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천마 출현 (3).
왜지?
왜 내 눈엔 그저 살풀이춤처럼 보이는 저 율동이 다른 이에겐 허초와 실초로 버무려진 위력적인 무공이 되는 걸까?
‘뇌신일체 온(on)하고 보면 정말 별것 없는데.’
느려진 시간 속에서 소년이 펼치는 공세는 그저 한바탕 춤사위에 지나지 않았다.
이리저리 손과 발을 휘적이다가 공격 의사가 명확한 스킬이 발현될 때만 무채색이었던 마나에 반짝 빛이 들어오는데.
‘왜 저게 구분하기 힘들다는 거지?’
저렇게 ‘내가 진짜예요’라고 반짝반짝 빛을 내는데?
그러고 보니 자신을 황룡문의 대제자라고 소개했던 중년인이 놀라던 것이 떠올랐다.
‘어떻게 황룡장(黃龍掌)을 그렇게 쉽게….’라고 말했던가?
그 말은 황룡장이 그렇게 쉽게 막을 수 있는 무공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짧은 고민 끝에 나는 그 답을 찾았다.
칭호 인필리언의 구원자와 공간시의 시너지.
-칭호: 인필리언의 구원자 효과가 적용 중입니다. 대상의 ‘호의’와 ‘악의’가 시각화됩니다.
-특성: 공간시 SS(LV1)가 발현됩니다. 공간의 정보를 추출합니다.
-‘칭호: 인필리언의 구원자’가 ‘특성: 공간시’와 시너지를 일으킵니다.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가 시각화됩니다.
아무래도 답은 여기에 있는 것 같았다.
호의와 악의, 모든 정보의 시각화.
이러니 내가 ‘무공’을 보는 눈이 다른 사람들과 다를 수밖에.
한마디로 내 눈엔 그저 허공에 헛손질하는 거로 보이는 저 춤사위가 다른 이의 눈엔 무시무시한 스킬로 보일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연우 형이 뭣 빠지게 방어에만 전념하고 있는 걸 테고.’
뇌신일체로 느려진 시간 속.
휙휙거리며 잔상을 남기던 소년의 움직임이 명확하게 읽혔지만 내가 끼어들기엔 무리가 있었다.
‘모태 솔로 특성이 발현되지 않아서인가? 뇌신일체를 사용했는데도 빨라.’
적을 상대할 때 모든 능력치를 3배나 상승시켜주는 모태 솔로 특성은 오로지 홀로 적을 상대할 때만 발현되기에 10대 길드장은 물론 두 영감님까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지금은 발현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 해야 하지?’
사망 선고를 날려?
그건 박 터지게 싸우고 있는 연우 형에게 실례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였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연우 형이 전장에서 튕겨 나왔다.
“컥. 쿨럭.”
검붉은 피를 한 사발 토해내며.
갈기갈기 찢겨나간 옷자락 속에 보이는 선명한 검은색 장인.
순간 전장엔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도연우가 패했다.
암묵적으로 대한민국 최강으로 꼽히던 도연우가 불과 열대여섯 살로밖에 보이지 않는 꼬마에게 패한 것이다.
“허….”
누군가의 탄식 어린 한숨이 그 불편한 침묵을 깨부수는 순간.
턱.
연우 형의 앞에 강남을 폐허로 만든 원흉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끝이네. 뭐 더 보여 줄 거 없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없으면 뭐. 죽어야지.”
불길한 기운이 일렁이는 검은색 검을 연우 형의 심장에 겨눈 채.
더는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사망 선고.”
-대상을 지정해 주십시오.
-대상이 절대적인 죽음에 저항합니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다.
-신성 스탯 100이 소모됩니다.
-소모된 신성 스탯은 복구되지 않습니다.
EX급 각성자인 연우 형에게 패배를 안겨준 녀석이니 재해급 몬스터들보다 신성 스탯의 소모가 높을 거라는 것도 예상했었다.
어쨌든 급이 다르니까.
하지만.
-신성이 대상의 저항을 무효화 합니다.
-대상에게 절대적인 죽음이 선고됩니다.
-에러.
이어진 상황은 내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대상이 신성 스탯을 소모해 절대적인 죽음에 저항합니다.
-권능: 사망 선고가 무효화됩니다.
‘이게…. 뭔 개 같은 경우야?’
