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천마 출현 (5).
날카로운 검 끝이 목젖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천마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강한 검격.
‘그럼 뭐해? 이렇게 훤히 눈에 읽히는데.’
입버릇처럼 말하던 중원 무학의 정수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화려하기 그지없는 검무의 끝에 펼쳐진 검격이지만 내 눈엔 놈이 뭘 노리는지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도 그렇다.
쉬식!
묵빛의 검강이 어린 검 끝은 내 목젖을 노리고 쏘아 들어왔지만, 이것은 허수이자 변칙적인 움직임일 뿐.
진정으로 놈이 원하는 건 내 목이 아니라는 것이 보였다.
천마가 휘두르는 검로의 끝에 있는 것은 바로 나의 심장.
그걸 알면서 초식이 완성되기를 기다릴 수는 없기에 내가 먼저 움직였다.
캉!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며 자칭 천마라는 놈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금강불괴?”
‘우쭈쭈 울 천악이 놀랐어요?’
하긴 놀랄 만도 하지 자살희망자도 아니고 쇠도 두부처럼 베어낼 검강 앞에 목을 들이밀었으니.
저렇게 당황하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넋 놓고 있어서 되겠어?”
내 말에 녀석이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천마의 검이 내 몸에 닿았다는 것은 그만큼 녀석과 나 사이의 간격이 줄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케이돈이 닿을 거리에 놈이 들어왔다는 뜻이었으니까.
촤라락!
검의 형태였던 케이돈이 채찍으로 변화해 놈의 발목을 휘감았다.
“큭!”
“잡았다 쥐새끼.”
왜 놈의 심장에 검을 찔러넣지 않았느냐고?
피할 걸 예상했으니까.
천마는 놀랍게도 뇌신일체 스킬을 사용해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나보다 빨랐다.
‘괜히 연우 형이 패한 게 아니란 거지.’
처음 케이돈과 검을 맞댄 이후.
천마는 극도로 케이돈과 자신의 검을 맞대는 걸 꺼렸다.
마나 한 줌 담기지 않은 검과 검강이 맞부딪혔는데 깨어져 나간 건 검강이었으니 옳은 판단이었다.
‘옳은 판단이긴 한데 나한테 넘나 짜증 나는 판단이었지.’
이후 놈이 유도한 싸움의 양상은 경공과 검강을 이용한 원거리 공격.
다람쥐처럼 치고 빠지길 반복하니 내가 짜증이 날 수밖에.
그래서 일부러 허점을 노출했고 놈은 기다렸다는 듯 검을 찔러 들어왔다.
결과는?
‘몸빵과 수 싸움에서 앞선 나의 승리다. 흐흐.’
“크윽.”
발작적으로 자신의 오른쪽 다리를 틀어쥐고 있는 케이돈을 끊어내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천마.
팅!
‘응- 안돼-.’
시도는 좋았지만, 놈의 묵빛 검강은 힘없이 튕겨 나갔다.
천마가 아니라 천마 할아버지가 와도 현 상태의 케이돈을 끊어낼 수 없다.
[내구: 사용자의 스탯 총합]
케이돈의 내구력은 내가 가진 스탯의 총합.
모태 솔로 특성의 버프를 받아 단일 스탯이 2만 대가 넘어간 지금.
특수 스탯이 뇌기를 포함해 토탈 20만에 가까운 스탯을 내구도로 부여받은 케이돈을 끊어내기 위해선 정말 신의 권능이 필요할 것이다.
“이놈!!”
쉬식!
예쁜 얼굴을 흉측하게 일그러트린 천마가 다시금 내게 검을 찔러왔지만 그뿐.
깡!!
놈의 발악은 커다란 쇳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역시 지아 말대로 엘릭서의 옵션 중 금강을 선택하길 잘했어.’
특성 금강과 스킬 금식충: 아다만티움 바디의 조합은 실로 괴이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EX급 각성자가 펼치는 검강에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을 줄은 정말 몰랐다.
“이런 빌어먹을 몸뚱어리!!”
고고하신 천마님의 입에서 욕설이 나오다니 참….
인간이란 언제나 바닥이 드러나야 본성이 나오는 법이란 걸 깨닫게 해준다.
휙-.
탱그렁---.
손에 쥐고 있던 묵빛의 검을 집어던진 천마가 가슴께로 양손을 모으더니 마나를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아…. 저게 그건가?’
