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천마 출현 (1).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아주 오래된 고언이다.
그 말은 아공간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말이었다.
붉은색 푸른색…사이-.
이놈의 전용 던전은 하루만 정리를 빼먹어도 빽빽하게 아공간이 들어찼다.
그리고 그 모든 아공간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다.
저 먼 우주에 별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연이 별똥별이 되어 내 전용 던전으로 흘러들어 온다.
“와…. 이틀 청소 안 했다고 이렇게까지 될 일이냐?”
그렇게 흘러들어온 아공간이 마치 확인하지 않은 이메일처럼 빼곡하게 던전을 채우고 있었다.
“현재 던전 안의 아공간은 모두 2201개이며 그중 푸른색 아공간이 1224개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고 노란색 아공간이 432개. 주황색 아공간은 255개. 붉은색 아공간은 177개. 흰색과 검은색 아공간은 각각 40개이며 황금색 아공간이 33개로 가장 수가 적습니다.”
케이돈을 얻은 이후.
전용 던전 내의 아공간 공략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청소가 아닌 포식으로 공략 방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굳이 아공간 안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고.
귀찮게 크롤러를 상대할 필요도 없으며.
그저 밖에서 아공간 포식 스킬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전용 던전 내의 아공간 숫자를 빠르게 줄일 수 있었다.
보상도 커졌다.
‘아공간 내에 존재하는 아이템 전부와 포식한 아공간의 크기만큼 내 인벤토리가 늘어났지.’
문제는 있었다.
아공간 포식으로 아공간을 흡수하면 그 안에 있는 균열과 기생 중인 크롤러도 함께 따라온다는 것.
크롤러야 아공간 조작과 변환으로 따로 분리해 처치하면 그만이었지만 인벤토리는 금이 쩍쩍 간 모래성처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곧 처리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금이 간 아공간만 따로 분리해 청소를 진행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더 큰 문제는.
‘아공간 포식으로 흡수할 수 있는 아공간은 빨간색 아공간까지라는 거지.’
손대지 못한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황금색 아공간의 숫자가 빠르게 축적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연 많은 아공간 중 가장 위험한 아공간들이 차곡차곡 적립되고 있었다.
‘이거 점점 골 아파지는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이 자가증식을 하듯 그 수를 불려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머리를 아프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공간 공략(공략이라 부를 것도 없지만.) 속도가 빨라질수록 우주를 떠돌던 아공간이 별똥별이 되어 던전으로 쏟아지는 속도도 빨라졌다.
아직은 아공간 대다수가 푸른색이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내가 처리하지 못한 세 가지 색의 아공간으로만 던전이 가득 찰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참 심장이 쫄깃해지는 청사진이구만.’
아공간 포식으로 흡수할 수도 없으니 결론은 하나다.
직접 들어가 청소하는 것.
머릿속에 인필리언에서 검은 그을음을 만나 개고생을 했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EX급 스킬인 아공간 포식으로도 흡수할 수 없다는 건 그 아공간의 등급이 EX급 이상이라는 소리고.
‘그 말은 저 안에는 최소 반신급의 괴물이 존재한다는 소리지.’
그게 크롤러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시스템의 제약과 디버프를 풀로 처맞은 리퍼를 상대하면서도 개고생을 했는데 그 짓을 또 하라고?’
못한다. 절대.
관리자가 떠먹여 준 전뢰화가 없었다면 승리는커녕 지금쯤 지옥에서 영혼 세탁을 당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 나름대로 기부도 많이 하고 착한 일도 많이 했으니 지옥은 안가려나?
여튼, 아직 내 힘으로 반신급 존재를 상대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니 당분간 저쪽은 쳐다보지도 말아야겠다.
‘지아하고 위험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라는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하며 나는 아공간 포식 스킬을 사용하는 데 집중했다.
내일 일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뭐.
***
연말이 다가온 서울의 밤은 화려했다.
거대한 마천루.
번화가를 가득 채운 인파와 화려한 조명.
교주가 본 서울의 밤은 대국의 중심인 남경의 밤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소국치곤 제법이군….”
그리고 교주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국의 그늘에 빌붙어 살던 빵쯔들이 이룬 것치곤 그럴싸해.”
