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152화 (151/202)

152. 재회 (2).

이창석은 푸른 뇌전을 귀기처럼 흩날리며 자신에게 걸어오는 사내를 보고도 꼼짝할 수 없었다.

자신이 펼친 은신 스킬을 믿어서가 아니라 상대의 기운에 짓눌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저벅.

푸른 뇌전을 잔영처럼 흘리며 걸음을 옮기던 강현의 발걸음이 드디어 멈췄다.

어두운 어둠 속 자신이 펼친 은신 스킬 안에서 덜덜 떨고 있는 이창석의 눈을 코앞에 두고서.

“내가 묻고 싶은 게 있어.”

강현은 뇌기가 일렁이는 눈으로 이창석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시간이 별로 없어서 되도록 빨리 일을 마무리했으면 좋겠는데…. 도와줄 수 있지?”

일 푼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이창석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차라리 불같이 화를 내거나 서슬 퍼렇게 차가운 목소리였다면 이토록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창석 또한 평탄한 인생을 산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말해.”

“뭐…뭘 말입니까?”

“전부.”

하지만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강현의 목소리는 그 어떤 위협이나 협박보다도 이창석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의뢰주! 이번 일의 의뢰주는…….”

때문에 그의 입에서는 죽어서도 비밀로 해야 하는 의뢰주의 이름과 의뢰내용, 자신들의 조직에 대한 비밀까지도 술술 풀려나왔다.

‘씨발. 의리고 나발이고 일단 내가 살고 봐야지….’

그의 본능은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자의 심기를 건드리면 제대로 죽지도 못할 거라고.

***

경기도 광주 외곽의 폐공장.

“X발!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김남형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앞에서 소리치고 있는 사내의 입을 막고 싶었다.

“위치 알아봐 줘! 의뢰금도 선입금해 줘! 해달라는 건 다 해 줬는데 일을 말아먹어?”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면목이 없었다.

“뭐? 전문가니까 믿고 기다리라고? 전문가?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의뢰주의 말처럼 의뢰주는 해줄 수 있는 지원을 다 해줬고. 믿고 기다리라 말한 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면목? 당연히 없으셔야지. C급 각성자 계집애 하나 잡겠다고 우르르 몰려가 놓고 실패를 했는데. 면목이 있으면 그게 사람 새끼겠어?”

사과해도 돌아오는 건 비아냥거림뿐 의뢰주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하-. 겨우 C급에 불과한 새끼가…. 확 죽여버려?’

고작 C급에 불과한 놈이 의뢰주랍시고 반말에 욕지거리하는 게 기분이 나빴지만, 생각처럼 죽여서 덮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선금으로 주신 의뢰금은, 말씀드렸던 것처럼 5배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상대는 무려 재계서열 10위 신성 그룹의 차기 후계자였으니까.

“뭐? 이. 씹새끼 봐라? 야. 네 눈엔 내가 거지로 보여? 어? 내가 고작 위약금 받아먹겠다고 이러는 거 같냐고.”

“…….”

“와…. 이 새끼 눈깔에 힘준 거 봐라. 한 대 치겠다? 야. 쳐봐. 쳐보라고 씹새끼야!!”

뻐억!

김남형에게 얼굴을 들이밀던 신유빈이 제 분을 못 이겨 김남형에게 주먹을 날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김남형의 수하들이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이내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신유빈의 곁에 있는 장년의 사내.

신성 그룹의 그림자 조직인 신화의 수장, 이 실장이 뿜어낸 기운에 짓눌렸기 때문이다.

단지 기운을 뿜어내는 것만으로 주변을 정리한 이 실장이 분을 참지 못하고 여전히 콧김을 뿜어내고 있는 신유빈에게 말했다.

“도련님. 그만 돌아가시지요.”

“돌아가요? 이 실장님. 일이 이 지경인데 지금 그런 말이 나옵니까?”

“회장님께서 아시면 노여워하실 겁니다.”

하지만 이 실장의 만류에도 신유빈은 화를 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럼 나는? 내 기분은 이렇게 엿 같아도 되고?”