치트키와 같은 사망 선고 권능에 저항하는 인간이 존재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신성 스탯을 가지고 있다고?’
신성 스탯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아니, 뭐. 나도 신성 스탯을 가지고 있으니 인간이 신성 스탯을 가지고 있지 말란 법은 없는데.
‘하필이면 왜 저런 괴물 같은 꼬마가 그걸 가지고 있냐는 거지!’
교단 놈들이 믿는 신이라는 것들이 저 꼬마를 만들 때 옴팡지게 축복을 때려 부은 건가?
내가 혼란해지는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통빡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끼기긱.
고장난 고물 선풍기처럼 삐뚜름하게 고개를 돌린 꼬꼬마가 나를 바라보며 새하얀 미소를 베어 물었다.
“너였구나?”
오. 씨바.
진심 지릴 뻔했다.
검고 투명한 눈동자에 어린 광기와 살기는 지금껏 내가 마주해 왔던 그 어떤 적보다 살벌했다.
심지어 시스템의 제약 때문에 내게 패배해 권능을 빼앗겼던 리퍼보다도.
“스, 스킬 사용! 육합귀문진! 혼천미로진!”
이렇게 수많은 사람 속에서 스킬 명을 외치는 건 처음이지만 어쩌랴.
쪽팔림은 순간이고 목숨은 소중한 거니까.
***
“허!”
운무가 자욱하게 깔린 육합귀문진 속.
“허허허.”
천마는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육합귀문진? 혼천미로진? 허! 허허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진법 아닌가.
“그 짧은 시간에 진법을 깨우쳤다고?”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진법들은 서효명이 창천국에 펼쳤다고 말했던 그것들이었다.
상대는 불과 반나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제갈세가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두 진법을 습득한 것이다.
“천재? 아니 천재 할아비라도 이건 불가능하지.”
제갈세가의 시조라는 제갈무후가 부활한다 해도 반나절 만에 진법을 익히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상대는 그 불가능을 실현해 냈다.
그렇다는 건 강현이라는 놈에게 자신이 전해 듣지 못한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저 뇌신의 권능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는 소리군.”
그가 교단과 신에게 전달받은 정보는 몇 가지 되지 않았다.
강현이라는 자가 시스템 사용자. 즉 자신의 신과 대척점에 있는 신의 가호를 받은 자라는 것과.
그 신의 권능 중 하나인 전뢰화라는 권능을 사용한다는 것. 단 두 가지.
전달받은 정보 어디에도 한 방에 신성을 뭉텅이로 깎아내리는 권능 같은 건 없었다.
‘그게 어떻게 모은 신성인데, 그걸….’
한껏 인상을 찡그린 천마는 주변을 살폈다.
자욱한 운무와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귀곡성.
그가 아는 육합귀문진이 맞았다.
‘그렇다면 생문을 모르더라도 진에서 벗어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천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천마신장도 천마신공도 통하지 않는다.
어지간하면 꺼내지 않는 천마신검으로 펼친 아수라파천검도 마찬가지였다.
육합귀문진이 만들어낸 운무는 패검(覇劍)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아수라파천검의 강기마저도 날름 집어삼켰다.
“내가 알던 육합귀문진이 아니구나.”
이건 그가 알던 육합귀문진이 아니었다. 육합귀문진 따위가 천마삼검 중 최후 절초인 아수라파천검을 버틴다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그 짧은 시간에 진법을 익힌 것도 모자라 강화했단 말인가…. 허허.”
25년 전.
천마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인세에 자신의 적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세상은 여전히 던전과 몬스터로 인해 혼란스러웠으나 그 모든 것이 신들의 뜻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신이 지구에 강림하기 위해 선행되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인세의 일에 관여치 말라.’
신의 명이었다.
그가 신의 명에 따라 은거를 했을 때 그의 신은 보답으로 한 가지를 귀띔해 줬다.
초월은 인간이 신으로 향하는 첫 번째 계단이며 그 두 번째는 신앙을 모아 신성을 얻는 것이라고.
신의 가르침대로 명교를 만들고 제자들을 들여 그들을 가르쳤다.
어려울 건 없었다. 그가 믿는 신의 신명(神名)은 무신(武神).