연우 형의 가슴팍에 손바닥 자국을 새겨 넣었던 스킬.
그것을 준비하는 듯싶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나는 뭘 하고 있길래 놈의 발악을 그냥 지켜보고 있냐고?
나는 나대로 마나를 모으는 중이었다.
저 중국놈들 말로 하자면 내공을 그러모으는 중이라는 말씀.
그거 아는가?
[마법공격: 사용자의 마력 스탯 적용]
케이돈에는 마법 공격 옵션도 붙어있다는 걸.
뇌신일체로 발전기를 돌리고, 풍신퇴의 마나 회로로 뇌기를 돌려 케이돈을 쥐고 있는 오른손에 뇌기를 차곡차곡 축적하는 중이었다.
풍신퇴는 원래 발로 펼치는 거지만.
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거 아니겠어?
모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몬스터처럼 100만 볼트 공격이 아니라 농축해서 1억 볼트쯤 때려 박을 생각이다.
‘이것도 버티면 인정. 네가 짱 먹어라.’
***
천마는 그의 인생 최악의 난적을 만났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중화의 무학이 다른 나라에서 사용하는 스킬이라는 것과 그 궤를 달리해 발전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였지만 그렇다 해도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다만티움보다 단단한 번개라니….’
온몸에서 푸른색 스파크를 튀기는 강현의 모습은 외형상 보이는 것만으로도 번개 그 자체였다.
웃긴 것은 그 몸에 검을 찔러넣으면 어김없이 튕겨 나간다는 것이었다.
마치 단단한 아다만티움에 검을 찔러넣는 것처럼….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전해 들었던 것보다 수준이 높아. 내 초식을 꿰뚫어 보는 것도 그렇고.’
먼저 손을 섞었던 이름 모르는 젊은 놈도 강했다.
조금 시간을 두고 더 성장했다면 자신을 넘어섰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 만큼.
하지만 이 강현이라는 놈만큼은 아니었다.
강하다기보다는 기괴한,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난 기괴한 무언가가 강현에게 있었다.
그래서 천마신장을 준비했다.
‘검으로 벨 수 없다면 힘으로 부순다.’
그것이 패도를 추구하는 천마의 무학이니까.
원래라면 살려두고 신성을 잃게 한 대가를 치르게 해줄 셈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 천악이 칼 버렸어? 왜? 검술로는 형한테 안될 것 같아?”
저 빌어먹을 주둥아리를 다물게 하지 못하면 울화가 치밀어 죽을 것 같았으니까.
“그 건방진 주둥아리…. 곧 다물게 해주지.”
분명 반로환동을 했다고 말했건만, 놈은 여전히 자신을 어린아이 다루듯 대하고 있었다.
“그게 네 마음대로 될까. 천악아? 검을 들고도 못한 일을 맨손으로 되겠어?”
발끈한 천마가 나불나불 떠들어 대는 강현의 주둥이를 향해 번개처럼 우장을 내뻗을 때였다.
씨익.
비릿하게 올라가는 강현의 입꼬리.
10대 청소년을 괴롭히는 악당과도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인 강현의 오른손에서 푸른색 뇌전이 뿜어져 나와 케이돈을 타고 흘렀다.
꽈르르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케이돈을 타고 흐르는 뇌기의 폭포.
“크윽!”
천마는 재빨리 발출하려던 천마신장의 내공을 회수하려 했지만 한 발 늦었다.
지우우우웅-
공간을 울리는 방전음과 함께 인간의 몸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전류의 폭포가 순식간에 천마의 몸에 직격 했고.
“끄아아아아---!”
꽤 오랜 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천마의 몸을 태웠다.
“----.”
공간을 울리던 비명이 끊기고 희뿌연 연기를 넘어 검은 그을음이 피어오를 때까지.
털썩.
“천마?”
숯덩어리가 되어 바닥으로 쓰러진 천마를 내려다보며 강현은 입꼬리를 씰룩였다.
“별거 없네.”
자신을 스스로 하늘의 악마라 칭했던 자의 최후치곤 정말로 별것 없는 죽음이었다.
***
“쿨럭.”
도연우가 또다시 각혈하자 상황을 지켜보던 모두의 눈빛이 변했다.
“어떻게? 그 아이템 대체 뭐죠?”
그도 그럴 것이 매번 각혈할 때마다 검붉은 핏물을 한 됫박씩 토해내던 도연우가 이번엔 선홍빛 핏물을 토해냈기 때문이다.
