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천마 출현 (4).
살기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본좌는 천마 갈천악이라 한다.”
본좌? 천마?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이 애새끼 중2병인가?’
저런 손발이 오그라들 만한 말을 어떻게 맨정신으로 할 수 있는 거지?
난데없는 자기소개에 황당한 눈으로 천마를 바라보자 천마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죽더라도 누구 손에 죽는지는 알아야 덜 억울할 것 아니냐.”
살인예고를 참 명랑하게 지껄이는 새끼였다.
고작 열대여섯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외모인데 말투는 노인에 가까웠다.
본좌니 천마니 하는 걸 보면 저 녀석은 자기 자서전에 기록될 흑역사를 유려하게 써 내려가는 중인 것 같았다.
“내 소개는 이쯤 하면 된 것 같고. 그게 네가 모시는 신의 권능이라는 전뢰화인가?”
전뢰화를 아는 것을 보니 이 꼬맹이가 교단의 사도라는 추론에 확신이 생겼다.
근데.
“이 꼬꼬마 쉐키가 어딜 어른한테 반말을 찍찍거리고 지랄이야? 싸가지는 대뇌에서 출타시켰냐?!”
자라다만 중삐리가 계속 하대를 해오니 내 안에 잠들어 있던 꼰대력이 폭발했다.
이런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유교 보이인가 보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천마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허. 허허허.”
마치 세상 어이없는 말을 다 들었다는 듯 실소를 토해내던 천마가 입을 열었다.
“그래 25년이면 대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 소국에서는 내 이름이 잊힐 만도 하지. 허허.”
어딘지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지는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이던 녀석은 이내 얼굴을 굳혔다.
“아이야. 너는 반로환동이라는 말도 모르는 거냐? 명색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놈이 어찌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믿는 게냐. 쯧쯧.”
“반로…. 뭐?”
반로환동?
그 무협지에나 나오는 그거?
“하긴 원래 이어져 내려오던 무학의 맥도 잇지 못한 것들이니 어쩔 수 없는 건가….”
애늙은이처럼 주절거리던 천마가 바닥에 박혀있던 검을 빼 들었다.
날카로운 예기가 흐르는 묵빛의 검.
“통성명은 이쯤 하면 된 것 같으니 이제 검을 섞어볼까?!”
그 끝을 나에게 겨눈 천마가 자리를 박차고 쇄도해 왔다.
검을 섞자고?
‘이거 어이없는 새끼네. 뻔히 빈손으로 서 있는 걸 보면서 그런 말이 나오냐?’
내심 툴툴거린 나였지만 손목에 채워져 있던 케이돈을 검의 형태로 변환시켜 놈의 검격을 막아냈다.
꽝!
검과 검 사이에서 터져 나온 굉음이 공간을 울리고.
“호오….”
흥미로운 눈으로 내 손에 들린 케이돈을 바라보는 천악이.
‘우리 갈천악 어린이 형아꺼 장난감이 갖고 싶어요?’
케이돈을 바라보는 천마의 눈에선 묘한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흔히 탐욕이라 부르는 열기가.
하긴 검강이 일렁이는 검을 검기 하나 맺히지 않은 케이돈이 막아냈으니 욕심이 날 만도 하지.
우리 케이돈으로 말하자면.
[아이템: 케이돈]
[등급: EX]
[물리방어: 사용자의 내구 스탯 적용]
[마법방어: 사용자의 지혜 스탯 적용]
[물리공격: 사용자의 힘 스탯 적용]
[마법공격: 사용자의 마력 스탯 적용]
[내구: 사용자의 스탯 총합]
[옵션]
형태 변환
스킬: 아공간 포식(捕食) EX
스킬: 아공간 변환(變換) EX
[설명: 해피니스 시스템 사용자 강현이 수수께끼 알을 부화시켜 얻은 공방 일체의 무구(武具). 사용자 강현의 특성을 기반으로 태고룡 ‘쿠아르탐파’의 특성을 흡수해 만들어진 ‘스킬: 아공간 포식’과 크롤러 ‘검은 그을음’의 특성을 흡수해 만들어진 ‘스킬: 아공간 변환’을 사용할 수 있다.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형태 변환이 가능하다.]
