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142화 (141/202)

142. 강림(降臨) (4).

나는 4층에 들어서기 전부터 4층의 상황이 좋지 않음을 예감했다.

계단을 내려가기도 힘들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이 4층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아 아무래도 넌 대피소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맘 같아서는 나도 연우 형 말처럼 20층에 있는 대피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4층이 위험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4층에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에 피부의 솜털이 바싹 서고 한 계단씩 아래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데 어찌 모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가야만 했다.

20층에 있는 마지막 대피소를 지나친 후.

그전까지만 해도 도주를 종용하던 시스템은 내가 마지막 대피소마저 지나치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퀘스트 하나를 던져줬다.

띠링.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지구의 관리자 뇌신(雷神) 울티아가 더럽게도 말을 안 들어 처먹는 사용자 강현에게 퀘스트를 부여합니다.

[특수 퀘스트: 너 꼴리는 대로 해봐!]

[등급: 반신(半神)]

[내용: @[email protected]@!$지구에 강림한 타 차원의 영락한 신 **의 공격에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출하고 생존하세요.]

[경고: **는 해피니스 시스템에 의해 제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권능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행상태: 진행 중]

[생존확률: 0.1%]

[현재 구출 인원: 0명]

[보상: 보너스 스탯 1,000. 칭호: 하지 말라는 건 꼭 하는. 상점 포인트 1억. 선업 포인트 1억. 특성카탈로그.]

[실패 시: 사망]

*해당 퀘스트는 강제 퀘스트입니다.

*구출 인원에 따라 추가보상이 지급됩니다.

-관리자 권한으로 사용자 강현 님에게 한 가지 권능이 부여됩니다.

-일시적으로 권능 카테고리가 개방됩니다.

-권능: 전뢰화(電雷化)를 획득합니다.

[권능: 전뢰화(電雷化)]

└뇌신 울티아의 권능. 신체를 전기로 변환하는 게 가능하다.

[유지시간: 10분]

*해당 권능은 일회성 권능입니다.

퀘스트와 함께 관리자에게 전뢰화라는 권능도 부여받았으나, 솔직히 이 권능이 ‘영락한 신’이라는 놈을 상대할 때 도움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SSS급도 EX급도 아닌 지금껏 본 적조차도 없는 반신 등급의 퀘스트.

어찌 보면 관리자가 울며 겨자 먹기로 내어준 퀘스트나 다름없었다.

아직 열리지도 않은 카테고리를 열어 어떻게 쓰는지도 모를 권능을 부여해 줄 정도로 관리자는 내 생존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뇌신 울티아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왠지 익숙한 관리자의 이름에 머리를 갸웃거리면서도 나는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당장 도망치라고 외치는 본능을 억누르고 도착한 4층.

굳게 닫혀 있는 문 너머로 전해지는 놈의 기파는 정말 예사롭지 않았다.

“그럼 들어간다?”

연우 형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너도 죽자.”

이후, 마주한 상황은 10대 후반의 소년이 80이 넘은 노인의 죽빵을 갈기는 모습이었다.

은색 머리칼과 짙은 보라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년.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소년은 가볍게 주먹을 휘둘렀고.

뻑! 뻐억!

그 가벼운 손짓은 서 영감님의 호신강기를 종잇장처럼 찢고 들어가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영락없이 80대 노인을 폭행하는 10대 비행 청소년이다.

하지만 그렇게 폭행을 당하는 사람이 서 영감님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저게 영락한 신?’

양아치처럼 노인을 패는 저 은발 머리가 시스템이 말한 ‘영락한 신’이라는 소리니까.

바로 반신 급 퀘스트의 주인공 말이다.

“야 이-! 씨바새끼야!!!”

뭘 본 걸까?

4층에 들어서자마자 주변 상황을 살피던 연우 형이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연우 형의 시선이 향한 곳.

그곳엔 구 영감님이 바닥에 쓰러진 채로 검은 기운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휙.

자리를 박차고 나간 연우 형은 순식간에 소년의 모습을 한 ‘영락한 신’의 앞에 도달해 창을 찔러넣었다.

콰아앙!

“네가 도연우구나? 굼벵이처럼 미적거리면서 내려오길래 도망갈 줄 알았더니 그래도 의리는 있네?”