“다행히 효과가 있네요. 조금 기다리셨다가 포션 사용하시면 될 것 같아요.”
강지아의 말에 백의 사제단소속의 힐러들이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최상급 힐링 포션도 듣지 않고 힐러의 힐은 물론이고 신성 마법도 통하지 않던 도연우의 상태는 강지아가 밀집 인형을 가슴팍에 올려놓는 순간부터 놀랍도록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러니 치료를 시도했던 힐러들 입장에선 경외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지아 양. 대체 저 밀집 인형 뭡니까?”
언제 다가온 걸까?
화연 길드장 이석평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하긴 도연우조차 사경을 헤매게 만든 부상을 치유하는 아이템이니 궁금해하는 게 당연했다.
“아. 저거요? 오빠 말로는 헤스티아라는 마녀가 만든 액받이 인형이라는데 SSS등급 아이템이래요.”
“SSS등급요?!”
“네. 근데 일회성 아이템이라 한번 사용하고 나면 인형을 태워서 없애버려야 한대요.”
“아….”
강지아의 말에 이석평이 아쉬운 듯 탄식을 토해냈다.
저런 아이템은 여분의 목숨을 가지고 다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저도 모르게 탄식을 토해낸 것이었다.
“혹시 필요하신 거면 제가 오빠한테 한 번 물어볼게요.”
“아…. 그래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강지아의 말에 반색하는 이석평.
그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런 이석평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구정철이 혀를 찼다.
“저놈은 어째 나이가 들수록 욕심이 느누? 쯧쯧.”
“놔둬. 현이가 저런 능구렁이한테 당할 만큼 호락호락한 아이가 아니지 않나.”
“하긴, 저 능구렁이 정도는 옳다구나 하고 날름 집어삼킬 놈이긴 하지.”
그들이 봤을 때 강현의 생존본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자신이 굽혀야 할 상대라고 생각한다면 한없이 굽힐 테지만 이석평은 아쉽게도 강현이 굽혀야만 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이야 열두 신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기에 아낌없이 퍼주는 듯 보이지만 나중에 가면 다 토해내야 할 것들이었다.
“그나저나 지석이는 계속 저대로 둘 생각이야?”
서태촌의 물음에 구정철의 눈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구지석에게 향했다.
“놔둬야지 뭐. 저렇게 고생하는데, 실패하더라도 뭐 하나는 배우지 않겠어?”
쉰이 한참 넘은 아들이지만 아버지의 눈엔 언제나 물가에 내놓은 아기와 같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품에 안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그간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아들이기에 더더욱 말릴 수가 없었다.
“후.”
그때, 마법진을 완성시킨 구지석이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세웠다.
이제 마나석을 배치하고 룬어 영창만 하면 끝이다.
강현이 그리던 때와는 다르게 그리는 데만 꼬박 한 시간이 걸렸지만 뿌듯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장은 도연우를 구하기 위해 그린 마법진이었지만 이 마법이 성공한다면 전 세계물류에 혁신이 일어나는 거였으니까.
그랬는데….
허리를 편 구지석은 주변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새하얀 로브를 걸친 이들이 도연우를 둘러싸고 있고 그사이에 누운 도연우는 어느새 원래 혈색을 되찾았다.
호흡도 편해진 걸 보면 상태가 많이 호전된 것으로 보였다.
“아버지 백의 사제단이 도 길드장을 치료한 겁니까?”
“아니. 치료는 지아가 했지. 지아가 가지고 있던 아이템 중에 도 길드 장을 치료할 만한 아이템이 있었던 모양이야. 덕분에 무사히 회복 중이지. 그나저나 마법진은 완성한 거냐?”
구정철의 물음에 구지석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완성했습니다. 뭐 지금 당장은 쓸모없게 됐지만요.”
“음? 쓸모가 없긴 왜 없어? 이왕 그린 거 한번 가동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게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직 룬어 해독이 완전하다고 자신할 수가 없어요. 도 길드장이 괜찮아졌다고 하니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죠.”
구지석이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할 때였다.
“음…. 그런데 저거 원래 저렇게 빛이 났던가?”
우우 응-.
나직한 공명음과 함께 푸르게 빛나기 시작한 마법진.
“이게 왜…?”
마나석 배치도 되지 않았고 룬어 영창도 하지 않은 마법진이 가동되며 허공에 워프 게이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