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함정 (1).
지름 10㎞는 될 법한 거대한 은회색 반구.
그것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이는 햇살을 빚어 만든 듯한 황금빛 머리칼에 초록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녀였다.
“@!$%$%$#.”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20대 중반의 여성.
그녀는 이내 우리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다시 무어라 중얼거렸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뒤로하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스킬 사용. 언어의 마술사.”
여전히 내겐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밀려오는 거대한 쪽팔림을 감내할 만한 항마력이 없었으니까.
-스킬: 언어의 마술사 D가 사용됩니다.
-해당 언어(러시아어)를 한국어로 변환합니다.
-1.2…99.100%. 변환이 완료되었습니다.
-스킬 사용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렇게 스킬 사용이 완료된 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말이 안 통하는데 대체 어떻게 회유를 하라는 거야? 하여간 생각이 없어요. 생각….”
“누굴 회유한다는 거지?”
나는 불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을 자르고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나를 바라보는 그녀.
“너도 교단의 사도 중에 하나냐?”
잠시 말이 없던 그녀는 이내 싱긋 미소를 짓고는 우리 쪽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통역 스킬 같은 건가…. 꽤 특이한 스킬을 가지고 있네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다가오는 여성.
그렇게 10m 남짓한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춘 그녀는 다시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나는 교단의 12신 중 공간의 신을 모시는 사도 율리야라고 해요. 그쪽이 강현 씨인가 보군요.”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여자에게 쌍욕을 박을 수는 없기에 참고 있지만, 솔직한 맘으론 웃고 있는 저 면상에 죽빵을 갈겨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네 이름이 뭔지는 내 알 바 아니고. 지금 이거 네가 꾸민 짓이냐?”
“흠…. 듣던 대로 까칠하시군요. 예의도 없고.”
적을 앞에 두고 예의를 운운하는 율리아의 모습에 코웃음이 나왔지만 섣부르게 손을 쓸 수는 없었다.
이 은색의 반구형 공간은 저 율리아라는 사도의 공간이었으니까.
죽음의 신 리퍼의 사도라던 인형사가 죽은 사람을 인형처럼 부렸던 것처럼 공간의 신의 사도인 율리아는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아공간을 다루는 나보다 더 상위의 힘을 다룬다는 뜻이었다.
그런 내 속사정을 파악한 걸까?
율리아의 얼굴은 여유만만했다.
“그래도 주제 파악은 잘하시는군요. 호호.”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연우 형이 슬며시 옆구리를 찔러왔다.
“왜. 뭐라고 하는데 이렇게 얼굴이 어두워?”
나는 그제야 연우 형이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기가 교단의 12신 중 공간의 신이라는 놈의 사도라고 하네요.”
“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연우 형도 율리아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는지 크게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하긴, 사람 하나 살지 않는 몬스터 천국에 떡하니 혼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니 당연히 사도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다시 질문하지. 빙호가 움직인 거 네가 꾸민 짓이야?”
내 물음에 그녀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명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빙호를? 내가? 빙호는 신의 종. 고작 사도에 불과한 내가 움직이게 할 수 있을 리가 있나요.”
이윽고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 아름답고 흉포한 짐승은 오직 신의 명만을 따르는 신수(神獸). 그는 신의 명을 받아 이곳에 왔어요. 내가 그렇듯이.”
묘하게 발그레한 얼굴로 달뜬 신음을 내뱉듯이 말을 하는 거 보니 변태가 확실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도가 되면 다 이렇게 변하는 건지 아니면 이런 놈들만 사도로 뽑은 건지 알 수가 없네.’
사도를 만난 건 이번이 두 번째지만 첫 번째였던 인형사나 눈앞에 있는 율리아나 정상이 아니었다.
‘하긴, 눈이 사람 키 높이보다 높게 쌓인 이곳을 레깅스에 탱크톱만 입고 돌아다니는데 정상일 리 없지.’
내가 소름 돋은 팔을 문지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때였다.
“그러니까. 사도란 말이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연우 형을 돌아보자 연우 형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눈으로 율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눈빛으로 그녀를 녹여버릴 것처럼.
‘어….’
그리고 나는 연우 형의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형이 저번에 인형사에게 복날에 개처럼 발렸었지?’
연우 형의 눈빛은, 미녀를 향한 연정 따위가 아니라.
“현아. 저건 내꺼니까. 너는 나서지 마.”
지독한 향상심이라는 것을.
연우 형은 지난날 인형사에게 패배해 무너진 자존심을 율리야를 통해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단지 그녀가 인형사와 같은 사도라는 이유로.
척.
신창을 꺼내든 연우 형이 날카로운 창끝을 율리아에게 향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달뜬 얼굴로 ‘하악-.’거리고 있던 율리아가 놀란 눈으로 연우 형을 바라봤다.
그 순간.
번쩍!
한줄기 빛살이 연우 형의 창끝을 떠나 쏘아져 나갔다.
율리아의 심장을 향해서.
***
‘꿰뚫렸다.’
강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도연우의 창끝에서 쏘아져 나간 일섬(一閃)이 율리아의 심장을 꿰뚫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어머-. 제법 빠르네요?”
겉으로 보기엔 율리아가 관통된 듯 보였지만 그것은 그녀가 일섬이 날아오는 궤도에 있는 공간을 왜곡했기에 그렇게 보였을 뿐.
“그렇게 갑자기 공격하는 게 어디 있어요-. 도연우씨이-. 예쁜 몸에 상처 날 뻔했잖아요-.”