하지만 그 날카로운 일격은 소년이 내민 손가락 하나에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영락한 신이라 해도 신은 신이라는 거냐?’

인필리언에서 만났던 검은 그을음도 신이 되지 못해 영락한 존재였다.

비록 테라포밍 시스템 인필리언의 AI와 크롤러가 하나가 되어 일어난 일종의 기적과 같은 일이었지만.

신은 신.

솔직히 처음 영락한 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놈의 강함을 검은 그을음 정도로 판단했었다.

물론 한층 한층 아래로 내려오며 그 생각은 고쳐먹어야 했다.

영락한 신이 뿜어내는 기파는 검은 그을음과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무겁고 위험했으니까.

‘일단 사람들을 구해야 해.’

연우 형과 서 영감님이 버티고 있을 때 한 명이라도 더 구해야 했다.

내가 연우 형과 함께 4층에 들어선 것을 봤으면서도 마치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방법이 있냐고?

물론.

나도 내 목숨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면 제 발로 여길 찾아오지 않았을 거다.

나는 영락한 신이 연우 형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움직였다.

검은 기운에 휘감겨 고통스럽게 버둥거리는 구 영감님을 향해.

그나마 다른 사람들은 사정이 좀 나아 보이는데, 구 영감님은 당장 뭔가 조치를 하지 않으면 목숨이 간당간당할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팔은 팔꿈치 아래로, 다리는 무릎 아래로 사라져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크어억….”

신음을 토해내는 것을 보니 살아계시기는 한 것 같은데 제정신은 아니신 것 같았다.

몸뚱이가 검은 기운에 좀먹혀 새하얀 뼈와 근육이 그대로 외부에 드러나 있는 상황이었으니 제정신이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이기는 했다.

겉으로 보이는 대로라면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저 검은 기운 왠지 눈에 익은데?’

한데, 구 영감님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검은 기운이 왜인지 모르게 익숙했다.

분명 처음 보고 느끼는 기운임에도 수도 없이 겪어본 것 같은 친숙함이 느껴졌다.

‘크롤러?’

그건 분명 형태는 달랐지만, 크롤러의 공격 방식이었다.

‘크롤러와 던전을 만들어낸 존재.’

그건, 서 영감님과 연우 형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있는 저 녀석이 크롤러를 만들었거나 만드는 데 관여했다는 말이었다.

‘교단이라는 놈들이 믿는 열두 신. 그들이 던전을 만들어 지구를 공격했다?’

하지만 중요한 게 빠져 있었다.

‘왜?’

그들이 지구에 던전을 만들어내야만 했던 이유.

머릿속 한가득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일단은 구 영감님부터 챙기자. 더 내버려 두면 상황이 심각해지겠어.’

나는 두 SSS급 각성자를 데리고 놀고 있는 영락한 신을 곁눈질로 확인하곤 구 영감님에게 손을 뻗었다.

일단은 아공간을 분리해 그곳에 넣어둘 생각이다.

약간의 ‘조작’을 가한다면 저 기운을 없애진 못하더라도 구 영감님이 죽지는 않게 만들 수 있다.

그건 이미 욱일회의 대주들을 가둘 때 시험을 해봤다. 마나가 좀 소모되기는 하지만 어려울 건 없었다.

그렇게 일렁이는 기운을 피해 구 영감님의 몸에 손가락이 닿았을 때.

“왜? 동반 자살이라도 하려고?”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장난기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소소소.

순간 온몸의 털들이 바짝 일어섰다.

“왜-. 하던 거 계속해봐.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뭐하나 궁금했는데…. 저 늙은 애송이랑 같이 죽을 생각이라면 말리진 않을게.”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허공에 몸을 고정한 채 내 귓가에 얼굴을 들이밀고 생글생글 웃고 있는 녀석.

영락한 신.

녀석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아니었다.

짙은 보랏빛의 눈동자가 생각을 읽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내 눈을 직시했다.

“너….”

녀석의 얼굴이 굳었다.

웃는 표정 그대로 굳어버린 녀석의 입이 삐걱거리며 움직였다.

“…정체가 뭐야?”

“컥!!!”

그 순간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중압감이 내 몸을 짓눌러왔다.

우지직.

온몸의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어졌다.

