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함정 (3).
“무슨 소리야. 내가 리퍼의 사도라니. 신의 진명을 이렇게 함부로 부르는 사도 봤어?”
일단 율리아의 말을 부정했다.
여기서 냉큼 그렇다고 대답하는 건 오히려 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분의 권능을 사용하면서 사도가 아니라니…. 그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요?”
불신 어린 목소리, 그리고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율리아.
“내가 리퍼의 사도건 아니건 그게 이 상황과 무슨 연관이 있지? 우린 적으로 만났고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상황 아닌가?”
“그건….”
“아니, 오히려 내가 사도라면 더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사도라면 너희는 지금 ‘그분’이 만든 함정에 빠진 걸 테니.”
내 말을 들은 율리아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아마 머릿속이 복잡한 것이리라.
그때 나와 율리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연우 형이 다가와 슬쩍 귓속말을 건넸다.
“이게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이야? 설마 이게 저번에 말한 권능이라는 거야?”
순간, 푸른색 기막이 나타나 외부와 우리를 단절시켰다.
율리아를 의식한 연우 형이 기막을 펼친 것이었다.
EX급에 오르더니 마나의 활용이 더 능숙해진 느낌이었다.
스킬이 아닌 이런 기술들을 사용하는 걸 보면 말이다.
“네. 사망 선고라고, 저번에 말씀드렸던 그 권능이에요. 덕분에 저 여자는 제가 리퍼의 사도라고 오해하는 중이고요.”
“너를 사도로 오해한다고?”
연우 형은 황당하다는 듯한 눈으로 율리아를 바라봤다.
“덕분에 꽤 많은 정보를 얻었죠.”
“저쪽이 생각보다 정보의 공유가 안 된다는 거?”
“네. 그리고 서로 간에 대립이 있다는 것도요.”
연우 형의 눈이 빛났다.
그러곤 곧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들 사이에 대립이 있다? 그럼 함정에 빠진 건 우리가 아니라 저쪽인 셈이네.”
“그런 것 같은데, 일단 저 셋 중 하나는 살려 보냈으면 해요.”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
연우 형의 눈길은 마침 슬금슬금 걸음을 물리고 있는 율리아에게 닿아 있었다.
“리퍼의 계략을 신이란 놈들에게 전달할 메신저가 필요하다는 말이잖아.”
“그렇죠.”
“그럼 팔다리 정도는 잘라내도 상관없겠네…. 살아만 있으면 되니까.”
그 살기 어린 목소리에 같은 편임에도 팔뚝에 소름에 돋았다.
아무래도 연우 형은 교단의 신들과 그 사도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재해급 괴수 둘은 제가 처리할게요. 형은 사도를 맡아주세요.”
남은 신성 스탯은 70.
블랙다이아몬드를 잡는 데 들어간 신성 스탯이 30이니 남은 두 마리를 상대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물론 여기서 숫자가 더 늘어난다면 그땐 좀 힘들어질 테지만.
블랙다이아몬드 이후 통로를 통해 튀어나오는 다른 몬스터가 없는 거로 봐선 녀석이 마지막이었던 듯싶었다.
‘하긴 재해급 몬스터 세 마리에 사도 하나면 SSS급 각성자 세 명이 함께 오더라도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했겠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연우 형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기막을 없애고 가볍게 땅을 박차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이봐! 어딜 가려는 거야? 우리 하던 건 마무리 해야지?!”
그 목소리는 상큼했지만.
번쩍!
손에 들린 창끝에서 뿜어져 나간 섬광은 그렇지 못했다.
일섬은 율리아의 심장을 노리고 쏘아졌으니까.
그런 연우 형의 움직임에 반응한 샌드 웜과 마그마 터틀이 연우 형의 진로를 가로막으려는 듯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멀뚱히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내가 신경 쓰이는 듯 놈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뭐 어찌 됐건 상관없다.
놈들이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오늘 이곳에서 죽을 테니까.
“사망 선고.”
-대상을 지정해 주십시오.
놈들은 내가 블랙다이아몬드에게 권능을 사용하는 것을 확인한 순간 도망을 쳤어야 했다.
끼에에에엑---!!!!
그랬다면 천만분의 일이라도 살 수 있는 확률이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
함경도 최북단.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이 자신들의 땅이라 우기는 만주 땅이 내려다보이는 곳.
북방에서 내려오는 몬스터들을 막기 위해 세워진 높이 50m, 폭 20m의 거대한 장벽 위.
