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엘릭서.
절망적이게도 내 계획은 무참히 실패했다.
나름 완벽한 계획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상대를 너무 얕본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한기가 어린 차가운 눈동자.
그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태고룡 쿠아르탐파가 떠오를 정도 압도적인 기세를 뿜어내던 ‘마녀’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오빠’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거네?”
한 세계의 정점에 있던 괴물을 떠올릴게 할 정도로 흉흉한 기운을 뿌리며 지아는 전방위적으로 나를 압박해왔다.
“어…. 정말 나는 구호품만 전달하고 돌아오려고 했거든? 그런데 연우 형이….”
미약한 반론의 불씨를 피워봤지만, 곧바로 불어온 북풍한설과 같은 목소리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그러니까 도연우 길드장님이 메시지 하나 보낼 시간도 없을 정도로 빡빡하게 일을 시켰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건 아닌데 왜 연락 안 했어? 집에서 걱정하는 사람 생각은 안 했어?”
낭패다. 퇴로가 없다.
솔직한 말로 전혀 생각을 못 했다.
청심원 시절부터 여태까지 ‘인생은 혼자 사는 거지’를 외치며 주변에 지인이라곤 기적 형님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친혈육이 생겼다고 그 성격이 한순간에 바뀔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때 얼음 마녀처럼 싸늘한 기운을 내뿜던 지아의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나는 어딜 가면 간다고, 누굴 만나면 만나다고 다 오빠한테 메시지 보냈는데, 오빠는…. 흑.”
이윽고 뿌옇게 차오르던 습기는 한 방울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내가 죽일 놈이다.
내가 죄인이야!
핵미사일이 날아왔다는 사실에 급발진해서 창천국으로 날아가지만 않았어도 저 예쁜 눈에 눈물을 고이게 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저기…. 지아야. 오빠가 잘못했어. 미안해. 다음부터는 꼬박꼬박 메시지 보낼게. 울지 마. 응?”
“흐끅. 구호품만 전달하고 온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틀 동안 연락 한번이 없을 수가 있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동생에게는 어떤 변명을 해야 하는 걸까?
“뉴스에서 오빠가 재해급 몬스터 잡으러 갔다는 말 듣고 내가…. 내가…….”
“…….”
동생에겐 위험하니 던전에 들어가지 말고 사업을 도와달라 말했던 놈이 정작 자기는 누가 봐도 위험한 장소만 찾아다녔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
‘하아. 지친다. 지쳐.’
다 큰 동생이 우는 것을 달래느라 꼬박 1시간 동안 빌고 또 빌었다.
어지간하면 화라도 내 봤을 테지만.
그 큰 두 눈에서 아무 말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그냥 곧 죽어도 내가 죽일 놈인 게 확실했다.
역지사지로 지아가 한 이틀 아무 연락이 안 된다면 나는 저것보다 더 화를 냈을 것 같았다.
25년 만에 만난 친혈육.
‘아니면 동생 찾겠다고 대한민국을 뒤엎었을 수도….’
저 아이를 잃는단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찔했다.
과거의 나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라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기도 했고.
결론은 뭐냐?
실시간 위치확인 앱을 까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모태 솔로 30년) 이상한 앱을 여자친구도 아닌 동생과 깔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 앱을 설치하는 것만으로도 지아의 서러움 지수가 큰 폭으로 꺾이는 것 같아, 이게 뭔 대수냐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줘도 아깝지 않을 동생인데.
그렇게 지아를 달래고 들어 온 방 안.
털썩.
침대 위로 몸을 던진 나는 이번 싸움에서 얻은 것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마도 위성이 196개.’
이걸로 나는 어지간한 국가보다 위성을 많이 보유한 개인이 됐다.
‘SS급 각성자의 인벤토리 11개.’
아직 인벤토리의 내용물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명색이 SS급 각성자들인데 싸구려 아이템은 아닐 거란 기대가 있었다.
‘육합귀문진과 혼천미로진.’
이걸로 굳이 내 인벤토리를 분리하지 않더라도 적을 가둘 방법이 생겼다.
가장 좋은 점은 더는 논개작전을 펼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지난날 아공간 특성을 적용받기 위해 초개처럼 몸을 던져야 했던 기억이 있는 나로선 꽤 만족스러운 스킬들이었다.
이젠 약간의 마나와 재료 그리고 스킬 발동만으로도 아공간을 펼칠 수 있게 된 셈이니까.
그것도 좁은 입구로 꾸역꾸역 적을 밀어 넣을 필요가 없는 아공간을.
‘여기까지가 애피타이저지.’
