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159화 (158/202)

159. 함정 (2).

도연우가 율리아와 싸움을 시작했을 시각.

함경도 동북방을 지키는 63사단의 병사들은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내일모레가 제대인데!”

퍽!

“이! 빌어먹을!”

퍽!

“눈은!”

푹!

“왜! 치워도 치워도 계속 쌓이는 거야악!!”

한 치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쉼 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발 속에서 말년병장의 절규가 하늘 위로 메아리칠 무렵.

쿠웅-!

묵직한 대지의 울림과 함께.

웨에에에에엥-!!

비상상황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아…. X발. 실화냐?”

말년병장. 이규태는 들고 있던 삽을 집어 던지며 욕설을 내뱉었다.

“…정말. 이래야겠냐?”

하지만 제대 이틀 남기고 복무기간이 연장돼 버린 말년병장의 푸념을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들이 이토록 열심히 눈을 치우고 전투태세를 정비해야 했던 이유.

빙호가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

쩌저저저적-!

단단하게 얼어붙은 대지가 파열음과 함께 터져나가고.

키에에엑!

거대한 체구를 지닌 괴물이 지면을 뚫고 솟아올랐다.

‘빙호가 아니야?!’

하지만 놈은 내가 예상하던 빙호가 아니었다.

단단한 갈색의 외피와 솜털처럼 돋아난 촉수.

수천 개는 될법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괴성을 토해내는 녀석은 나도 익히 아는 녀석이었다.

몸통 두께 500m.

몸길이 2㎞.

이제 11마리로 줄어든 재해급 몬스터 중 하나이며 북아프리카 사하라사막의 주인이자 아프리카의 재앙이라 불리는 녀석.

“샌드 웜(Sand worm)?”

샌드 웜이었다.

근데.

‘저 녀석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사하라사막에 있어야 할 녀석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에 의문을 표하기도 잠시.

커어어엉-!

샌드 웜이 솟구치며 만들어 놓은 거대한 통로를 따라 들려오는 짐승의 외침에 나는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설마…. 아니지?”

일말의 희망이 담긴 중얼거림이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설마는 항상 사람을 잡고. 내 희망을 걷어찰 거란 걸.

후욱.

쿠쿵!

이윽고 샌드 웜이 뚫어놓은 통로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녀석.

대지를 지탱하는 굵고 튼튼한 네 발과 길고 긴 꼬리.

치이이익.

뭉툭한 머리와 작은 산이라 해도 믿을 만한 커다란 등껍질에서 쉼 없이 흘러내리는 붉은 용암이 놈의 정체성을 증명했다.

“마그마 터틀…….”

별칭, 호주 대륙의 악몽.

커어어엉!

마치 내 중얼거림에 답이라도 하듯 거대한 외침을 토해내는 마그마 터틀을 보며 나는 절망했다.

사박. 사박. 사박!

마그마 터틀이 빠져나온 붉은 용암길을 따라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귓가를 울렸기 때문이다.

탁.

그 순간 창을 든 연우 형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현아. 뒤로 물러서.”

잇달아 모습을 드러내는 재해급 몬스터의 등장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나마 연우 형하고 같이 온 게 다행인가?’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항카 호에서 움직임을 멈춘 빙호는 누가 봐도 미끼였으니까.

하지만 우린 올 수밖에 없었다.

함정인 것도 알고 미끼라는 것도 알았지만 열한 마리의 재해급 몬스터와 열한 명의 사도가 뭉치게 놔두는 건 더욱 최악이었으니까.

사박.

그렇지만, 이런 상황까지 예상하지는 못했다.

턱!

날렵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의외로 날렵하게 생긴 한 마리 흑표범이었다.

2㎞가 넘는 길이를 가진 샌드 웜이나 작은 동산을 연상케 하는 마그마 터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체구의 흑표범.

늘씬하게 쭉 뻗은 날렵한 체구와 고양잇과 동물 특유의 눈을 황금빛 보석처럼 반짝이며 주위를 둘러보는 녀석의 몸짓은.

우아하며.

고귀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뿐.

위엄 넘치면서도 우아한 걸음걸이로 걷던 녀석이 사도인 율리아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마존의 왕.