흩날리는 눈처럼 새하얀 백발을 휘날리는 검객이 저 멀리서 몰려오는 몬스터 떼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빙호. 영악한 놈이야….”
시베리아 최북단에서 내려와 항카 호에서 근 2주를 머무른 빙호는 눈구름을 만들어 마도 위성의 관측을 막고 만주벌판에 존재하는 몬스터 중 일부를 선발대로 만들어 한반도로 진격을 시작했다.
그 수가 물경 100만.
물론 그중 대다수는 몬스터 생태계의 하층부를 이루는 F급과 E급 몬스터가 대부분이었으나 물량이 물량이니만큼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서태촌은 두만강이라는 자연적 해자 너머로 몰려드는 몬스터를 바라봤다.
사람 키만큼 높이 쌓인 눈더미를 헤치며 전진해 오는 그것들은 멀리서 보면 시체를 향해 달려드는 벌레떼와 같았다.
“구가 놈은 잘하고 있나 모르겠군.”
서태촌은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는 몬스터 떼를 보며 자신이 함경도로 올 때 강원도로 떠난 구정철을 떠올렸다.
“양동 작전이라니, 몬스터가 세운 작전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군.”
서태촌과 구정철이 함경도 국경에 빙호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강원도에서도 급보가 전해졌다.
태평양을 장악하고 있는 재해급 몬스터 시 서펜트가 해양 몬스터들을 이끌고 침략해 왔다는 급보가.
누가 봐도 전력을 분산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었으니까.
“빙호가 여기 있다는 건…. 역시 함정이었단 소리겠지?”
서태촌의 시선이 몬스터 웨이브 너머의 어딘가로 향했다.
항카 호에 있어야 할 빙호가 이곳이 있으니 그곳으로 갔던 도연우와 강현은 진즉 돌아왔어야 맞았다.
하지만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는 걸 보면 그곳에서 적을 만난 듯싶었다.
“그래도 도 길드장이 갔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
어느새 자신을 추월해 버린 세기의 천재.
서태촌이 도연우를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콰쾅-!!
콰과광!!
거대한 포성과 함께 장벽 위에 설치된 마나 포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포격이 시작된 것이다.
지키려는 자와 부수려는 자.
인간과 몬스터의 거대한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콰득.
애도의 손잡이를 틀어쥔 서태촌은 마나 포탄에 휩쓸려 죽어가는 몬스터 무리 너머의 거대한 짐승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얼음을 깎아 만든 듯한 투명한 털을 휘날리는 거대한 호랑이.
빙호.
그가 단신으로 상대해야 할 대적에게 고정된 그의 눈동자는 수 킬로미터의 거리를 격해 빙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인사를…해볼까?”
이어 보폭을 벌리고 허리를 뒤틀어 발도의 자세를 잡은 서태촌은 도집 안의 애도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도집 안에 머물러 있는 환두대도의 손잡이 안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빨려 들어가며 울리기 시작한 나직한 공명음이 주변을 잠식했다.
우우우우웅-.
스걱-!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도집을 빠져나온 그의 애도가 공간을 갈랐다.
흩날리던 눈발도.
휘오오-!
휘몰아치던 바람도.
사아악!
선두에서 진격해오던 몬스터들 까지.
그의 칼에서 뿜어져 나온 한줄기 섬광에 모든 것이 갈라졌다.
서거-억!
일순간 선두에서 진격해오던 수천의 몬스터가 비명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단천세(斷天勢)
하늘을 가른다는 오만한 이름을 가진 스킬.
과거엔 서태촌을 대표하던 성명 절기였지만 지금은 SSS급 스킬 멸천세에 비해 위력이 약해 자주 사용하지 않게 된 스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본다면 단천세가 위력적인 스킬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내 인사가 마음에 들었나 보군.”
저 멀리서 자신을 노려보는 빙호와 시선을 마주한 서태촌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공식적으론 세계에 6명밖에 없는 SSS급 각성자이자 검의 최강자.
도연우라는 세기의 천재에게 추월당하긴 했지만, 은퇴해서 뒷방 늙은이로 지내기엔 서태촌은 너무 강했다.
그리고 그것은 같은 시각 동해안을 침공한 해양 몬스터들과 싸움을 시작한 구정철 또한 마찬가지였다.
쿠르릉.
콰과과광!
퍼퍼퍼펑.
마나 포의 지원사격으로 포탄이 비처럼 떨어지는 전장의 한복판.
