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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143화 (142/202)

143. 강림(降臨) (5).

고개를 들자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느려진 세상에서 자유로운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서늘한 눈동자.

“이곳에선 이런 걸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한다고 비유하던가?”

권주를 권한 적도 없는 새끼가 저런 말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 이젠 상관없지만.

놈을 조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몸이 절로 반응했다.

빠지지직!

샛노란 뇌전이 그물처럼 펼쳐지며 놈을 둘러쌌다.

“보잘것없는 놈이…. 제법….”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녀석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뭉클 피어올랐다.

“…반항하는구나.”

뭉클 일어난 기운이 주변을 잠식한 뇌전을 살라 먹으며 소멸했다.

익숙한 기운. 익숙한 방식.

크롤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영락한 신의 기운이 더욱 직관적이며 강력하고, 공격뿐만 아니라 방어능력도 탁월하다는 점이었다.

피지지직……

휘몰아치던 전격의 폭풍이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죽음의 기운에 잡아먹혀 사라져버린 뇌전, 저것은 내 몸의 일부다.

‘빌어먹을, 상성이 나쁜 건가…?’

크롤러와 유사하지만, 더 강력한 영락한 신의 권능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죽음을 내렸다.

그것은 뇌전이라는 속성에도 마찬가지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죽음을 내리는 권능이라니 이 얼마나 불합리한가.

‘놈의 말이 맞아. 나는 권능을 제대로 제어하고 있지 못해.’

당연하다.

이제 겨우 사용한 지 3초밖에 안 된 권능을 어떻게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전뢰화라는 권능에 휘둘리는 중이라는 말이 맞았다.

하지만 신세 한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고고고---!

내가 뿜어낸 뇌전을 모두 잡아먹은 죽음은 더욱 몸집을 불리며 공간을 잠식하고 있었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순식간에 주변으로 퍼져가는 죽음의 안개.

지금까지 놈이 보여준 권능은 장난이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유지시간: 09분 56초]

빠지지지지-직!

죽음의 확장을 막기 위해선 뇌전을 발산하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구 영감님을 치료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 서 영감님과 연우 형은 물론이고 바닥에 널브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요단강을 건널 판이었으니까.

치지-직-.

빠지지직-!

죽음의 기운과 부딪힌 뇌전이 새하얀 스파크를 뿜어내며 밀고 당기기를 시작했다.

권능의 힘이 서로 비등하기 때문인지. 밀고 밀리긴 하지만 죽음의 기운이 확장되는 건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입이 바짝바짝 말라 갔다.

‘이러다 죽을 것 같은데.’

저기서 사용되는 뇌전은 모두 나의 일부다.

전뢰화로 뇌전이 되어버린 내 몸뚱이의 일부분이 저렇게 소멸하고 있는 거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HP가 깎여나가는 느낌이란 게 어떤 것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원래 계획은 내 인벤토리를 분리해 아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여기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옮겨 담을 생각이었다.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영락한 신에게 걸려 없던 일이 되어 버렸지만.

물론 이 방법엔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4층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구한다 치더라도 그 외에 다른 이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20층 40층 60층….

각각의 대피소에 몸을 피하고 있는 수만 명의 목숨을 말이다.

이기적이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내게 더 소중한 사람들의 목숨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으니까.

애당초 나는 영웅도 뭣도 아니다.

나 혼자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다.

그것도 압도적인 강함을 가진 영락한 신. 반신으로 분류되는 존재에게서.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내가 가진 인벤토리의 크기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작 10000㎏이 넘는 한계 중량으론 아공간을 만들어낸다 해도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100명 남짓이었으니까.

‘모두를 구할 수 없다면 소중한 사람을 구할 수밖에.’

그랬는데.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박빙까진 아니더라도 영락한 신이란 놈과 대적할 방법이 생겼다.

‘그렇다면….’

결정을 내린 내가 놈을 바라보자 놈의 보랏빛 눈동자가 가려지며 눈웃음을 만들어냈다.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눈알을 뱅글뱅글 굴려 가며 얻은 결론이 무엇이냐. 비루하고 하찮은 것아.”

불쑥.