“도련님….”

“생각을 해봐요. 이 실장님. 우리 신 씨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고아 주제에 대 신성 그룹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나랑 경쟁했다니까? 이 실장님이 내 입장이면 화가 나요? 안 나요?”

“…….”

“화. 나겠죠? 어디서 굴러온 지도 모르는 천박한 게 감히! 나랑!”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 실장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던 신유빈이 크게 숨을 내뱉고선 말을 이었다.

“후…. 경쟁을 했단 말입니다.”

지독한 선민의식과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

신유빈은 재벌 4세의 표본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실장은 그런 신유빈을 더는 제지하지 않고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하…. 씨. 그래요 갑시다.”

결국, 손을 든 것은 신유빈이었다.

지금은 비록 차기 후계자 보호를 위해 신유빈과 함께하고 있지만, 이 실장은 본래 회장인 신만철의 수하.

원칙대로라면 신유빈의 이런 방종한 짓거리를 신만철에게 보고해야 하는 감시자와 같은 위치였다.

아직 차기 후계자에 불과한 신유빈의 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머슴 새끼가.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신유빈의 마음속에 이 실장에 대한 불만이 한가득 생겨났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 실장은 할아버지인 신만철 회장의 심복이고, 자신은 이제 차기 후계자로 확정되었을 뿐이니까.

‘내 사람이 부족해.’

신유빈은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의 사람이 부족하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다.

사람이 필요했다.

명령을 내리면 똥물도 퍼마실 충실한 머슴이.

그렇게 두 사람이 폐공장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꽈르르릉-.

쿠르릉!

저 먼 하늘에서 괴수의 울부짖음과 같은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응? 뭐야 이건?”

별이 총총히 빛나는 맑은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라니 이상함을 느낀 신유빈이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볼 때였다.

꽈르르릉!!

번-쩍!

빠지지지지직!

퍼퍼퍼퍼펑!!

강령한 섬광과 함께 내리친 낙뢰가 주차되어 있던 차량을 모두 폭파해 버렸다.

불이 붙은 채 터져나가는 자동차였던 것들의 파편들.

스윽.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굳어 버린 신유빈의 앞을 이 실장이 가로막았다.

그는 지금 상황을 마른하늘에 날벼락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갈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콰아앙!

유폭되어 터져나가는 차들이 만들어낸 화염 사이로.

저벅.

묵직한 발걸음 소리를 울리며 검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화염을 뒤로 한 채 걸음을 움직이는 인영은 다른 누구도 아닌 신유빈을 향해 걸어왔다.

마치 ‘내 목적은 너다.’라고 알려주려는 것처럼.

“신유빈.”

상처 입은 짐승의 으르렁거림과 같은 목소리로 친절하게 신유빈의 이름을 부르며.

***

신유빈.

내게 재벌이라는 목적의식이 생기도록 만든 놈이다.

던전 안에 고블린을 남겨놓아 (고블린 바르가 특이 개체였던 것이지만) 본업에 충실하던 나를 고블린과 사투를 벌이게 만든 장본인이요.

입막음의 대가로 10억을 던져주곤 입조심 하라며 목숨을 두고 협박을 했던 놈.

그런데 이젠 내 동생을 납치하려고까지 했다.

물론 놈은 신아연, 이제는 강지아로 불릴 그 아이가 내 동생이란 걸 알고서 벌인 일은 아니겠지만.

중요한 건 놈과 나는 충분히 악연이라 불릴 만한 사이라는 것이었다.

거기에 악연에 가까울 것 같은 놈의 집안과 동생에 관한 것까지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벅.

그렇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대로 뿜어내며 신유빈에게 다가가는 내 앞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드문드문 하얀 머리칼이 보이는 50대 중반의 남성.

느껴지는 기운은 S급 각성자.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에 100여 명밖에 없다는 강자가 어찌 된 게 가는 곳마다 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막을 겁니까?”

“그게 내 일이니까.”

이유는 짐작이 갔다.

아마도 대현 그룹의 그림자인 비현 같은 조직일 거다.

