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토플란 시스템 (2).
“상태창도 열려. 스탯 포인트도 투자할 수 있고, 시스템 안에서 스탯을 올리면 현실에도 반영되더라.”
잠깐이지만 연우 형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해피니스 시스템과 비슷하다고요?”
“응. 상점이나 퀘스트는 없는 것 같은데, 시스템 메시지나 상태창은 확실히 네가 말한 것과 똑같던데?”
“허….”
연우 형의 말을 들은 나는 직접 토플란 시스템에 접속했다.
설명을 듣는 것보다 직접 확인해 보는 게 확실히 와닿을 테니까.
푸른색 포탈을 넘자 보이는 건 하얀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과 초록색 들풀이 자란 거대한 평원이었다.
띠링!
알림음과 함께 눈앞에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토플란 초인 육성 시스템에 접속하셨습니다.
-신규 접속자입니다. 아이디를 생성하시겠습니까?
놀라운 일이었다.
처음엔 해피니스 시스템 메시지인 줄 알았다.
그만큼 토플란 시스템은 해피니스 시스템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시스템 메시지도.
상태창도.
상점창과 퀘스트 같은 건 구현이 되지 않은 듯 보였지만 대단한 시스템임이 확실했다
“아이디 생성. 강현.”
-신규 아이디 강현을 생성합니다.
-본 토플란 초인 육성 시스템(이하 토플란 시스템.)은 유저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육성 커리큘럼을 제공합니다.
-본 시스템이 강현 님의 데이터를 측정하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동의.”
-측정을 시작합니다.
-접근 불가 ‘상위시스템’의 사용자입니다.
-‘상위시스템’ 해피니스 시스템에 유저의 데이터를 요청합니다.
-허가되었습니다.
-강현 님의 데이터를 로드 합니다.
더 놀라운 점은 토플란 시스템이 해피니스 시스템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과 해피니스 시스템이 나의 데이터를 토플란 시스템에 제공하는 것을 허가했다는 점이었다.
이는 이전에 시스템과 교류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토플란이란 행성의 대마법사 중 하나가 시스템 사용자일지도 모르겠는데?’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유사한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도, 데이터를 공유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테니.
-데이터를 기반으로 설정된 강현 님의 등급은 S급이며 성장 커리큘럼은 올라운더(all rounder)입니다.
올라운더.
다재다능이라는 의미다.
아마도 고르게 찍힌 스탯의 영향인 듯싶었다.
-전투 테스트를 시행합니다.
-상대할 몬스터를 선택해 주십시오.
메시지와 함께 시야 한쪽에 리스트가 떠올랐다.
F급으로 분류된 슬라임, 고블린과 같은 몬스터부터 반신급 몬스터인 드래곤과 신급으로 분류된 마왕 이큘리스까지.
수천 종의 몬스터가 등급별로 카테고리가 나누어져 있었다.
“몬스터도 제공하는 건가?”
이것도 놀라웠다. 사용자의 성장을 위해 몬스터를 제공하는 건 해피니스 시스템에도 없는 기능이니까.
내가 놀라고 있을 때 토플란 시스템이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메시지를 띄웠다.
-해당 몬스터는 거울 마법으로 구현된 허상이며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승리 시 스탯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패배했을 때 페널티 같은 건 없는 건가?”
이번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상대할 몬스터를 선택해 주십시오.
단지 육성 시스템이라는 본분에 충실하려는 것처럼 상대할 몬스터를 고를 것을 종용할 뿐.
“이왕 하는 거 제대로 붙어봐야지.”
리스트를 뒤적거리던 나는 호기롭게 하나의 몬스터를 선택했고.
-전투 환경이 설정됩니다
-마계.
주변 풍경이 바뀌며.
-마왕 이큘리스가 소환되었습니다.
콰과과광!
마왕의 등장과 함께 끔살당했다.
***
“현아. 어땠어? 재미있지?”
밖으로 나오자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던 길드장들을 대표해 연우 형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네. 재미있네요.”
“넌 뭐하고 붙어봤어? 드래곤? 마왕? 아니면 리치 킹?”