기운과 기운이 부딪혀 달궈진 공기를 뚫고 한 자루 칼날이 솟아올랐다.

역시 크롤러의 공격방법이었다.

내게 익숙한.

하지만 놈은 아직 모르는 듯했다. 놈의 공격 방식이 내가 수백 번 겪어본 방식이라는 것을.

“네게 선택지를 주마. 현 상황을 유지한다면 비루한 너의 목숨은 연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놈이 노리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뇌전으로 이루어진 그물을 뚫고 나온 죽음의 칼날은 순식간에 분화하며 수천 개의 송곳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이 쏘아져 나가는 방향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길드장들과 각성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네가 내게 복종한다면 이들의 목숨은 살려주도록 하마.”

쉬익!

미처 내가 반응할 새도 없이 쏘아져 나간 송곳들이 쓰러져 있는 이들 앞에서 멈춰 섰다.

날카로운 끝이 심장을 향하게 한 채로.

“말해라. 어떻게 그 권능을 얻었느냐?”

“…….”

아무런 대답이 없자 놈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피를 봐야 입을 열 놈이로구나.”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열 명의 심장에 송곳이 박혔다.

“컥!!”

“끄아아악!!”

기절한 와중에 심장을 공격당한 이들이 괴성과도 같은 비명을 토해냈다.

---!!

그 짧고 커다란 비명 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심장을 시작으로 온몸이 죽음에 의해 분해되어버린 이는 더는 비명을 지를 수 없었으니까.

냉정하고 단호하다.

손을 쓰는 데 망설임이 없다.

왜 모든 악은 이토록 강하고 이토록 야비한가.

놈은 4층에 쓰러져 있는 수백 명의 목숨을 인질로 나를 협박하고 있었다.

‘내가 놈의 말을 따른다면 정말 사람들을 살려줄까?’

고개를 돌려 연우 형과 서 영감님을 바라봤다.

구 영감님을 가운데에 두고 힐링 포션을 들이붓고 있었다.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그들의 움직임엔 다급함이 묻어나왔다.

화가 났다.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무력한 나 자신에게.

‘다시는 다른 이가 내 목숨을 저울 위에 올려놓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분노했다.

‘나는 왜 여전히 약하고 내 목숨은 여전히 저울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걸까.’

내가 강해진 것보다 더 강해지는 나의 적들에게.

“이제 결정이 좀 쉬워졌느냐? 비루하고 하찮은 것아.”

그리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강해졌건만, 여전히 하찮고 비루한 나에게.

“했지. 결정.”

“호오…. 그래 둘 중에 어느 쪽이냐. 복종이냐. 홀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냐.”

결정했다.

“세 번째.”

“…뭐?”

도박을 해보기로.

천진난만한 10대 소년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고.

꽈르르릉!

----!

나는 천둥소리와 함께 놈에게 쇄도했다.

말 그대로 육탄돌격.

어처구니없다는 듯 일그러진 놈의 얼굴이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끄윽.”

놈을 보호하고 있는 죽음의 안개 속으로 파고 들어가자 나도 모르게 신음이 나왔다.

빠지지직!

뜨거운 열기를 발하며 소멸하는 뇌전과 죽음 사이를 통과해.

텁.

나는 놈에게 닿았다.

전기로 이루어진 손끝에 싸늘한 놈의 체온이 느껴졌다.

“가까이 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마주한 놈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하찮고 비루한 것이 생각하는 거라곤 항상 이런 식이지…. 몸으로 때우는 거!”

놈의 주변에 안개처럼 펼쳐져 있던 죽음이 수천 개의 가시가 되어 찔러 들어왔다.

빠직! 빠지직!

전기로 이루어진 몸뚱이와 닿아 소멸했지만 나 또한 그만큼 타격이 있었다.

급속도로 줄어드는 체구가 바로 그것이리라.

“설마 네놈이 말한 세 번째가 자살이었나?”

밉살스럽게 이죽거리는 놈의 얼굴을 마주한 나는 놈과 같은 비웃음을 매달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자살일지도 모르지.”

“뭐?”

“하지만 나 혼자 죽는 일은 없을 거야.”