중국이 넓은 땅덩어리에 넘쳐나는 몬스터들과 씨름하는 사이 변방의 소국이 이뤄낸 눈부신 발전.
그것은 교주의 심기를 거스르기에 충분했고.
“어? 웬 애새끼가 오밤중에 집에도 안 들어가고 어른들 노는 데 기웃거려?!”
꼰대력이 충만한 어떤 주정뱅이의 호기 섞인 외침은 그 불편한 심기에 불씨를 댕기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야야. 가만히 있는 애한테 왜 시비냐. 그만해.”
“아 놔봐.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밤 열두 시에 술집을 기웃거리는데 그럼 이걸 그냥 놔둬? 어른은 그러는 거 아냐. 인마.”
“아- 새끼. 각성하더니 꼰대력 오지네…. 씨바. 너 알아서 해라 난 갈란다.”
친구의 만류를 뿌리치고 앞으로 나서는 30대 초반의 사내.
“너 뭐야. 왜 오밤중에 술집을 기웃거려? 너 일진 뭐 그런 거냐?”
피식.
교주는 남성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한가지는 알았다.
“웃어?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어른이 말을 하는데 쪼개?”
저자는 지금 자신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것을.
“여흥으로 괜찮으려나?”
나직하게 중얼거린 교주.
사내는 교주의 중얼거림을 듣곤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가뜩이나 중국이 한국에 탄도미사일을 날려 여론이 좋지 않은 상황.
사내는 마치 잘 걸렸다는 듯이 씩씩거리며 교주를 향해 다가왔다.
“뭐야. 너 짱깨야? 짱깨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기웃거려!”
“시끄럽다.”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한국에 살면 한국말을….”
자신보다 한없이 작은 체구의 소년을 내려다보며 기세등등하게 목소리를 높이던 사내는 자신의 말을 끝맺지 못했다.
퍼억!
후드득.
소년의 가벼운 손짓에 머리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푸시익-.
흩날리는 육편과 분수처럼 솟아오른 핏줄기.
순간 인파가 가득하던 거리엔 정적이 내려앉았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살인을 미처 두뇌가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정적은 칼날 같은 비명이 울려 퍼지며 깨졌다.
“꺄아아아악!!”
“사, 살인이다! 겨, 경찰 불러!”
비명과 고함으로 시끄러워진 거리.
교주는 패닉에 빠진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빵쯔들은 시끄러워. 괜히 손맛만 버렸군. 쯧.”
이어 허공을 휘젓는 손짓.
퍼퍼퍼펑!!
콰앙!! 콰지지직!
단 한 번의 손짓에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지고.
“켁! 케륵….”
“사…살려….”
인파로 가득하던 거리엔 죽음이 내려앉았다.
“이제 좀 조용하네.”
그렇게 무지몽매한 빵쯔들에게 죽음을 선물한 교주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걸렸다.
이 지옥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싱그러운 미소가.
하지만 거리엔 일반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우당탕탕.
쨍그랑!
갑작스러운 폭음에 놀라 무기를 빼 들고 뛰쳐나오는 각성자들.
그들은 피와 죽음으로 물든 거리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소년을 향해 각자의 무기를 겨누었다.
“너! 정체가 뭐냐!!”
“죽여!”
교주의 정체를 묻는 이와 지인의 죽음에 눈이 뒤집혀 달려드는 이.
“여흥도 안되는 것들이 귀찮게…. 쯧.”
교주는 다시 손을 휘저어 공평한 죽음을 그들에게 선물했다.
퍼억!
퍼퍼펑!!
하루살이를 쫓는 듯한 가벼운 손짓에 각성자들의 몸이 풍선처럼 터져 나갔다.
그렇게 주변을 정리한 교주는 멀리서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일별하곤 시쳇더미 위에 걸터앉았다.
“이 정도면 노크는 확실히 한 것 같은데. 언제 올 테냐. 강현.”
교주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신강에서 서울까지 날아온 이유.
그것은 그의 신이 그에게 내린 신탁. 시스템 사용자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
아수라장.
도연우는 그 말 말고는 현 상황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강남 한복판에서 일어난 학살이 길드에 신고된 지 1분.
급하게 달려온 현장은 수천수만의 인파가 뒤엉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그 아수라장의 한가운데.