“에이-. 도 길드장도 참. 마왕은 신급이던데 강 선생이 어떻게 마왕하고 싸우나?”
“왜요. 붙어볼 수도 있지. 그러는 이 길드장님은 뭐랑 싸우셨는데요?”
“나? 나는 SS급에 있는 오거 킹을 골랐지. 와-! 그놈 체구가 엄청 크더구먼. 저기 한 길드장 다섯 배는 되겠던데?!”
차마 마왕에게 끔살 당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쪽팔려서.
그나저나 길드장들 눈이 초롱초롱한 걸 보니 아이템의 가치는 확실히 파악한 듯싶었다.
“이제 사업 얘기 좀 하실까요?”
내 말에 각자 전투경험을 두고 대화를 나누던 길드장 들의 시선이 다시 내게 집중됐다.
“제가 좀 살펴봤는데. 이게 한 시간에 A급 마나석 1개가 소모되더라고요. 물론 사용 중일 때 이야기고요.”
내가 서두를 열자 길드장들은 각자의 의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 시간에 A급 마나석 한 개면…. 시간당 1억 가까이 잡아먹는단 소리네요. 허허.”
“그렇죠. 대신 입장 인원을 조율할 수가 있더라고요. 최소인원 한 명에서 최대 백 명까지요.”
“어 저도 그거 확인했어요. 나중에 공대 단위 레이드도 미리 연습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장점이 많은 시스템이란 건 확실합니다. 일단 상태창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있다는 거니까.”
“각성자 센터에서 하는 승급 테스트보단 직관적이긴 하더라고요. 스탯을 숫자로 보여주니까.”
“거기다 자기도 모르고 있던 자기 특성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시간당 A급 마나석 한 개가 아깝지는 않죠.”
어느 정도 의견을 나누던 길드장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장치가 이것 하나뿐이면 경쟁이 심할 것 같은데….”
당연히 내가 가진 토플란 시스템은 이것 한 대가 아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계신 분들끼리 경쟁할 일은 없습니다.”
그 말에 길드장들은 뭔가 안도한 얼굴이었다.
하긴 경쟁이 붙어 못 받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뒤처지게 될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가 구매한 토플란 시스템은 모두 열대.
대당 천만 포인트에 구매했다.
여기 있는 모두에게 한 대씩 풀고도 한 대가 남는다.
남은 한 대는 대현 그룹의 연구개발 자회사인 대현 토탈 아이템에 보내 연구를 시킬 예정이었다.
포인트가 있으면 더 구매하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지만 천만 포인트가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리퍼가 강림했을 때처럼 반신급 퀘스트를 받지 않는 한 단기간에 그만한 포인트를 모으긴 힘들었다.
그래서 대현 토탈 아이템에 한 대를 보내기로 했다.
독자적인 생산이 가능해지면 그만큼 이득이니까.
“단, 조건이 있습니다.”
경쟁을 붙이지 않는다는 말에 안도하던 길드장들의 얼굴이 굳었다.
연우 형은 외려 올 게 왔다는 눈치였고.
“그래요 그냥 받기만 하면 우리도 마음이 편치 않죠. 그 조건이 뭡니까. 강 선생.”
“그건…….”
그리고 나의 조건을 들은 길드장들은 눈을 빛냈다.
그 조건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조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강현이 떠난 트레이닝 룸.
나란히 설치된 아홉 개의 포털을 본 한태산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한 달 안에 승급이라…. 해볼 만하겠군.”
소모되는 마나석 양이 부담이기는 했지만, 그는 강현의 조건이 어려울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디펜더(defender)라고 했던가?”
토플란 시스템은 그에게 디펜더라는 성장 커리큘럼을 제공했고, 길을 찾지 못하던 그에게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해줬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다른 길드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자-. 저는 먼저 들어갑니다. 한 달이 긴 것 같아도 이게 또 직접 하다 보면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으니까….”
그중 가장 흥분한 것은 다름 아닌 화연 길드장 이석평이었다.
서태촌이 은퇴한 뒤로 현역 길드장들 중엔 최고령인 그는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오랫동안 SS급에 머물러 있는 길드장이기도 했다.
마치 새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한껏 격앙되어 있는 그를 필두로 모두가 시스템에 접속하고.
