 것은 휘황찬란 빛 덩어리 형상을 한 존재.

태양신 아폴리온.

에리아와 같이 온건파에 속한 신인 아폴리온은 자신의 종인 샌드 웜을 잃은 것 때문에 에리아의 신전을 방문해 있었다.

“네 사도가 직접 봤다니 믿지 않을 수도 없잖아. 사도는 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까.”

“그건, 그렇지만…….”

“종과 사도를 잃고 나니 리퍼가 마음이 급해졌나 보지.”

“그런가?”

“그 성질 급한 놈이 이런 계략을 꾸밀 줄 몰랐네. 덕분에 크게 한 방 먹었어.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네 말대로 종을 다섯이나 보냈는데 모두 잃었잖아.”

아폴리온의 말에 에리아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여러 도형 중 머리라고 부를 만한 부위에 있던 둥근 구체가 잔뜩 찌그러졌다.

“말은 똑바로 해. 내 말대로 한 게 아니라 우리가 협의한 대로 종들을 보낸 거지. 그때는 동의했으면서 일이 잘못됐다고 나한테 책임 전가하는 거야. 지금?”

“아. 미안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그냥 지금 상황이 걱정돼서 그랬어. 이번 일로 저쪽보다 우리가 뒤처지게 된 거잖아. 종을 모두 잃어버렸으니.”

아폴리온의 걱정은 당연하였다.

종과 사도는 신의 일부분이나 다름없는 존재.

종을 다섯이나 잃었다는 것은 힘은 물론이고 지구에 투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그만큼 약해졌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에리아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회유를 위해 사도와 종을 보냈더니 한자리에서 다섯 마리의 종이 전멸하는 결과가 생길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사도에게 권능까지 부여해 함정을 판 리퍼의 계략에 에리아는 치가 떨렸다.

“다음 계획은 뭐야? 한 대 맞고 가만히 있을 건 아니지?”

신들 사이에 우위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은연중 온건파의 리더처럼 행동해 왔던 에리아였기에 아폴리온의 물음은 당연했다.

물론 에리아에겐 다음 계획 같은 게 없었지만.

“다, 당연하지.”

“그럼 회의 소집해? 다른 신들에게 연락할까?”

에리아가 오지랖만 넓은 아폴리온을 향해 속으로 욕을 한 사발 퍼붓고 있을 무렵.

“그럴 필요 없어. 여기 다 왔으니까.”

삼각형도 오각형도 아닌 기묘한 도형으로 만들어진 신전의 문이 열리며 일단의 무리가 안으로 들어섰다.

온몸에 푸른색 비늘이 돋아있는 거대한 물소, 바다의 신 타문.

“왜 우리들의 종이 모두 죽은 것인지 설명이 필요한 것 같은데. 에리아?”

인간의 외형을 가졌지만, 얼음과도 같이 투명한 피부에 차가운 한기를 내뿜는 침묵하는 겨울의 신 미루.

“그-래. 이번 일. 그냥. 회유를 위한. 위협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나무껍질 외피를 가진 커다란 사슴의 외형을 한 숲과 짐승의 신 나피로.

“이해할 수 없는 결과에 충분한 설명이 없다면 우린 네가 우리를 배신했다고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어 에리아.”

그들은 신전에 발을 딛자마자 저마다 입을 열어 에리아를 압박했다.

종을 잃은 그들로선 당연한 물음.

“하하. 마침 그 일로 대화를 나누던 중이니 이쪽으로 와서 앉아.”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말하기 좋아하는 아폴리온이 있다는 것일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아폴리온이 세 신에게 현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고, 에리아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음. 리퍼가 권능까지 부여했다…?”

“그래. 그게 리퍼가 얼마만큼 그 사도를 아끼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지.”

“그런데 그 좁은 땅덩어리에 어떻게 초월자가 셋씩이나 있을 수 있지?”

“그것도 리퍼의 수작 아닐까? 아니면 강현이 시스템 사용자라고 했으니 시스템의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지.”

“흠. 일리가 있군.”

그렇게 아폴리온의 설명과 추론이 끝나갈 무렵.

“뭐?!”

에리아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사도의 보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에리아?”

“무신의 사도가 강현을 찾아갔다는데?”

“중도파인 무신의 사도가 왜 강현을 찾아가지? 설마 무신이 강경파로 넘어가기로 마음먹은 것인가?”

일찌감치 중국에 사도를 심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무신.

중도파에 속해 있긴 하지만 온건파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무신의 사도가 강현을 찾아갔다는 사실에 좌중에 있던 신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신의 사도는 사도 중 최강으로 꼽히는 인간이며 초월자였으니 당연히 걱정될 수밖에.

그때 에리아의 말이 이어졌다.

“아니. 천마가 도연우를 이기고 지금 강현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보고야.”

“…뭐?”

에리아의 말에 신들은 각자의 사도를 통해 사실을 확인했다.

“정말인데?”

“하하. 이렇게 되면 무신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는 거로 봐도 되겠지?”

“무-신도. 리퍼의. 독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네.”

사실 확인을 마친 신들이 안도하고 있을 때 에리아가 말문을 열었다.

“이거….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라.”

“음? 무슨 뜻이지?”

“리퍼가 강현에게 권능까지 넘겨주며 투자를 많이 했잖아. 어쩌면 갑자기 초월자가 된 인간들도 강경파 신들의 투자를 받은 것일 수도 있어.”