지옥도에서나 나올 법한 참혹한 학살의 현장 한가운데에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는 소년이 도연우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과 눈이 마주친 소년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 지옥도를 만들어낸 테러리스트라 보기엔 싱그럽고 아름다운 미소를.
턱.
몸을 날려 소년의 앞에 내려선 도연우가 물었다.
“너냐? 강남 한복판에서 이따위 짓거리를 벌인 게?”
수백 구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핏물로 붉게 물들어버린 거리.
누군가의 신체와 그 일부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참혹한 지옥의 한가운데서, 영역을 침범당한 사자는 분노했다.
‘또….’
각성자 센터에서 벌어진 욱일회의 테러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지기도 전에.
‘…내가, 우리 한울 길드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다는 건가?’
자신의 영역.
한울이 수호하는 대한민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이와 같은 참사가 다시 일어났다는 사실에 도연우는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분노했다.
“@[email protected]%%!*?”
눈앞에 야리야리한 몸을 한 소년이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도연우의 귓가엔 들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너. 여기서 죽어야겠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대화가 아니라 이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었으니까.
그 말을 알아들은 걸까?
교주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시체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어진 손짓.
쩌어어엉!!
거대한 굉음과 함께 교주의 공격을 막아낸 도연우가 뒤로 밀려났다.
“호오-. 제법.”
마치 자신의 공격을 막아낼 줄 몰랐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탄성을 토해내는 교주.
그런 교주와 마주한 도연우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소년의 강함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힘을 가지고도 잘도 이따위 짓거리를….”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
대화는 필요 없었다.
탓.
도연우의 신형이 교주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콰아아아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싸움이 시작되었다.
중화제일인(中華第一人)이자 천마라 불리는 이와 세기의 천재라 불리는 이의 싸움이.
***
“오빠! 큰일 났어!!”
전용 던전을 정리하고 나온 나를 맞이한 건 여느 때와는 다르게 어딘가 격앙된 듯한 지아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이끌려 거실로 나가니 내 눈에 보이는 건 홀로그램 TV를 통해 보이는 파괴의 현장.
“뭐야? 새로 개봉한 영화야? 연말연시에 뭐 이런 걸 보냐….”
그런데 어쩐지 화면이 전환될수록 화면 속 장소가 낯익었다.
“강남인가…?”
저 멀리 보이는 상층부가 날아간 각성자 센터.
저건 아무리 봐도 서 영감님의 단천세에 날아간 흔적이 맞는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지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뉴스야 오빠.”
“에…?”
이게 뉴스라고?
그제야 화면 구석에 떠 있는 방송국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그럼 저 처참하게 부서진 도시가 정말 강남이라고?’
실시간으로 터져 나가며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가스라도 터졌는지 건물 수십 채가 화마에 휩쓸려 타오르고 있는 저곳이 강남이라는 사실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 이거 그건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지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거 혹시 몰카야?”
자신을 걱정시킨 오빠를 향한 복수 뭐 이런 거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
“아…. 아니구나.”
하지만 돌아온 것은 서슬 퍼런 눈빛이었다.
씰룩거리는 입 모양을 보니 욕을 한 사발 하고 싶은데 참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도시가스 폭발 이런 건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건물이 펑펑 터져 나가고 무너지는 걸 보면 떠오르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게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걸.
그래서 진실을 외면하고자 하는 발버둥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옆에서 들려온 지아의 목소리는 나를 현실로 소환했다.
“도연우 길드장님이 싸우고 계셔.”
“연우 형이 싸워? 누구랑? 그 괴물이랑 동수를 이룰 만한 존재가 지구상에 있다고?”
“나도 정확한 건 모르겠는데. 테러리스트래.”
“…또?”
올해만 벌써 몇 번째 테러인가?
황당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MC 캠에 찍힌 걸 보면 10대 중반의 소년인데….”
왠지 말을 하다 머뭇거리는 지아.
잠시 입술을 짓씹으며 고민하는 기색을 내보이던 지아는 내가 바라보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중국어로 강현을 찾았어.”
그제야 나는 지아가 머뭇거렸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못난 오빠가 또 위험한 곳을 스스로 찾아갈까 걱정되었던 것일 터.
하지만 그 걱정을 알면서도 나는 갈 수밖에 없다.
연우 형이 상대하고 있는 괴물은 나를 찾아온 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