“아…. 이거 쉽지 않은데….”
홀로 남은 도연우는 원망 섞인 눈으로 떠나버린 강현의 빈자리를 노려봤다.
강현이 내건 조건은 한 달 안에 승급.
다른 길드장들에겐 평생 숙원과도 같은 그 조건이 도연우에겐 부담이 되어버렸다.
SSS급으로 오른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그에게 승급하라는 말은 그동안 그 누구도 오른 적이 없는 전인미답의 경지를 한 달 안에 올라서라는 말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EX급이라고 했나?”
과거 태초의 별에서 강현과 나눴던 시스템의 아이템 등급에 관한 대화를 떠올린 도연우는 이내 찡그렸던 얼굴을 풀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자가 이렇게 판을 깔아줬는데. 사부라는 놈이 앓는 소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한 달 안에 승급하지 못하면 장치를 회수해가겠다는 강현의 말은.
“생각해 보면 이것도 게임과 다를 게 없잖아? 가상현실 대전게임.”
게임광인 도연우의 승부욕에 불을 지폈다.
태초의 별에서조차 강현에게 스마트폰 충전을 받아 게임을 했던 그에게 토플란 시스템은 최신형 가상현실 게임기와 다를 게 없었다.
적을 처치하면 그 보상으로 현실에서도 강해지는 게임 말이다.
“현아.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게 줬다 뺏는 거야. 형은 이 게임기를 뺏길 생각이 없단다.”
그리고 그것은 도연우에게 그 어떤 것보다 강한 동기부여가 됐다.
***
“오랜만입니다. 강현 군.”
한울 길드를 나서는 내 앞에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나타났다.
“황 집사님? 여긴 어떻게…?”
바로 강산호 회장의 심복인 황 집사였다.
“어제 회장님께서 메시지를 남기셨는데 확인 못 하신 모양입니다.”
“아….”
나는 그제야 강산호 회장이 남긴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 선물을 보내신다고 하신 거 말이신가요?”
황 집사를 통해 선물을 보내겠다는 강 회장의 메시지.
황 집사는 그 선물을 전해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 위치야 나를 지키던 비현으로부터 전달받았을 테지.
“맞습니다. 회장님께서 아주 중요한 선물이니 직접 전해주라 당부하셔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불쑥 찾아왔습니다.”
황 집사의 말을 들으며 헌터 와치를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찍혀 있었다.
아마도 내가 토플란 시스템 안에 들어가 있을 때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실례라뇨. 제가 전화를 못 받은 건데요. 황 집사님께서 이렇게 기다리셔야 할 정도로 중요한 선물이라니 기대가 되네요.”
그렇게 자신의 사과를 받아넘긴 내게 황 집사는 갈색 서류봉투 하나를 건넸다.
요즘 같은 시대에 서류봉투라니….
가만 보면 이 양반도 참 낭만적인 양반이다.
“회장님께서 시간 날 때 차 한잔하러 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동안 너무 격조했다고요.”
내가 서류봉투를 받아들자 황 집사는 강 회장의 전언을 남기곤 등 돌려 멀어져 갔다.
‘그러고 보니 저 양반도 S급 각성자였지?’
처음 그를 만났을 땐 서슬 퍼런 눈빛이 두렵기만 했는데 이젠 언뜻언뜻 그의 움직임에서 빈틈이 보였다.
그 말은 내 경지가 황 집사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이었다.
불과 7개월 만에 이렇게 성장하다니 왠지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그나저나 뭔 선물이길래 황 집사님을 보내 직접 전달한 거지?”
갈색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이내 그것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중요한 서류 같은데 인도 한복판에서 확인하긴 좀 그렇지 않은가.
‘사무실 가서 확인하면 되겠지.’
내 발걸음이 향한 곳은 강남 한복판에 있는 한울 길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대현 토탈 아이템.
대현 그룹의 아이템 개발과 연구를 담당하고 있는 자회사.
내가 토플란 초인 육성 시스템의 분해와 연구를 맡길 회사이자.
“어서 오십시오. 이사님.”
내가 사외이사로 등록되어 있는 회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