그리고 이것들은 메인 디쉬가 나오기 전 입가심에 불과했다.
‘재해급 몬스터 세 마리.’
물론, 함께 싸운 연우 형과 분배비율을 조절해야겠지만 내 지분이 큰 것은 당연했다.
한울 길드원들이 해체, 운반까지 해줬으니 연우 형의 비율이 조금 올라간다 해도 3을 넘기긴 어렵지.
그중 아마존의 왕 블랙 다이아몬드는 체구가 작은 탓에 내 인벤토리에 들어와 있기도 했고.
그것만 해도 대충 20조는 내꺼다.
세금 내고 경매수수료 내고 하면 조금 줄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15조 정도는 계좌에 꽂힐 터.
하지만 이것 또한 소소한 것에 불과했다.
‘진짜는 이거지.’
전투 보상으로 받은 보너스 스탯은 이미 다 사용했고 남은 건 무료 뽑기 이용권 300매와 랜덤 룰렛 이용권 30매다.
그중 나를 흥분되게 하는 건 당연히 랜덤 룰렛 이용권이었다.
‘뽑기 이용권은 쟁여놓은 것만 수천 장이니까. 뭐….’
이따금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한두 장 얻는 게 전부였던 랜덤 룰렛 이용권이 무려 30장이다.
재해급 몬스터라 그런지 전투 보상도 재해급이다.
기껏해야 랜덤 룰렛인데 왜 이렇게 좋아하냐고?
그건 지켜보면 안다.
톡.
-랜덤 룰렛 이용권 1매를 사용하시겠습니까?
-[Y/N]
톡.
모습을 드러낸 룰렛은 처음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천 개의 칸, 그 안에 적혀있는 천 개의 아이템.
겉으로 보이는 것은 큰 변화가 없었지만.
‘중요한 건 그 내용물이지.’
그 내용물에 어마어마한 변화가 있었다.
‘처음 룰렛을 돌린 땐 D급 아이템만 나와도 대박이라고 했었는데….’
바람신의 걸음.
진화의 열매.
행성파괴자(Planet destroyer).
……
……
이제는 이름만 봐도 뭔가 있어 보이는 아이템들이 수두룩했고.
그중엔.
엘릭서(Elixir).
불로불사, 무병장수, 신의 음료라 불리는 엘릭서가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상점에서 검색했던 창조주의 엘릭서와는 이름이 달랐지만 뭐 어떤가?
엘릭서는 엘릭서.
이름만 봐도 어마어마한 효능을 지닌 아이템일 게 분명했다.
‘문제는 저걸 뽑을 수 있느냐 하는 거지.’
천 개나 되는 칸에 홀로 반짝이는 엘릭서.
가장 탐나는 물건이긴 한데 나올 확률이 천분의 일이다.
‘다음 룰렛에 엘릭서가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쩝.’
머릿속으로 행복회로를 돌리던 나는 이내 현실을 직시하고 룰렛을 돌렸다.
띠리리리리.
사행성 도박장에서나 나올법한 경쾌한 전자음과 함께 돌아가기 시작한 룰렛.
관리자일지 창조주일지 모를 도박중독자가 만들어 놓은 룰렛은 아주 빠른 속도로 돌아갔고.
띠리리리. 리. 리. 릭.
“……?!”
그 끝에 화살표가 가리킨 아이템을 본 나는 괴성과 같은 외침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와--아악!!”
이래서 도박중독자가 만들어지나 보다.
엘릭서.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엘릭서가 떴다.
그리고.
콰아아앙!!
방문이 박살 나며 여전사도 함께 소환되었다.
“오빠! 괜찮아?!”
붉은 화염이 일렁이는 지옥참마도를 뽑아 든 여전사가 내 안부를 물어왔다.
근데 동생아 내가 시스템 상점에서 그거 구매했을 때 화염 옵션은 없었던 것 같은데 왜 불이 나오는 거니?
***
“이게 엘릭서라고?”
엄지손가락 크기의 보라색 병을 손에 쥔 지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했다.
“…응.”
오밤중에 소리를 질러 동생을 놀라게 한 죄로 옵션조차 확인하지 못한 엘릭서를 지아의 손에 쥐여준 나는 다소곳하게 앉아 그저 애처로운 눈으로 포션병을 바라볼 뿐이었다.
“근데, 엘릭서가 뭐야? 겉으로 보기엔 별거 없어 보이는데.”
아니야, 별거 있어. 그러니까 그걸로 저글링 하지 마.
포션병이 허공으로 떠오를 때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내 눈동자 때문이었을까?