블랙다이아몬드.

아마존을 평정한 재해급 몬스터.

다른 재해급 몬스터와 비교할 수조차 없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왕이라는 이명으로 불릴 만큼 강한 존재.

우리가 있다는 것도 잊은 것인지 그 고귀하고 아름다운 왕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던 율리아는.

할짝.

왕의 까슬한 혀가 볼에 닿자 정신을 차렸다.

“아…. 고마워요.”

나는 사랑에 빠진 듯한 눈으로 몬스터를 바라보는 율리아를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보통 미친X이 아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연우 형의 공격을 막기 위해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그런 내 눈빛을 느낀 걸까?

몽롱한 눈으로 블랙다이아몬드를 바라보던 율리아의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아….”

그제야 현실을 인지한 건지 풀려있던 그녀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이런, 손님을 앞에 두고 실례를 범했네요.”

여전히 묘한 비음이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여는 율리아.

“이제 제 말을 들을 준비가 되셨나요. 도연우 씨?”

그녀의 물음은 연우 형을 향하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통역해달라는 것처럼.

나는 그런 그녀에게 턱짓했다.

할 말 있으면 해보라고.

통역할지 말지는 들어보고 판단하면 될 일이니까.

“후. 어쩔 수 없죠.”

나직한 한숨과 함께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당신들을 회유하러 왔어요. 정확히 말하면 신께서 신탁을 내리셨죠.”

“회유?”

“천방지축으로 날뛴 어떤 ‘신’ 덕분에 오해가 생긴 것 같은데 우리 ‘교단’의 신들께서는 지구를 멸망케 할 생각은 없으세요.”

율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교단의 신들과 리퍼 사이에 선을 그었다.

“리퍼의 강림이 교단의 신들의 뜻에 반하는 독자적인 행동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율리아는 내 입에서 리퍼의 이름이 나온 것에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신…. 그분의 진명(眞名)을 알고 있군요.”

“그게 그렇게 놀랄 만큼 대단한 일인가?”

퉁명스레 대꾸했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율리아, 그리고 그녀가 신이라 믿고 따르는 교단의 신들은 나와 리퍼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른다.

리퍼가 나와의 싸움에서 패배했다는(시스템에 의해 제약당하긴 했지만) 것도.

그래서 신성과 지니고 있던 권능중 하나를 나에게 빼앗겼다는 것도 율리아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앞에서 저렇게 태평할 수 없을 테지.’

리퍼의 권능 ‘사망 선고.’

아직 S급에 불과한 내가 함정임을 의심하면서도 이곳에 올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것은 하나의 대상을 지정해 절대적인 죽음을 내리는 권능.

만일 리퍼가 시스템에 의해 제약이 걸린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날 각성자 센터에 생존자는 전무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그날 그곳에 있었던 모두가 삼도천 스쿠버다이빙을 하고 있었을 거란 말이다.

물론 이제 사망 선고는 나의 권능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했다.

‘과연 이 사실을 율리아가 알았다면 저렇게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는 것에 내 모든 걸 걸 수 있었다.

신의 사도네 뭐네 하지만 고작 인간.

말 한마디로 자신을 요단강 익스프레스에 태울 수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여유를 뽐낼 만큼 율리아의 믿음은 신실해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내가 사망 선고라는 권능을 가지고 있는 걸 율리아가 모르고 있다는 것은.

‘그 말은 저들 내부에서도 알력다툼이 있다는 뜻이지.’

교단의 열두 신 사이에 알력이 있으며 정보의 교류가 원활히 되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리퍼. 이 새끼….’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지금, 내가 저것들을 죽이기를 바라는 거지?’

리퍼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자신의 종 구름 가오리와 사도인 인형사를 잃은 녀석은 다른 신의 종과 사도를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영악한 새끼….’

리퍼는, 나라는 칼을 사용해 다른 신의 세력을 깎아내려 하는 거였다.

“…신들께서는 이 세계를 더 찬란한 미래로 이끌려는…….”

그러니까 열성적으로 신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율리아와 그 옆에서 흉포한 기세를 뿜어내는 세 마리 재해급 몬스터는 내게 바쳐지는 재물인 셈이다.

