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노병은 죽지 않는다.
“이거 실화냐…?”
이규태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전투 명령이 떨어진 뒤 마나 건을 들고 장벽을 오를 때만 해도 꼼짝없이 이곳에서 뼈를 묻을 거로 생각했던 그였기에 그 놀람은 더욱 컸다.
물경 100만.
재해급 몬스터 빙호란 놈이 몰고 내려온 몬스터의 개체 수였다.
말이 100만이지 그가 처음 장벽 위에 서서 몬스터 떼를 마주했을 때 든 감정은 단 하나였다.
‘오늘 죽겠구나.’
자신이 서 있는 이곳이 무덤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하지만 그 공포는 한 노인이 휘두른 칼질 한 번에 산산이 부서졌다.
수천 마리의 몬스터를 일 검에 도륙해 버리는 압도적임 강함.
남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강함을 가진 노인의 존재는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기에 충분했고.
“우와아아아!!!”
그것은 이규태도 마찬가지였다.
이어서 펼쳐진 전투.
수백 문의 마나 포가 포신을 뜨겁게 달구며 포격을 퍼부었고 깡마른 노인의 칼 또한 쉼 없이 검격을 토해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몬스터의 시체가 쌓여 산을 이루고 그 피가 흘러 도도히 흐르던 두만강이 초록색으로 물들 무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이 전투가 벌어지게 된 원흉인 빙호가 몬스터들의 시체를 짓밟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몸길이 200m 체고 50m.
장벽에서 수백 미터가 떨어진 곳에 걸음을 멈췄음에도 그 체구와 기세는 압도적이었다.
“으…으아….”
전투를 벌이던 병사들이 순간적으로 패닉에 빠질 정도로.
쾅! 콰콰콰쾅!
걸음을 멈춰선 녀석에게 집중포격이 이루어졌지만, 빙호는 마나 포의 집중포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어딘가를 쳐다봤다.
그 시선이 닿은 곳에는 백발을 휘날리는 깡마른 노인이 서 있었다.
검왕 서태촌.
빙호와 눈을 마주한 서태촌은 피식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제껏 뒤에 숨어 수작질을 부리던 놈치곤 꽤 당당하구나.”
마치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고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빙호의 눈동자가 거슬렸기 때문이다.
꿀꺽.
마나 포션으로 비워진 마나홀을 채운 서태촌은 이내 장벽의 난간을 밟고 아래로 몸을 던졌다.
탁.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줄 알았던 서태촌의 몸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마치 바람을 밟고 날아오르는 것처럼 허공을 딛고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 서태촌의 모습은 무협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허공 답보를 펼친 것처럼 보였다.
“어디 한번 놀아 보자꾸나.”
바람신의 걸음.
구름 가오리를 사냥할 때 강현이 서태촌과 구정철에게 건넸던 아이템의 이름이다.
비록 한 시간에 불과하지만, 신의 권능 일부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아이템을 받은 서태촌과 구정철은 결국 구름 가오리 사냥에 성공했고.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어 SSS급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수개월이 지난 지금.
서태촌은 구름 가오리 사냥 당시 얻은 깨달음과 태초의 별에서 얻은 마나를 모두 체화했다.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어떤 계기만 주어진다면 한계를 부수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준비가 완료된 상태.
그리고 그건 동해 한복판에서 괴수 대전을 찍고 있는 구정철 또한 마찬가지였다.
퍼-퍼펑!!
몸길이가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바다뱀 시 서펜트와 그에 비하면 작은 먼지 크기에 불과한 인간의 싸움은 놀랍게도 인간이 승기를 점하고 있었다.
퍼-엉!
주먹질 한 번에 바다가 뒤집히고.
회오오오--.
발길질 한 번에 태풍이 일어났다.
태평양을 지배하는 재해급 몬스터 시 서펜트 또한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파랑을 일으켜 거대한 해일을 만들어냈으며 물을 수족처럼 자유자재로 부려 구정철을 상대했다.
수만 개의 물의 창과 화살을 만들어 구정철을 공격했고 거대한 물의 감옥을 만들어내 가두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못했다.
바다 위를 평지처럼 달리며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투왕 구정철 앞에서 시 서펜트의 거대한 덩치는 오히려 큰 약점이 되었으니까.
퍼억!