[특이사항: 사용자 강현에게 귀속됨.]
공방 일체의 만능아이템 되시겠다.
그동안 쓸 일이 없어서 자주 사용하진 않았지만, 장담하건대 옵션과 성능 하나만큼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아이템 중 탑 티어다.
무려 EX급.
그러니 부담스러운 눈으로 케이돈을 바라보는 천마의 눈빛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꿈 깨. 이거 귀속템이라 네가 가져가지도 못해.”
그런 천마에게 비웃음을 날려준 나는 일그러지는 놈의 면상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어디 그 잘난 중원의 무공, 구경 좀 해보자고!!”
모태 솔로 특성이 발현되면서 3배 뻥튀기된 내 스탯은 그대로 케이돈에 적용되었고.
꽈앙!!
마나 한 줌 담기지 않은 검격으로도 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은 파괴력을 만들어냈다.
‘아따-. 칼질할 맛 나네.’
***
강현이 흥겹게 콧노래를 부르며 칼질을 하고 있던 그 시각.
외부에선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거 포션으로 치료가 안 됩니다. 아무래도 저주 같은데 상급 힐러가 필요해요!”
천마가 새겨넣은 검은색 장인.
그것이 사라지지 않고 도연우의 상태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상급 힐러도 치료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 도 길드장과 동수를 이루던 놈이 새겨넣은 건데 상급 힐러가 치료할 수 있겠어?”
“그럼 이대로 지켜보자는 겁니까? 최상급 포션으로도 현상 유지가 고작입니다. 시간이 더 지체되면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요!”
“누가 손 놓고 지켜보자고 했습니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방법이! 성녀라도 오면 모를까, 우리가 무슨 수로 EX급 각성자가 건 저주를 해제한단 말입니까!!”
길드장들은 어떻게든 도연우를 살리려 애를 쓰고 있었지만, 그의 상세는 점점 더 악화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각혈로 그가 주저앉아 있는 바닥엔 검붉은 웅덩이가 만들어졌고 푸르스름한 핏줄이 보일 정도로 창백해진 안색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위급해 보였다.
“어르신들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간절함이 담긴 길드장들의 눈이 서태촌과 구정철에게 향했지만, 그들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끙…. 우리도 방법이 없네. 치고받고 싸울지나 알지 언제 우리가 사람을 고쳐봤어야지….”
두 사람에게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이들의 얼굴에 낙담한 기색이 어릴 때였다.
“정말 성녀를 데리고 오면 살릴 수 있겠습니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구지석이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보단 낫지 않을까요? 명색이 SSS급 힐러니까요. 물론 그녀가 고쳐준다는 보장은 없지만요.”
“뉴욕에 있는 성녀를 무슨 수로 데리고 와요? 강현 씨라도 있으면 워프 게이트를 열어보기라도 할 텐데….”
하지만 강현은 지금 괴물 꼬마를 상대 중이었고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연락이 된다고 하더라도 빠져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고.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뭘 해보겠단 말씀입니까? 구 길드장님.”
“워프 게이트요.”
산둥반도에 다녀온 뒤 구지석이 강현에게 워프 게이트 마법진을 배웠다는 건 다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배운 것과 실제로 사용하는 건 엄연히 다른 것.
“그게…. 가능하겠니?”
구정철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배운 지 하루밖에 안 된 마법진을 사용한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자칫 잘못해 실패하면 마법진을 펼친 마법사도 무사할 수 없고 최악의 상황엔 마나가 역류해 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
구지석은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도박을 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걱정스러운 구정철의 시선에 구지석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 봐야죠.”
“…그래.”
구정철은 아들을 뜯어말리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재해급 몬스터의 침공과 사도의 테러.
불과 사흘 동안 벌어진 일이다.