“풋. 여기.”
지아는 공깃돌처럼 던지고 놀던 엘릭서를 내 손에 쥐여주었다.
“자 이제 말해봐. 그게 뭔지.”
“어…. 잠깐만.”
나는 지아에게 잠시 기다려달라 말한 뒤 아이템 정보를 훑었다.
뭘 알아야 설명을 하지.
[아이템: 엘릭서]
[등급: EX급]
[설명: 연금술의 신 에뒤르당케가 인간 시절 현자의 돌로 연성해낸 신의 음료. 엘릭서를 만들어낸 에뒤르당케는 그 업적을 인정받아 연금술의 신이 되었다.]
[상세 설명: 복용 시 특성 불노(不老), 천독불침(千毒不侵), 금강(金剛)중 하나를 선택해 습득할 수 있습니다. 복용 시 모든 스탯이 100씩 증가합니다. (특수 스탯 포함.)]
누가 그랬던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그 말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말이 분명했다.
‘왜 특성이 죄다 반 쪼가리야? 그마저도 하나만 고를 수 있다고? 아 놔…….’
[아이템: 창조주의 엘릭서]
[등급: 신(神)급]
[설명: 전(全)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가 만들어낸 엘릭서. 필멸자가 복용 시 불로불사, 무병장수, 만독불침, 한서불침, 금강불괴, 천무지체, 무한의 마나홀의 특성을 모두 얻을 수 있다. 격(格)을 갖춘 존재가 복용 시 신성(神聖)을 얻을 수 있다.]
참고로 이게 상점에서 다시 확인한 창조주의 엘릭서가 가진 스팩이었다.
어…. 솔직히 말하면 창조주의 엘릭서에 비해 급이 많이 떨어졌다.
창조주의 엘릭서는 무려 일곱 개 특성을 모두 주는 건 물론이고 부가옵션으로 신성까지 붙어있는 데 반해.
연금술의 신이 만든 엘릭서는 이름만 같은 엘릭서지 비교하는 게 민망할 정도였다.
‘이건 뭐 짝퉁이냐? 중국산 엘릭서야?’
그렇게 내가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지아가 물어왔다.
“왜 그래? 별로야?”
“아니. 나쁘진 않은데….”
좋지도 않다.
없는 것보다 낫지만 그렇다고 굳이 필요한가 싶은 특성들이라 설명하기 모호했지만, 성심을 다해 좋은 점을 부각해 설명했다.
지아에게 엘릭서를 먹이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거든.
그때 지아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던졌다.
“근데 오빠. 특수 스탯이라는 건 뭐야?”
“어?”
“상세 설명에 특수 스탯을 포함해서 모든 스탯을 100씩 올려준다는 말이 쓰여있다며.”
“어…. 그랬지.”
“그 특수 스탯이라는 게 뭔데?”
지아의 물음에 나는 엘릭서를 지아에게 줄 수 없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특수 스탯. 그건….
[특수 스탯]
뇌기:5931
신성:10
바로 뇌신일체를 사용하는 데 필요한 뇌기와 사망 선고 권능을 사용할 때 소모되는 신성 스탯을 말하는 것이었으니까.
뇌기 스탯이야 고작 100 정도가 있고 없고 크게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신성 스탯은 다르지.’
신성 스탯은 얘기가 달랐다.
‘재해급 몬스터 세 마리를 칼질 한번 없이 잡을 수 있다.’
지금 살아남아 있는 재해급 몬스터는 여섯 마리.
그중 세 마리를 홀로 처리할 수 있다는 건 언제 있을지 모를 교단의 공격을 방어할 때 사용할 큰 힘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사도를 상대로 필요할지도 모르고.’
내 망설임을 느낀 걸까?
지아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마셔.”
“응?”
“오빠한테 필요한 거잖아. 괜히 나 때문에 고민할 필요 없어.”
천사다. 내 동생은 천사가 분명하다.
지아는 친절하게 내가 선택해야 할 특성까지 정해줬다.
“특성은 금강이라는 특성이 가장 좋아 보여. 오빠.”
“어?”
“꼭 그거 선택해야 해 알았지?”
지아의 당부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꼼짝없이 지켜보는 앞에서 엘릭서를 마셔야 했다.
그렇게 내가 엘릭서를 마시고 난 이후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지아는 해피니스 시스템에 많은 관심을 내비쳤고, 우리는 룰렛과 뽑기를 하며 밤을 새웠다.
나오는 아이템 하나에 함께 웃고 함께 화를 내며.
오랜만에 함께하는 ‘남매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