서태촌과는 달리 몬스터 떼 한가운데로 몸을 던진 구정철의 가벼운 손짓과 발짓 하나에 몬스터들이 터져나갔다.
퍼퍽!
백야투로.
근접 박투술 최고의 스킬이라 불리는 구정철의 S급 스킬.
끼에에엑!!
분노한 몬스터들이 달려들었지만, 유언과 같은 괴성을 남긴 채 몰살당했다.
이윽고 펼쳐진 풍신퇴.
후오오오오-!
주변 공기를 빨아들이며 몸집을 키운 바람 신의 발차기는 왜 그가 투왕으로 불리는지를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크롸롹, 켁!
끼에에엑!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이 전장을 휩쓸자 뭍으로 올라오기 위해 새까맣게 몰려들던 해양 몬스터들이 바닷물과 함께 하늘로 빨려 올라갔다.
용오름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거대한 회오리바람의 뒤.
망망대해에 우뚝 솟은 무언가를 바라본 구정철의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오랜만이구나. 뱀 대가리야.”
오늘 이 사달을 일으킨 존재.
태평양을 지배하는 재해급 몬스터 시 서펜트였다.
철퍽.
구정철은 발목을 적시는 파도를 박차고 바다 쪽으로 몸을 날렸다.
파랑(波浪)이 일렁이는 옥빛 바다 위로 흰 물거품을 일으키며 달려나가는 구정철.
쿵.
콰직!
퍼퍼펑!!!
그의 앞을 막아서는 해양 몬스터들의 습격이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그 누구도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이윽고 대가리를 꼿꼿하게 새운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 서펜트의 앞에 다다른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랜만에 그 면상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길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구나.”
콰앙!
그 말과 함께 푸른색 마나가 일렁이는 주먹을 내뻗는 것으로 시 서펜트와 투왕 구정철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망망대해 위에서.
***
-SSS급 몬스터, ‘사하라의 주인’ 샌드 웜을 사냥하셨습니다. 강현 님께 전투 보상이 지급됩니다.
-…….
-SSS급 몬스터, ‘대륙의 재앙’ 마그마 터틀을 사냥하셨습니다. 강현 님께 전투 보상이 지급됩니다.
-…….
쉼 없이 올라가는 시스템 메시지가 나의 승리를 축하해줬다.
전투 한번 없이 얻은 승리라 뭔가 찝찝했지만, 승리는 승리다.
보상도 확실하게 들어왔고.
한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우 형과 율리아의 싸움은 연우 형의 일방적인 공세에 율리아가 밀리는 형국이었다.
‘저쪽은 연우 형이 알아서 잘할 테고.’
잠깐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이내 걸음을 움직였다.
지금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건 바로 샌드 웜이 만들어 놓은 통로.
덩치가 작은 블랙다이아몬드는 그렇다 쳐도 샌드 웜과 마그마 터틀은 국제적으로 지정된 집중 감시 대상이다.
수십 개의 마도 위성이 우주에서 감시하며 매시간 분 단위로 그 움직임이 보고되는 재해급 몬스터.
‘그런데 우리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보고된 게 없었단 말이지.’
그 말은 연우 형과 내가 이곳에 도착한 이후에 놈들이 움직였다는 뜻이고.
율리아가 공간 스킬을 써 우리를 가두고 연우 형과 싸웠던 1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이곳으로 왔다는 의미였다.
북아프리카와 남미 그리고 호주 대륙에 각기 떨어져 있던 녀석들을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스킬 혹은 권능일지도 모를 그것에 내가 흥미를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저 거대한 녀석들을 한 번에 옮기는 건 SSS급 텔레포트 스킬을 가진 각성자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러고 보면 바르도 공간의 틈을 이용해 행성 간 이동을 했다고 했었지?’
저 녀석들이 이동해 온 방법만 알 수만 있다면 의문을 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바르의 특성을 흡수한 나도 공간이동이 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의 실마리를.
특성 레벨이 낮을 때였다면 모를까 지금은 특성 레벨도 상당히 오른 상태였다.
물론 바르의 공간시는 EX급이었기에 지금 SS급에 불과한 내 공간시로는 공간의 틈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A급에 불과했던 바르의 아공간 조작 특성은 이미 뛰어넘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공간이동에 대한 힌트는 없었단 말이지….’
그렇게 샌드 웜이 뚫어놓은 통로에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띠링.
맑은 종소리와 함께 특수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얻은 특성.
-특성: 공간의 미학 SSS (LV1)가 발현됩니다.
공간의 미학이 발현되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