“나야 고맙지.”

“…네?”

리퍼의 수작질대로 놀아나는 것 같아 기분이 찝찝하긴 하지만 주겠다는 경험치를 마다하는 건 헌터의 도리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망 선고.”

-대상을 지정해 주십시오.

놈들이 방심하고 있는 지금. 나는 이곳에 있는 적 중 가장 위험한 적에게 권능을 사용했다.

케엑---!!!

-대상이 절대적인 죽음에 저항합니다.

-신성 스탯 30이 소모됩니다.

-소모된 신성 스탯은 복구되지 않습니다.

-신성이 대상의 저항을 무효화 합니다.

-대상에게 절대적인 죽음이 선고됩니다.

바로 아마존의 왕.

블랙다이아몬드에게.

케엑. 키익…. 켁!

가지고 있던 신성 스탯 100중 30이 소모되었고, 소모된 신성은 복구되지 않는다는 게 조금 아깝기는 했지만, 솔직히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놈은 이곳에 있는 모든 적 중 가장 강했다.

사하라의 주인 샌드 웜.

대륙의 악몽 마그마 터틀.

심지어 신의 사도인 율리아보다도 강했다.

케…엑…….

그런 적을 말 한마디로 죽일 수 있다면 30의 신성쯤이야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어쩌면 연우 형이 도달해 있는 EX급에 가장 가까웠을지도 모를 녀석은 그렇게 고작 3초 만에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

“…….”

블랙다이아몬드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율리아와 연우 형은 경악이 서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심지어 은연중 흉포한 기세를 뿜어내며 연우 형과 나를 압박하던 마그마 터틀과 샌드 웜도 침묵했다.

“이래도, 회유하고 싶어?”

나를 제외하고 이곳에 있는 모두가 블랙다이아몬드의 허망한 죽음에 입을 다물었다.

단 하나.

-SSS급 몬스터, ‘아마존의 왕’ 블랙다이아몬드를 사냥하셨습니다. 강현 님께 전투 보상이 지급됩니다.

-기여도를 산정합니다…….

-전투기여도 100%.

-보상으로 보너스 스탯 1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보상으로 무료 뽑기 이용권 100매가 지급됩니다.

-보상으로 랜덤 룰렛 이용권 10매가 지급됩니다.

-경험치를 습득합니다.

-레벨업!

-레벨업!

-….

전투에서 승리한 나를 위해 축포를 쏘아 올리듯 메시지를 띄우는 시스템을 제외하고.

***

‘어…어….’

패닉.

신의 사도로 선택받아 영광된 미래를 보장받은 율리아는 눈앞에 벌어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패닉에 빠져 버렸다.

혀를 빼문 채 바닥에 몸을 누이고 있는 흑표범.

열두 사도는 물론이고 열두 마리 신수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아마존의 왕 블랙다이아몬드.

그 고고하고 아름다운 왕은 이렇다 할 전투 한번 못해보고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시, 십이 신수 중 최강이라며?!’

회유에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적을 제거하기 위해 준비한 비장의 카드 중 하나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다.

‘사망 선고?’

바로 사망 선고라는 말 한마디에….

초월에 가까운 신수를 고작 말 한마디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존재.

율리아의 떨리는 눈동자가 강현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쩐지…. 그분의 진명을 알고 있더라니. 당신 그분의 사도인가요?”

당연한 물음이었다.

죽음의 신 리퍼.

그의 권능이 아니라면 이런 허무맹랑한 광경은 만들어질 리 없으니까.

‘권능은 물론이고 신성까지 줬어.’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신의 권능이라 해도 왕에 비하면 한없이 약한 강현이 왕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설마…. 이게 죽음의 신이 만든 함정이었던 거야?’

율리아는 지금 신수와 사도를 잃고 신들 사이에서 세력이 약해진 죽음의 신이라면 이런 꾀를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율리아의 마음속에 리퍼에 대한 의심이 싹트는 순간, 강현의 머릿속에는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리퍼의 계획대로 끌려가는 것 같아서 찜찜했는데 잘하면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자신을 이용해 차도 살인을 하려 한 리퍼에게 빅엿을 먹일 아이디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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