율리아는 티끌만 한 상처도 입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도연우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평상시 도연우와는 다른, 묘하게 비틀린 웃음.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저건?”
어딘가 광기가 일렁이는 눈으로 율리아를 바라보던 도연우가 창을 틀어쥐고.
타탁!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강현의 눈으로는 쫓을 수 없는 빠르기.
신속(神速)의 세계에서 도연우와 율리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난 강현은 그 모든 것을 눈으로 담았다.
한 달 전, 리퍼와 싸우기 전이였다면 그들의 싸움을 눈으로 쫓는 게 불가능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스킬 사용. 뇌신일체.”
전뢰화의 영향으로 SSS급까지 올라버린 뇌신일체 스킬은 전뢰화처럼 신속마저 뛰어넘은 느려진 세상을 구현하지는 못했지만.
‘보인다.’
신속의 속도로 움직이는 이들을 눈으로 쫓을 수 있을 정도의 ‘느려진 세상’을 구현할 수는 있었다.
그렇게 강현의 눈으로 바라본 도연우와 율리아의 싸움은 말 그대로 모순이었다.
모순(矛盾).
모든 방패를 뚫는 창과 모든 공격을 막는 방패의 싸움.
도연우의 창은 세상을 찢어발겼지만, 율리아의 몸에는 닿지 못했고.
율리아는 도연우의 모든 공격을 공간 왜곡으로 막아냈지만 정작 그녀의 공격 또한 도연우에게 닿지 못했다.
아무도 상처 입지 않는 싸움.
이게 모순이 아니면 무엇이 모순일까?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율리아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어갔다.
이곳은 그녀의 공간.
따라서 이곳에서 그녀는 전능한 신과 같은 힘을 발휘해야 옳다.
“헉헉.”
하지만 지금.
‘뭐지 이 괴물은? 신께서 하사하신 특성이 전혀 먹히지 않고 있어.’
율리아가 신에게 하사받은 특성 ‘공간을 베는 칼’은 도연우를 베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모든 공간을 베는 칼이 도연우라는 물체가 머무는 공간은 벨 수 없는 것인가.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마나를 운용해 ‘공간도(空間刀)’를 펼치던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설마….’
그것은 도연우의 격이 자신을 상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었다.
신의 힘을 받아들여 SSS급 각성자가 된 그녀를 뛰어넘는….
인간에서 신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존재.
‘설마…. 신께서 말씀하신 EX급…?’
그녀의 신은 말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그런 존재를 마주치면 일단 도망치라고.
그 존재는 인간이되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존재이며 신에 닿을 자격을 가진 존재.
초월자(超越子)라고.
‘어…. 이런 놈을 대체 어떻게 회유를 하라는 건데요오-!!’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절규를 속으로 집어삼킨 율리아는 공격을 포기한 채 방어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신의 은총을 받아 영광된 삶을 누리기 위해 신의 사도가 된 것이지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요절하고 싶어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더 강해졌네. 연우 형….’
조금은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거리가 더 벌어진 느낌이다.
지난 한 달.
연우 형이 토플란 시스템에 접속해 있는 동안 나도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 외부에 있는 던전을 다닐 수는 없기에 전용 던전에서 아공간 청소에 주력했다.
물론 몬스터들이 나오는 던전과 다르게 아공간 내에 몬스터라고 해봤자 크롤러뿐이니 레벨업이 가파르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건 나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벌써 이렇게 차이가 벌어지다니…. 정말 천재는 천재구나.’
정말 감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도연우라는 남자는.
토플란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아홉 명.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 확실하게 등급 업을 알려온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
바로 화랑 길드의 길드장인 구지석과 서 영감님의 뒤를 이어 싸울아비 길드장이 된 곽영철.
그 둘은 S급에서 SS급으로 승급을 했고 그 사실을 내게 알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직 소식이 없었다.
적어도 오늘 이곳에서 연우 형의 싸움을 지켜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면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우 형이 EX급에 올라서고도 아무 말이 없었던 것처럼 승급하고도 알리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단지 토플란 시스템에 빠져서 말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 자신의 성장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토플란 시스템은 그만큼 매력적이었을 테니까.
그때였다.
드드드드드.
아까 율리아가 이 거대한 반구를 만들기 전 소리로만 알 수 있었던 대지의 진동이 이제는 더욱 선명하게 발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아마도 내가 상대해야 할 적이 곧 모습을 드러낼 모양이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내 상대가 되어줄 녀석을 기다렸다.
왜냐고?
아까도 말했지 않은가 나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고.
연우 형의 성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지난 한 달 동안 나도 분명히 성장했다.
이 진동을 만들어낸 놈이 사도일지 재해급 몬스터일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질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상대가 누구라 하더라도 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우웅.
나는 손목에 감겨 있는 케이돈을 검의 형태로 변환한 뒤 손에 쥐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연우 형과 같은 공간에 있어서 모태 솔로 특성을 발현할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묘한 긴장감과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러고 보면 나도 미친것 같았다.
‘8개월 전엔 고블린 한 마리에도 벌벌 떨었는데….’
사도나 재해급 괴수가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호승심이라니.
미친 게 확실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적의 등장을 이토록 기대하고 있을 리가 없잖은가.
그 순간.
드드드드.
그런 내 마음에 반응하기라도 하듯 대지의 진동이 더욱 거세지고.
쩌저저적!
거대한 파열음과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땅속에서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