콰콰콰곽!
키에에에엑!!
온몸을 통해 폭풍처럼 터져 나오는 연격은 단 한발의 실수도 없이 거대한 시 서펜트의 몸에 틀어박혔고.
퍼어어엉!
결국, 태평양을 지배하는 재해급 몬스터 시 서펜트를 바닷속으로 가라앉히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구정철이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뱀 대가리가 꼬리를 말았군.”
열세를 느낀 시 서펜트가 자신에게 유리한 바닷속으로 전장을 옮긴 것일 뿐이었다.
전투에서 우세를 점하고 타격을 입히긴 했지만, 결정적인 일격이 부족했다.
바다 밑 깊숙한 곳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사안(蛇眼)을 느낀 구정철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대로 놈에게 시간을 준다면 체력과 상처를 회복한 놈과 다시 전투를 치러야 할 것이고.
당장 놈을 따라 바닷속으로 들어간다면 자신에게 불리한 공간에서 싸워야 할 것이었다.
선택의 기로였다.
그때 바닷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명백한 비웃음.
“웃어?”
그 웃음은 구정철의 머릿속에서 아주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냈다.
28년 전 포항.
구정철이 SS급에 올라 화랑의 길드장 자리를 물려받은 지 몇 년 안 됐을 때였다.
포항엔 거대한 해일과 함께 해양 몬스터가 쳐들어왔고 지역 방어의 의무가 있는 화랑 길드는 포항으로 출동했다.
그리고 구정철은 그곳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빌어먹을 뱀 대가리에게.
몬스터와 싸우다가 죽는 것이 헌터의 숙명이라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만 봐야 했던 아들은 그 비통한 마음을 잊지 못했다.
으득.
“그래 오늘…. 끝을 보자꾸나.”
구정철의 나이 어느덧 여든둘.
돌아가신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때의 아버지보다 강했으며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아버지!!”
그때 해안가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0년 전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통에 갑작스럽게 길드장 자리를 이어받아야 했던 아들.
“녀석…. 왔구나.”
구지석을 본 구정철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이제 길드장으로서 업무처리 능력은 이미 자신보다 위에 있는 믿음직스러운 아들이다.
한 가지 걱정이었던 무력은 며칠 전 SS급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어 한시름 놓았다.
“아버지!! 곧 전투기가 출격한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놈을 물 밖으로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구지석의 말속에서 걱정을 읽은 구정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다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는 거대한 소용돌이와 바닷물을 하늘로 빨아올리는 용오름이 수십 개다.
마치 지구 멸망의 순간을 재현해 놓은 듯한 광경이 동해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전투기라니….
설혹 전투기가 온다고 하더라도 근처로 접근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었다.
‘저 녀석도 그걸 알고 있겠지.’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는 구정철과 그런 아버지를 만류하는 구지석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간절함이 담긴 아들의 눈을 마주한 구정철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지석아. 혹시나 내가 죽더라도 넌 나 같은 선택은 하지 마라.”
분명 들릴 리 없는 목소리건만 구정철의 말이 끝나자 구지석은 아버지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낙담한 듯이 고개를 떨궜다.
구정철은 유언과 같은 그 말을 남기고 시 서펜트가 기다리는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 때문에 그는 듣지 못했다.
“저는…. 아버지와 같은 후회를 하지 않을 겁니다.”
고개 숙인 아들의 중얼거림을.
“마법사단 준비해. 대 마법을 펼친다.”
구지석의 명령에 함께 온 길드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무언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그려지는 마법진과 그 옆에 설치되는 기계.
몇 달 전 구름 가오리를 잡기 위해 한강을 건널 때 사용했던 기계장치는 그동안 개선을 걸쳐 좀 더 세련된 모습으로 변화해 있었다.
그리고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계장치의 수가 늘었다는 점이었다.
“길드장님. 준비 완료됐습니다.”
부 길드장의 보고에 구지석이 고개를 끄덕이곤 걸음을 움직였다.
자신은 재능이 없어 아버지의 진전을 잇지 못했다.
무투파인 아버지와 다르게 자신이 각성했을 때 얻은 직업과 스킬은 마법사의 그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더 노력하고 노력했다.
때로는 식음을 전폐하고 밤잠을 설쳐가며 마법을 익히고 개발했다.