S급인 걸 보면 그 조직의 수장일 테고.

“비키세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놈입니다.”

하지만 내 걸음을 막기에 상대는 너무 약했다.

모태 솔로 특성이 발현된 내 걸음을 고작 S급에 불과한 이가 홀로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파지지직.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색 뇌전을 보며 그는 어딘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아. 알지만 내겐 선택지가 없어. 좀 전에도 말했지만 이게 내 일이니까.”

스릉.

“그러니까 자네는 자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해. 난 내 일을 할 테니까.”

한 자루의 검을 든 채 신유빈의 앞을 가로막은 남자의 모습에선 S급 각성자의 기세보다는 월급을 받고 살아가야 하는 이 시대 샐러리맨의 비애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대화는 끝났으니 남은 것은 싸움뿐.

나는 뇌기를 뿜어내 한 자루 창을 만들어냈다.

파지지직!

내 손에 쥐어진 푸른색 뇌기가 창의 형상을 한 채 허공에 스파크를 튀겼다.

그 잔상이 사라지기 전, 나는 느릿하게 창을 찔러 넣었다.

창왕(槍王) 도연우의 SS급 스킬.

만영창(萬影槍).

변형.

만뢰창(萬雷槍).

연우 형에게 배운 만영창의 마나 회로에 뇌기를 실어 만들어낸 나만의 스킬.

느릿하게 앞으로 쏘아져 가던 뇌전의 창이 하나둘 숫자를 늘려가더니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으며 만개의 창을 만들어냈다.

“헉!”

“이. 이게 뭐야 씨발!!”

“피해!!”

어차피 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나의 적.

굳이 하나씩 상대하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허공을 가득 채운 뇌전의 창을 본 이들이 패닉에 빠져 엄폐물을 찾아 몸을 날렸지만 상관없었다.

꽈르르릉--------!!

뇌전은 그들보다 빠르니까.

그렇게 만 개의 벼락이 떨어져 내리고.

퍼-어-엉----!

“크아아아악!”

폐공장 안엔 거대한 폭음과 비명이 가득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낙뢰의 폭우 속에서 멀쩡하게 입을 놀리는 유일한 사람.

“너…너. 내,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신유빈은 바닥에 주저앉아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 이 실장! 막아! 막으라고!! 이 실장! 이 개새끼야!! 돈을 받아먹었으면 돈값을 해! 이 버러지 새끼야!!”

내가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엉덩이로 바닥을 쓸며 뒤로 물러나던 녀석은 검게 그을려 쓰러져버린 이 실장이라는 자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너, 너 이 새끼. 내, 내가 신성 그룹 후계자 신유빈이야 이 새끼야! 누가 시킨 건지 모르겠지만 네가 나한테 이러고도 대한민국에서 발 뻗고 살 수 있을 거로 생각해?! 날 건드리면 네 놈이나 너한테 사주한 놈이나 다 뒤지는 거야!!”

잔뜩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으면서도 독설을 내뱉는 걸 보면 이놈도 참 여러모로 난 놈이다 싶었다.

척.

내가 그런 놈의 앞에 걸음을 멈춰 세우자.

놈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어진 놈의 말은 걸음을 멈춘 것을 후회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잘 생각했어. 저 버러지보다 실력이 좋네. 얼마 받고 일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밑에서 일해 보는 게 어때? 지금 받는 돈의 두 배를 주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섰던 사람을 두고 버러지라니….

한마디 한마디에서 녀석의 인성이 느껴졌다.

‘재벌 후계자라는 것들이 다 이런 건지, 아니면 이놈이 유독 쓰레기인 건지.’

굳이 놈의 헛소리를 더 들어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기억나?”

그래도 마지막 기회를 줬지만.

“네가 누군데! 뭐 때문에 나한테 이러는 거야?! 두 배가 부족해? 그럼 세 배를 줄게!”

놈은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직접 얼굴을 맞댄 적은 없다 해도 자기 때문에 죽을 뻔했던 사람인데 말이다.

“아쉽네. 마지막 기회였는데.”

빠지지직.

놈은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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