무신의 사도인 천마에겐 화수분과도 같은 무학이 존재했고 자질에 맞는 무공을 찾아 전수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천마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중국 각지로 퍼져나가고, 그 제자들과 함께 명교도 널리 퍼져나갔다.
명교의 교도들은 천마를 신으로 숭배했고 그 믿음은 신성이 되어 돌아왔다.
“그랬는데…. 이젠 도로 아미타불이 되어버렸군.”
그리 힘들게 모은 신성이 강현의 사망 선고 한 번에 안개처럼 증발해 버렸으니 천마가 분노하는 건 당연한 일.
문제는 당장 가슴속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를 풀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디, 이 같잖은 진법이 어디까지 버티는지 한번 보자꾸나.”
웅-.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천마가 틀어쥐고 있던 천마신검에서 나직한 검명(劍鳴)과 함께 묵빛의 검강이 솟아올랐다.
길이만 10m는 넘을 듯한 거대한 검강.
강현이 보면 기겁할 만한 그것은 검은 불길을 뿜어내며 주변을 장악하고 있던 육합귀문진의 운무를 태워 없애기 시작했다.
***
“와 씨…저게 뭐야?”
졸지에 육합귀문진과 혼천미로진에 갇혀 헤매고 있던 이들을 진 밖으로 내보내고 돌아온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육합귀문진이 만들어낸 운무를 불사르고 있는 길고 시커먼 불길.
그것을 본 내 머릿속에선 경종이 울렸다.
‘저거 잘못 건들면 아주 X 된다.’
그 크고 기다란 것이 홀로 허공을 날아다니며 운무를 태워 없앴다.
‘세상에 검강으로 운무를 태워 없앨 생각을 하다니….’
정말 무식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소모된 마나야 포션 마시면 회복되는 거니까.
문제는 이대로 두면 육합귀문진이고 나발이고 아주 작살이 날 판이라는 거였다.
‘결국, 저 괴물을 상대해야 하는구나.’
‘창천국에 죄수들을 가둔 것처럼 혹시나 저 꼬마를 진법에 가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희망 사항은 날개를 달고 저 멀리 날아갔다.
그냥 아공간 조작으로 상대하면 안 되냐고?
해봤다. 진법을 펼치자마자 해봤는데.
-특성: 아공간 조작의 대상으로 지정할 수 없습니다.
시스템이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사망 선고를 막아낼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어쩌겠는가.
우리 최고 전력인 연우 형마저 저 괴물에게 패했으니 조커 카드인 내가 나서는 수밖에.
‘하-. 위험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렇다고 저 괴물이 언제 진법을 부수고 튀어나올지도 모르는데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나이 먹고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는데…. 나는 이렇게 또 동생과 약속을 어기는 나쁜 오빠가 되었다.
딱.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보고 정 안되면 도망갈 거다.
그렇게 결심한 나는 구 영감님이 전수해준 풍신퇴의 마나 회로대로 마나를 돌렸다.
나는 적을 보고, 적은 나를 보지 못하는 상황.
오른발에 응집된 뇌기가 푸르스름한 스파크를 튀기며 끓어오르고.
쾨르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이기어검을 사용하고 있는 소년의 뒤통수를 향해 시퍼런 벼락이 뻗어 나갔다.
선빵 필승!
뇌신일체 상태에서 펼친 기습공격.
‘먹혔다!’
나는 푸른색 뇌전이 꼬마의 뒤통수에 틀어박히리라 확신했다.
뇌전으로 이루어진 폭풍이 발끝을 벗어나 지근거리에 당도했지만 꼬마는 반응하지 못했거든.
그렇게 뇌신퇴라 불러야 할 뇌전 폭풍이 괴물 꼬마의 머리를 날려버릴 것을 확신할 때였다.
“하도 미적거리기에 도망칠 줄 알았는데 제법 강단이 있구나.”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리는 꼬마의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이윽고 이루어진 전류의 방전.
빠지지지직!
뇌신퇴의 뇌전이 꼬마의 몸을 휘감으려는 순간.
치이이익---!
거대한 묵색의 대검이 허공에서 뚝 떨어져 내리며 꼬마의 전면을 막아서고 그 영역을 침범하려는 뇌기를 모두 소멸시켜 버렸다.
‘씨바…. 진짜 X 됐네.’
그리고 나는 그 묵색의 검 너머에서 나를 직시하는 소년의 눈을 마주하고 정말 좆 됐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