“음. 일리가 있어. 그래서?”

다른 신들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에리아는 답답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뭘 그래서야?! 지금 천마를 도와 강현과 그 주변인들을 없애면 강경파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거지!!”

그제야 신들의 머리 위로 느낌표가 떠 올랐다.

“사도들을 보내자는 건가?”

“하지만 종들을 모두 잃은 지금 사도들마저 잃으면 우리도 타격이 커.”

“천마가 누군지 몰라서 그래?! 벌써 25년 전에 초월자가 돼서 신성과 격을 쌓고 있는 인간이야! 그런 인간이 이제 갓 사도가 된 강현에게 패할 것 같아?”

에리아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던 신들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찬성.”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는 강경파를 압도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겠군. 나도 동의하는 바네.”

“나-도. 대세를. 따르지.”

“좋아. 그럼 지금 바로 사도들을 준비시켜. 율리아가 데리러 갈 테니까.”

그들은 리퍼가 강현에게 패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라면 신도들도 대동하는 게 좋겠는데?”

그 패배로 인해 리퍼가 강현에게 신성과 권능을 빼앗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그들이 신이기에 범할 수 있는 당연한 오만이었다.

“이참에 리퍼가 영향력을 높이고 싶어 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지워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자신들을 온건파라 말하는 그들이었지만 결국 신에게 인간들이란 마음에 들지 않으면 1억 명쯤은 지워버려도 되는 존재들일 뿐이었다.

강현이 리퍼의 사도일 거란 아주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 그릇된 판단.

그 판단은 사도 다섯과 수천, 어쩌면 수만이 될지도 모르는 신도들을 사지로 밀어 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

천마와의 싸움을 끝내고 펼쳤던 진법들을 해제하니 펼쳐진 광경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딘가 익숙한 새하얀 반구형 결계가 넓게 펼쳐져 있고.

하얀 로브에 밋밋하기 그지없는 새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기이한 행색을 한 수천의 인파가 우리 일행을 포위하고 있었으니까.

“이 사람들은 대체 뭐죠?”

그들의 정체를 묻는 내 물음에 서 영감님의 대답은 간결했다.

“적일세.”

“에…. 적이요?”

“교단의 사도와 신도들이라고 하더구만.”

신도.

사전적인 의미로는 어떠한 종교를 믿는 사람이다.

분명한 건 이 단어는 절대 나쁜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수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그 종교를 믿고 의지하는 수십억 명의 사람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게 교단과 결부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구에 던전을 만들어내고 몬스터를 풀어 놓은, 어쩌면 인류의 적이라 불러도 무방할 존재들.

12신의 신도들이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인류를 배신하고 타 차원의 신에게 지구 인류의 미래를 팔아먹은 부역자(附逆者)라는 뜻이었으니까.

“아주…. 개잡놈들이 떼로 몰려왔네요.”

“그래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 모양이야 저리 둘둘 싸매고 온 것을 보면.”

지금도 꾸역꾸역 그 수를 늘리고 있는 신도들.

그들 뒤로 푸르게 빛나는 워프 게이트들을 보면 이곳 어딘가에 율리아가 와 있을 게 분명했다.

제비 다리를 부러뜨려 보냈더니 제비 떼가 되어 돌아왔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고 볼 일이다.

“그런데 구 길드장님은 왜 저렇게 시무룩하세요?”

마치 대역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쭈뼛거리고 있는 구지석.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서 구 영감님에게 조용히 물어봤는데.

“아. 저 녀석? 자기가 그린 마법진에서 저 빌어먹을 신도 놈들이 우르르 튀어나오니 저러고 있는 게지. 쯧쯧.”

이 눈치 없는 영감님은 기차 화통을 삶아 드셨는지 귀가 아플 정도로 목소리를 높이셨다.

마이크가 필요하시면 말씀하시라고요. 쫌!

“제 마법진이 적에게 이용당했다고 저리 풀 죽어 있는 꼴을 보게 이러니 내가 잔소리를 하지 않을 수 있냔 말이야. 무릇 한 단체의 장이라는 자리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뻔뻔해질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인데…. 에잉!”

언뜻 듣기론 구지석의 심약함을 탓하는 듯 보이지만, 아니다.

자고로 노인들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간 피를 보는 법.

저건 나보고 구지석을 좀 달래보라는 말이었다.

뭐 힘든 일도 아니고 맞장구를 좀 쳐주기로 했다. 구 영감님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구지석이 그린 마법진의 주인은 율리아였으니 마법진을 탈취하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실제로 지금도 꾸역꾸역 신도들을 토해내고 있는 워프 게이트는 열 개가 넘지 않는가.

그래서 구 영감님의 말에 장단을 맞춰 구지석 달래기에 들어가려 했는데.

“너…. 네가 왜 여기 있어?”

구지석의 등 뒤.

연우 형을 둘러싸고 있는 백의 사제단 사이에 왠지 익숙한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를 틀어 묶은 작고 귀여운 뒤통수.

집에 있어야 할 지아의 머리통이 확실했다.

“강지아! 너 왜 여기에 있어?”

분명 내 목소리를 들은 게 확실한데 백의 사제단 힐러들 사이로 머리를 쏙하고 숨기는 녀석을 보자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 아무리 내가 걱정돼도 그렇지 여기가 어디라고 와….’

졸지에 수천, 어쩌면 만 단위가 될지도 모르는 적들 사이에서 남매가 상봉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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