말을 끝낸 나는 놈을 끌어안으며 몸을 날렸다.

꽈르르릉----!!

놈의 등 뒤에 만들어 놓은 초록색의 아공간을 향해.

***

“아공간?”

‘영락한 죽음의 신’ 리퍼는 이 상황이 조금 어이가 없었다.

수만 년의 생을 살아온 그였지만 이런 일은 겪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던전인가?”

신격을 잃고 영락해 반쪽짜리 신이 되어버렸지만, 신은 신이다.

하찮은 인간이 펼친 마법 따위가 통할 존재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너…. 네가, 이 행성에서 해피니스 시스템의 선택을 받은 놈이구나?”

리퍼는 이제야 강현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을 영락하게 만든 시스템의 관리자들.

찬란하고 영광된 신좌를 버리고 시스템에 종속되어 버린, 이제는 관리자라 불리는 신이었던 것 중 하나가 선택한 사용자가 강현이라는 사실을….

“하…. 인간의 세상을 위한다는 미명으로 수많은 신을 소멸로 몰아넣은 것들이 한다는 짓거리가…….”

리퍼는 분노했다.

하찮고 보잘것없는 필멸자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신이 관리자들의 손에 죽어야 했던가.

“…고작 이런 것이었는가?”

그의 분노는 당연했다.

“고작, 저딴 하찮고도 하찮고 또 하찮은 것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그 많은 신을 죽였는가 관리자들이여.”

그리고 그 분노는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우주의 최외곽.

변두리 은하의 변두리에 있는 태양계.

마나 조차 없는 이곳까지 쫓겨 와야 했던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노.

시스템을 받아들인 배덕자들에게 자신들이 패하지만 않았어도 이리되지는 않았을 테니.

‘관리자. 필멸자를 위한 세상. 전쟁?’

강현은 그런 리퍼의 중얼거림을 조용히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어째서 지구에 던전이 등장한 것인지 알 길이 없는 그로선 리퍼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귀중한 정보였으니까.

분노로 얼룩진 보랏빛 눈동자가 강현에게 향했다.

“우리의 영광을 빼앗아 고작 저런 천한 것에게….”

분노를 연료 삼아 타오르는 리퍼의 눈동자를 마주한 강현은 피식 웃었다.

‘이제 더 조잘댈 생각이 없나 보네.’

그렇다면 더는 얻을 정보가 없다는 말이었고.

‘이 개소리를 더 들어줄 필요도 없다는 소리지.’

강현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일단은 저 빌어먹을 놈을 쥐어박고 나서 물어보기로 했다.

이곳은 아공간.

자신의 능력을 200% 발휘할 수 있는 홈그라운드였으니까.

***

…….

-특성: 모태 솔로 A가 발현됩니다.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내 모든 능력치는 세 배가 늘어났다.

그 말은 ‘권능 전뢰화’의 유지시간은 그대로지만 전뢰화 상태에서 발휘할 수 있는 모든 능력치가 세배 더 강해졌다는 말이 된다.

단적으로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은 더욱 느려져 지금은 숫제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유지시간: 09분 54초]

“하…찮은…것아…. 너를…선. 택한…관리자…를….”

밖에선 또박또박 들리던 영락한 신의 목소리도 나무늘보가 말을 하는 것처럼 답답할 정도로 느려졌다.

“알겠으니까. 이제 좀 닥치고 처맞아줄래? 아까부터 말 같지도 않은 네 말 들어 주고 있느라 귀가 썩을 것 같았거든.”

내 말이 끝나자 영락한 신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어…떻게…?”

나는 놀란 눈으로 의문을 표하는 영락한 신의 턱주가리를 쳐돌렸다.

쩌걱!

꽈지지지직!!

“‘어떻게’ 보다 중요한 게 있지 않아?”

놈에게서 뭉클거리며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이 내 뇌전을 만나 힘없이 소멸했다.

“…컥!”

나는 뒤늦게 울리는 놈의 비명을 BGM 삼아 놈을 구타하며 말을 이었다.

파직! 파직! 빠지지직!

“이제 고귀하신 네놈이 이 천한 것한테 맞아 뒈지게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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