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무력시위 (5).
강현이 육합귀문진 안에서 천호단의 각성자들을 맞이하고 있을 무렵.
쉬샤오밍은 남경과는 멀리 떨어진 신강성에서 때아닌 등산을 하고 있었다.
산세가 험하고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아 위험하기 그지없는 산행이었지만 쉬샤오밍 또한 SS급 각성자였기에 산을 오르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산을 오르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앞에, 험준한 산세로 사방이 가로막힌 거대한 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운무가 낀 거대한 분지.
그곳으로 통하는 입구도 하나뿐이라 하늘을 날 재주가 없는 이상 침입할 수 없는 천연의 요새였다.
그 분지의 입구에서 걸음을 멈춘 쉬샤오밍이 자신을 호위하고 있는 천호단의 단주 장표에게 말했다.
“가서 노야께 기별을 넣어라.”
“네. 주군.”
쉬샤오밍의 명에 답을 한 장표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분지의 운무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잠시 후.
운무를 빠져나온 장표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쉬샤오밍 앞에 부복했다.
“노야께서 출입을 허하셨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주군.”
“음….”
그의 창백한 얼굴에서 무엇을 느낀 걸까.
쉬샤오밍은 깊은 침음을 뱉어내며 걸음을 움직였다.
장표는 그런 쉬샤오밍의 뒤에서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출입을 허락받은 것은 오직 한 명.
그의 주인뿐이었으니까.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
차갑기보다는 끈적하게 와닿는 안개를 헤치며 나아가는 쉬샤오밍의 걸음걸이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분지를 감싸고 있는 이 운무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운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라혈무진(修羅血霧陣).
일만 명의 생혈을 뽑아 만들어낸 이 죽음의 절진.
술자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이가 진법에 발을 디디면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게 만드는 사진(邪陳)이었다.
저벅저벅.
짙은 운무를 뚫고 걸음을 옮기길 얼마나 지났을까.
화악.
쉬샤오밍은 갑자기 환해지는 빛을 보며 끈적하게 자신을 잡아끌던 죽음의 안개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낡디 낡은 모옥(茅屋) 한 채와 마당에 만들어진 작은 연못과 텃밭.
그 거대한 분지에 세워진 것 치고는 작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오랜만이구나.”
그 순간 어디선가 낭랑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쉬샤오밍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신도 서효명(쉬샤오밍)이 교주를 뵙습니다!”
신도(信徒) 그리고 교주(敎主).
서효명의 행동과 그 입에서 터져 나온 외침은 쉬샤오밍을 천인으로 믿고 따르는 13억 중국인들이 들으면 경악을 금치 못할 외침이었다.
탁.
그렇게 머리를 조아린 서효명 앞에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한 소년이 내려섰다.
이제 열다섯이나 되었을까?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칼과 날카롭게 쭉 뻗은 짙은 눈썹 아래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눈.
새하얀 피부에 오뚝한 코와 그린 것처럼 붉은빛을 내는 입술.
누가 봐도 탄성을 토해낼 만한 미소년은 거만하게 눈을 내리깔고 서효명을 내려다봤다.
“그래. 일 처리는 어찌 되었는고?”
노야(老爺)라 불리는 소년의 물음에 서효명은 고개를 조아린 채로 보고를 올렸다.
한국을 도발했고, 핵미사일을 날렸으며 대역을 내세워 노야가 명한 목표물을 유인해 창천국에 가둔 것까지.
“제갈세가의 육합귀문진과 혼천미로진을 펼쳤다? 제법 머리를 굴렸구나.”
“거기에 천호단 오백 명을 보내놨으니 놈이 하늘을 나는 재주를 가지고 있더라도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겁니다.”
자신 어린 서효명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지 노야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구나. 네 말이 지켜져야 할 것이다. 앞으로도 그 자리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다면 말이다.”
칭찬이라기보단 섬찟한 경고에 가까운 그 말에 서효명은 아무 말 없이 더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자신 앞에 있는 노야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을 지닌 인물이었다.
217명의 중화 영웅 중 절반에 가까운 100여 명을 키워낸 장본인이자 대격변 이후 중국 내부에 암암리에 퍼진 명교(明敎)의 교주이기도 했으니까.
비록 외모는 십 대 중반의 소년이었으나 그 안에는 백수(百壽)가 넘은 노인이 들어앉아 있었다.