끔찍한 고통에 머릿속이 새하얘졌지만 나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그보다 더한 공포가 나와 마주하고 있었으니까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는 보랏빛 눈동자.

그 눈길을 피하고 싶건만 눈동자도 눈꺼풀도 내 의지를 배신했다.

“뭔데 너 따위가 신의 권능을 품고 있는 것이지?”

장난스러웠던 목소리는 굳어 있었고 굳어버린 목소리만큼 단단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

“말해라 하찮은 것아. 어떻게 신의 권능을 얻은 것이냐.”

말하고 싶었다.

“설마 그 알량한 권능이 너를 지켜줄 거라 믿고 내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것이냐?”

진심으로 말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어디 버텨 보아라. 네놈이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지 기대가 되는구나.”

하지만 이 미친놈은 말할 기회도 주지 않으면서 자꾸 말을 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이 지독한 압력을 풀어줘야 뭔 말을 하든 말든 할 거 아닌가.

뻐끔. 뻐끔.

애써 입을 움직여 보지만,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릴 뿐 말은 나오지 않았다.

콰직. 우지직,

퍽. 퍼퍽.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고 몸뚱이가 마른오징어처럼 납작하게 짓눌렸다.

혈관이 터지며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라 바닥을 적셨다.

놈의 압도적인 힘과 권능 앞에 나의 알량한 계획은 먼지처럼 스러졌다.

‘X발…. 이 빌어먹을 권능은 대체 어떻게 사용하는 거냐고!’

사용하는 방법도 모르는 빌어먹을 권능 때문에.

뇌신 울티아라는 새끼가 나를 죽이려고 이 권능을 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속 좁은 새끼가 전에 욕 좀 했다고 지금까지 꽁해 있는 게 확실했다.

“컥. 커 헉….”

심장이 터진 걸까?

아니면 갈비뼈가 폐를 찌른 걸까?

숨을 쉬는데 날숨 대신 핏물이 토해졌다.

이렇게 죽는 건가…?

‘또?’

영혼이 육체를 떠나려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질 그때.

‘권능…사용…. 씨발…….’

-권능: 전뢰화(電雷化)가 발현됩니다.

-[유지시간: 09분 59초]

빠지지지지지---직!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양 변화하기 시작했다.

잘근잘근 부서진 뼛조각과 흐물흐물 늘어진 살덩어리와 흘러내린 핏방울까지.

모든 것이 샛노란 스파크를 뿜어내고 있었다.

“너….”

그리고 그 순간 시간이 느려졌다.

눈동자를 굴리자 지근거리에서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보랏빛 눈동자가 보였다.

파지직.

그리고 그 눈동자 안에서 일렁이는 샛노란 인간 형상의 번개.

잘게 흔들리는 보랏빛 눈동자를 보는 순간 알게 되었다.

시간이 느려진 것이 아닌 내가 빨라진 것이란 걸.

고개를 돌리자 검은 기운과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는 서 영감님과 연우 형이 눈에 들어왔다.

-[유지시간: 09분 58초]

‘두 사람을 도울까?’

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이미 그 둘의 곁에 도착해 있었다.

경악으로 치켜뜬 두 눈과 쩍 벌어지는 입.

슬로우 모션처럼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오직 나만이 자유로웠다.

빠지지지직!

두 사람을 압박하는 검은 기운을 없애겠다는 생각을 하자 내 몸이 저절로 반응해 뇌전을 뿜어냈다.

헐벗은 겨울 나뭇가지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던 뇌전이 세상을 좀먹던 검은 기운. ‘죽음’을 태워 소멸시켰다.

서 영감님과 연우 형을 압박하고 있던 기운뿐만이 아닌 결계 안에 퍼져 있던 모든 기운을.

-[유지시간: 09분 57초]

‘이거라면 저 괴물을 처치할 수도 있겠는데?’

그렇게 죽음을 지워버린 나는 고개를 돌려 영락한 신을 찾았다.

‘…어디 간 거지?’

하지만 영락한 신은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난 것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설마 도망이라도 간 건가?’

고개를 돌리며 영락한 신을 찾고 있을 때였다.

“…지금. 나를 찾고 있는 것이냐? 자기가 가진 권능조차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놈이?”

내 머리 위에서 비웃음이 가득한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