대한민국 최강이라 불리는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해선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그 성과가 눈앞에 있었다.
우웅.
낮은 공명음을 흘리며 푸른 빛을 발하는 마법진과 기계장치.
구지석과 화랑 길드의 마법사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만들어 낸, 아직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대 마법 장치.
구지석은 이것이라면 재해급 몬스터도 잡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대(大) 마법 장치 가동.”
마침내 구지석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마법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기계장치를 조작했다.
저벅.
이윽고 푸르게 빛나는 여섯 개의 마법진 중앙에 걸음을 멈춘 구지석이 마법 영창을 시작했다.
아버지를 구하고자 하는 아들로서 그리고 군과 함께 경상도의 방위를 맡은 경상도계의 수장으로서 시 서펜트를 사냥하기 위해.
***
율리아가 도망칠 틈을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연우 형도 나도 율리아를 죽일 생각이 없었으니까.
“쿨럭!”
단지 연기력이 조금 필요했을 뿐이다.
왈칵.
어차피 얼굴이 피투성이라 각혈 한번 하는 것으로 틈을 만들어주는 것은 충분했다.
“현아. 괜찮아?”
어딘지 딱딱하고 어색하기 그지없는 연우 형의 목소리가 조금 걸리긴 했지만, 연우 형이 나를 돌아보는 그 틈을 이용해 율리아는 무사히 도망쳤다.
“내 연기 어땠어? 괜찮았어? 그 사도라는 여자가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것 같지? 이 정도면 배우 해도 될 것 같지 않냐?”
“…….”
솔직히 말해 국어책 읽는 것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자라나는 배우 꿈나무에게 진실을 말하기엔 내가 너무 약했다.
그렇게 율리아가 떠나자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반구형의 결계도 사라졌다.
“그나저나 저건 어쩌죠?”
남은 문제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몬스터 사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다.
블랙다이아몬드야 그 크기가 작으니 온전히 내 인벤토리에 담을 수 있지만 다른 두 마리는 내 인벤토리가 아무리 크다 해도 들어갈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샌드 웜만 보더라도 몸통 두께가 약 500m에 길이가 2㎞에 달하지 않던가.
“그러게. 그냥 놔두고 가자니 아깝고…. 마나석만 추출해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골 아프네.”
거기에 마그마 터틀의 사체도 있으니 절대적으로 무리였다.
전에 구름 가오리를 사냥했을 때 그 사체의 경매가만 무려 10조 원이 넘었었다.
물론 구름 가오리는 처음으로 잡힌 재해급 몬스터라 어느 정도 거품인 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샌드 웜과 마그마 터틀의 사체가 가진 값어치가 어마어마할 것이란 건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일단 두고 간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지? 몬스터들 때문에.”
연우 형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고 간다고? 저걸?
몬스터들 포식시킬 일 있나?
당장은 주변에 몬스터가 없지만, 우리가 떠나면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올 몬스터가 수십만 마리는 될 거다.
귀한 신성 스탯까지 소모해 가면서 잡았는데 엄한 놈들 배를 불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도 그건데. 이대로 두고 가면 중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아서요.”
“하긴 주석까지 나서서 군대를 파견하면 무력 대응하겠다고 엄포를 놨으니, 이걸 보면 눈에 불을 켜고 차지하려고 하겠네.”
연우 형은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려 지름 10㎞에 가까웠던 결계가 사라지자 두텁게 하늘을 가리고 있던 구름층에 휑하니 구멍이 뚫린 상태였다.
이 위를 지나가는 마도 위성이 있다면 누가 봐도 봤을 거란 뜻이다.
지금 이곳 항카 호에는 전 세계의 이목이 모두 집중된 상태였으니까.
“그럼 가지고 가야 한다는 건데…. 방법이 있나?”
연우 형의 중얼거림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네. 있어요. 익힌 지 얼마 안 된 스킬이긴 한데….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는 것 같아요.”
내 대답에 연우 형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바라봤다.
“괴물 새끼…. 그런 건 또 언제 익힌 거냐?”
좀 어이가 없었다.
멀쩡한 사람보고 괴물이라니.
‘인류 최초로 EX급에 올라서고 실시간으로 진화해가던 양반이 누구보고 괴물이라는 건지….’
정작 괴물은 본인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