하늘에 닿은 무공으로 흐르는 시간마저 이겨낸 진정한 신인(神人).
그것이 바로 노야의 정체였다.
그렇기에 25년 동안 독재자로 중국을 지배해온 서효명조차도 그 발치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끌끌. 들어오너라. 먼 길을 왔으니 차라도 한잔해야지.”
몸을 일으킨 서효명은 행여 노야의 그림자라도 밟을세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움직여 그의 뒤를 따랐다.
서효명은 알고 있었다.
차를 권했으나 노야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목표물의 사망 소식이라는 것을.
‘이제 천호단이 그자의 목을 가지고 연락해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구나.’
그렇지 않으면 저 모옥에서 살아나올 수 없다는 것도.
그렇기에 노야를 따라 모옥에 들어서는 그의 발걸음은 만근의 추를 매단 듯 무겁기 그지없었다.
***
육합귀문진이 펼쳐진 이후 밀실 안엔 기존의 세상과 다른 환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자욱한 운무가 모든 것을 뒤덮은 잿빛의 세상.
빛도 어둠도 없는 모호한 세계.
그 안에 부는 음산한 바람과 귓가를 울리는 귀곡성.
그 세상 안에 발을 디딘 열 명의 각성자는 주변을 경계하며 이리저리 복잡하게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진법안에서 이동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처럼.
선두에 선 자가 내디딘 자리를 그대로 밟으며 이동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어미 오리를 따르는 새끼오리들 같았다.
난 뭐 하고 있냐고?
허공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중이다.
육합귀문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칭호 효과가 적용됩니다. ‘호의’와 ‘악의’가 시각화됩니다.
-특성: 공간시 S(LV9)가 발현됩니다. 공간의 정보를 추출합니다.
-‘칭호: 인필리언의 구원자’가 ‘특성: 공간시’와 시너지를 일으킵니다.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가 시각화됩니다.
-특성: 공간의 미학 SSS (LV1) 를 발현하시겠습니까?
-Y/N
-공간의 미학 발현 시 ‘육합귀문진’의 정보를 추출하실 수 있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통하지 않았다.
공간계 마법과 술법에 천적이나 다름없는 특성을 수두룩하게 지닌 내게 육합귀문진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저기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이들에게 위협이 되었다면 모를까.
‘일단 머릿수를 좀 줄여볼까?’
-특성: 아공간 조작 S(LV2)가 발현됩니다.
-조작할 대상을 지정해 주세요.
내 홈그라운드나 다름없는 아공간을 만들어주고 그 안에 직접 들어오신 손님들이니 찾아가는 서비스를 조금 해줄 생각이다.
‘물론 저들은 원하지 않겠지만.’
왜 이런 귀찮은 짓을 하냐고?
나도 당연히 사망 선고 권능으로 한 놈씩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태우는 게 편하고 좋다.
하지만 알다시피 권능 사용엔 신성 스탯이 필요하고 내게 남은 신성 스탯은 고작 10뿐이었다.
어쩌겠는가.
능력이 안 되니 몸이 고생해야지.
***
“헉헉.”
공우량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급하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어디야! 나와 씨발!!”
원래라면 육합귀문진의 생문(生門)을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였어야 했지만 공우량에겐 그렇게 침착하게 움직일 만한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와!! 나오라고. 이 개새끼야!!”
공포에 물들어 발작적으로 고함을 내지르는 공우량.
SS급 각성자로 중화 영웅으로 불리며 천인을 수호하는 천호단의 일원이라는 명예와 자긍심으로 살아가는 그를 이토록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펼친 육합귀문진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귀신이었다.
불과 10분 전.
천호단의 동료들과 육합귀문진에 들어선 공우량은 어느 순간 위화감을 느껴야만 했다.
‘발걸음 소리가 줄었어.’
처음엔 자신이 잘못 느낀 줄 알았다.
생문을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지만, 육합귀문진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었으니까.
그래서 동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진법의 영향 정도로 치부했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
“어…어디로 간 거지?”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아 함께 들어왔던 동료 중 남은 것은 그를 포함한 다섯 명뿐.
“바로 뒷사람이 사라졌는데 그걸 느끼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나, 난 그냥 진법의 영향으로 내 기감이 흐려진 걸로만 생각했다네.”