교단의 위협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지금 도연우를 잃는다는 건 대체 불가능한 카드를 잃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느낀 구지석이 흔들림 없는 단단한 눈으로 구정철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을 믿으라는 듯이.
이윽고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하는 구지석.
꿀꺽.
다른 길드장들은 그런 구지석을 긴장된 얼굴로 지켜봤다.
***
경찰과 군부대에 의해 출입이 통제 중인 강남의 외곽.
강지아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통제선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뉴스를 본 강현이 강남으로 떠난 후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던 그녀는 드론을 타고 강남으로 날아왔지만 이미 이곳은 출입이 통제되고 있어 안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오빠가 알면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집에서 심장을 졸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까.
“어. 저 사람 도연우 아니야?”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서성이던 그녀의 귓가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싸움에 휩쓸려 모든 드론이 파괴됐다고 들었는데 방송국에서 다시 드론을 띄운 모양이었다.
“도연우 얼굴이 왜 저래. 곧 죽을 것처럼 창백한데?”
“설마 도연우가 졌다고?”
그런데 그들의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도 길드장님이 졌다고?’
오빠인 강현의 말로는 SSS급을 넘어선 괴물이라던 도연우.
어깨너머로 본 화면엔 정신을 잃은 채 검붉은 핏물을 토해내는 도연우의 모습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오빠…. 오빠는?”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강지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오직 한 사람.
절대 위험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집을 나섰던 강현의 얼굴뿐이었다.
“없…어?”
하지만 뉴스 화면 어디에서도 강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오빠가 영감님들이라 부르던 서태촌과 구정철 그리고 10대 길드 길드장들의 모습은 카메라에 잡혔으나 그 어디에도 오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근데 테러리스트는 어디 갔어? 안 보이는데?”
“죽은 거 아냐?”
“죽었으면 시체라도 있겠지.”
그리고 그것은 도연우를 저렇게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테러리스트도 마찬가지였다.
사라진 두 사람.
‘아공간. 아공간 안에서 싸우고 있는 거야!’
강현이 가진 능력을 모두 알고 있는 강지아였기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특성을 발현시키려고 아공간 안으로 들어간 거겠지.’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됐다.
만약 오빠가 졌다면 이미 그 테러리스트가 튀어나왔을 테니까.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런데 저 사람들, 다친 사람 놔두고 왜 저렇게 우왕좌왕해? 도연우 죽게 내버려 둘 셈인가?”
“그러게 왜 저러고 있지?”
“어…. 아까 힐링 포션 먹이던데요? 그것도 최상급으로, 왜 아직도 못 일어나는 거지?”
최상급 힐링 포션을 먹었는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도연우.
그때 곁에 있던 화연 길드장 이석평이 다시 힐링 포션을 먹이는 장면이 화면에 비쳤다.
그마저도 다 마시지 못하고 각혈과 함께 토해내는 도연우.
그러자 사람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설마…. 최상급 힐링 포션으로도 치료가 안 되는 건가?”
지금 세기의 천재라 불리는 도연우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순간.
일단의 무리가 경찰의 허락을 받고 통제선 안쪽으로 들어갔다.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새하얀 로브를 입은 이들.
“백의 사제단?”
힐러 협회라고도 불리는 백의 사제단의 힐러들이었다.
저들이 왔다는 것은 도연우의 상태가 최상급 힐링 포션으로도 치료가 안 될 만큼 위중하다는 의미였다.
“설마…. 도연우 죽는 거야?”
한 사내의 중얼거림에 주변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칼날처럼 사내에게 향했다.
세기의 천재 도연우.
대한민국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남자.
그는 그만큼 온 국민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때 강지아는 통제선을 관리하는 경찰을 향해 다가갔다.
‘아무래도 오빠가 준 아이템을 쓸 일이 지금 생긴 것 같은데?’
그녀의 기억이 맞는다면, 지난밤 룰렛을 돌려서 나온 아이템을 죄다 자신에게 밀어준 오빠 덕에 풍족해진 인벤토리 안엔 분명 이 상황에 쓸 만한 아이템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