남은 건 혼란과 동료를 향한 의심.
“설마 자네가 생문을 잘못 밟은 것은 아니겠지?”
“그게 무슨 소린가? 난 제갈묘재에게 전해 들은 그대로 생문을 밟아 이동했네. 내가 생문을 잘못 밟았다면 이렇게 자네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지도 못했을 거란 말일세!”
하지만 그들의 눈앞에서 동료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본 순간.
그때야 그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 남궁현…? 남궁현! 어디로 갔나?!”
“조, 조금 전까지 분명 내 옆에 있었는데….”
그리고 그 깨달음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시퍼렇게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눈앞에서 하나씩 사라져가는 동료들.
그것은 각성 등급을 떠나 정상적인 뇌 구조를 가진 인간이라면 감내하기 힘든 공포였다.
마지막까지 함께 하던 동료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공우량은 선택했다.
“헉헉.”
그 공포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것을.
“어디야! 나와 X발!!”
하지만 공포를 등 뒤에 두고 도망치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공포를 마주하는 것과 공포에 쫓기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강현은 공우량의 머리 위 공간에 몸을 숨긴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저자가 마지막이군.’
SS급의 각성자가 무려 열 명.
모태 솔로 특성이 발현됐다 하더라도 한꺼번에 상대하기엔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꼬리부터 야금야금 잘라내 적의 전력을 줄이는 것.
‘육합귀문진이라는 판까지 깔아줬는데 잘 써먹어야지.’
놈들이 나를 가두겠다고 펼친 육합귀문진.
덕분에 밀실은 현세와 별개의 공간이 되어버렸고 나는 아공간 조작 특성과 아공간 변환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거의 이기라고 등 떠미는 수준이었다.
‘그럼 마무리를 해볼까?’
미친 듯이 사방으로 스킬을 난사하고 있는 50대 중반의 사내.
이제는 혼자가 돼버린 그를 처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빠지지지지직!
붕천격의 마나 회로로 뇌기를 흘려보내자 오른손 주먹에 뇌전이 맺혔다.
새하얀 전류를 사방으로 뿜어내는 푸른색의 구체.
‘아공간 안이니까 될 것 같은데. 한 번 해봐?’
나는 그것을 발출하지 않은 채로 뇌기를 응축하기 시작했다.
기존에 없던 또 다른 시도.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응축된 뇌기는 더욱 푸른빛을 띠었고 방전되던 전류의 양은 줄었다.
‘이런 식으로도 응용이 되네. 하하.’
깨달음이라는 게 그랬다.
나는 연우 형이 일섬만영을 변칙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떠올리며 만뢰를 만들 생각을 했고.
결국, 성공했다.
그리고 그 성공은 내게 또 다른 시도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분열된 만 개의 뇌전보다 강한 한 개의 벼락을 만들어내면 어떨까?’
그 시도 속에 만들어진 뇌구(雷球).
그것은 하늘을 무너뜨린다는 광오한 이름을 가진 붕천격의 마나 회로를 따랐고, 그 안에는 뇌기가 담겼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붕천뢰(崩天牢)라 부르는 게 맞으리라.
나는 느릿하게 주먹을 내뻗었다.
우우우웅-.
빠직거리는 방전음이 아닌 공명음을 토해내던 뇌구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며 그 크기를 키웠다.
“이. 이게 뭐야?!”
짙게 깔린 운무를 잡아먹으며 앞으로 나아간 뇌구는 이상함을 느끼고 도망을 치던 중년인을 금세 따라잡았고.
“끄아아아---!!”
곧 잡아먹었다.
빠지지지-직!
그리고 일어난 전류의 방전.
목표에 닿은 뇌구는 순식간에 축구장 두세 개 넓이의 공간을 뇌전으로 채운 후 소멸했고.
뇌구가 소멸한 후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잿가루 하나 남기지 않은 온전한 소멸.
이후 나타난 초록색 인벤토리만이 사내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유일한 흔적이 되어버렸다.
[각성자 공우량의 인벤토리]
아공간 포식으로 공우량이라는 이의 인벤토리마저 깔끔하게 삼킨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힘들겠지만 얻을 수 있는 건 모두 얻어가는 게 좋겠지?’
남은 건 하나.
짙은 운무로 가득한 육합귀문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