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140화 (139/202)

140. 강림(降臨) (2).

서 영감님과 연우 형의 공격을 받으며 슬금슬금 내 쪽으로 다가오는 인형사.

‘새끼가 잔머리를 굴리는 것 같은데.’

상처 입는 것을 무릅쓰며 꾸역꾸역 거리를 좁히는 걸 보자니 놈이 뭘 노리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아마 나를 인질로 삼아 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것일 테지.

‘그럼 나도 함정카드를 만들어 두면 될 일이지.’

놈의 목적이 명확하니 대응법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스킬 사용. 아공간 변환.”

-변환할 아공간의 크기를 설정해 주십시오.

시스템 창을 조작해 설정을 마쳤다.

-아공간 변환에 성공하셨습니다.

-해당 아공간을 유지하기 위해선 마나석이 필요합니다.

-인벤토리에 보유 중인 마나석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N]

마나석까지 사용하자 초록색 아공간이 빛을 내며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준비는 마쳤고.’

남은 건 물고기가 접근할 때까지 충실한 미끼 역할을 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잡고자 하는 인형사라는 물고기는 온몸을 파닥거리며 나라는 미끼를 향해 열심히 다가오는 중이었다.

달콤한 미끼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낚싯바늘은 보지 못한 채.

***

혈인.

지금, 이 순간 인형사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명칭은 없을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하나 성한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그는 시뻘건 핏물에 절어 있는 몸으로 거칠게 바닥을 굴렀다.

서걱.

바닥을 구르는 그의 몸 위로 스치고 지나가는 한줄기 검기.

서태촌의 검기를 그렇게 흘려보낸 인형사는 구르던 반동을 이용해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그러자 핏자국이 흥건한 바닥에 숭숭 구멍이 뚫렸다.

도연우의 신창이 만들어낸 흔적이었다.

“이제 제법 잘 피하는데? 근접계열 각성자라고 해도 믿겠어.”

허공으로 몸을 띄운 인형사의 귀에 이죽거리는 게 분명한 도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인형사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촤라라랑!

콰과광!

몸을 띄우며 풀어놓은 은사를 가르며 떨어지는 거대한 도기에 맞아 바닥에 처박혀야 했으니까.

커억!

쿠당탕.

도기를 막아준 은사와 바늘 덕에 몸뚱이가 반으로 갈라지는 것은 모면했지만, 허공에 떠 있던 인형사는 바닥을 나뒹굴어야 했다.

쿨럭.

주르륵.

직접 도기를 맞은 것은 아니지만 타격은 타격이다.

연약한 인형사의 몸은 서태촌의 단천세에 담긴 힘을 이겨내지 못했다.

내장이 뒤집히는 충격에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하는 인형사.

하지만 바닥을 구르는 그의 얼굴엔 회심의 미소가 새겨져 있었다.

바닥을 구른 인형사가 멈춰선 곳엔 싸움을 관전하던 강현이 멀뚱멀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드디어….’

모양새는 좋지 않았지만, 목표로 했던 강현에게 접근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 빌어먹을 상황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군요.’

그렇게 미소짓고 있는 인형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강현이 입을 열었다.

“뭘 쪼개 병X아.”

“뭐…라고요?”

강현은 이런 상황에서도 존댓말을 쓰는 인형사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뭐라고요는 개뿔. 그렇게 티 나게 접근하는데 네 생각을 내가 모를 것 같았어?”

인형사의 어깨가 부르르 떨렷다.

어느새 끊긴 공격.

고개를 돌려보니 서태촌과 도연우가 무기를 갈무리하고 있었다.

‘왜? 대체 뭘 믿고? 고작 S급 각성자에 불과한 이자가 나보다 강하다고 판단한 건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어이가 없다기보단 모욕적이었다.

상대는 고작 S급.

상처 입고 지치긴 했지만, 자신은 SSS급이다.

‘내가 이자보다 약하다고?’

그런데도 두 사람이 무기를 거둔다는 것은 강현이라는 자가 자신을 이길 거라는 확신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이익!”

발끈한 인형사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며 몸을 날렸다.

휘리릭.

은사가 허공에 흩날리며 잔상을 만들며 반짝이고.

자신의 움직임을 쫓지 못해 무방비하게 등을 드러내고 있는 강현의 배후를 점한 인형사의 손이 마에스트로처럼 허공을 휘저을 때였다.

텁.

날카로운 바늘과 은사를 헤집고 들어온 강현의 손이 인형사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어떻게?’

강철도 두부처럼 잘라내는 은사를 헤치고 들어온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손.

금식충-아다만티움 바디를 활성화한 강현에게 인형사의 은사는 작은 상처 하나 남기지 못했다.

그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그런 강현의 움직임에 자신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왜지?’

분명 그 손이 다가오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음에도 인형사는 강현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멀뚱히 바라보다 목덜미를 내줬다.

상대가 자신보다 약하기에 방심해서?

아니었다.

아무리 상대가 자신보다 약하다곤 하나 무방비하게 목덜미를 내주는 병신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인형사는 졸지에 그런 병신이 되고 말았다.

“내가 이걸 익히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면 그딴 표정은 못 지을걸?”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형사의 귓가로 강현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 끝이다. 인형사. 남은 이야긴 다음에 하도록 하지.”

아무도 알지 못할, 알아서는 안 되는 자신의 직업이 강현의 입을 통해 밝혀지는 순간.

“무슨….”

인형사가 채 말을 뱉기도 전 인형사의 목덜미를 쥔 강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인형사는 그렇게 강현이 만들어 놓은 아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강현이 인형사에게 등 뒤를 내어준 이유.

그것은 그가 만들어 놓은 아공간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인형사는 강현이 만들어 놓은 감옥에 갇혔다.

***

콰과광!

“도. 도망쳐!!!”

“끄아악!!”

“씨발! 저런 괴물이 있다곤 말 안 했잖아아아아!!!”

강현이 인형사를 아공간에 가둔 그 시각.

각성자 센터 1층엔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피와 절규 그리고 죽음이 난무하는 그 공간의 중심.

새하얀 백발을 사자 갈기처럼 휘날리는 노인이 한 마리 야수처럼 날뛰고 있었다.

터지고 부러지고 찢긴다.

강현이 펼쳤던 백야투로와는 또 다른 진정한 백야투로를 펼치는 노인.

온몸으로 죽음을 만들어내는 괴물.

투왕 구정철.

“내게서 도망칠 수 있을 듯싶더냐. 버러지들아!!”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분노한 상태였다.

지하 8층에서 욱일회주의 허무한 마지막을 확인한 후 층계를 오르던 그가 본 것은 학살의 현장이었다.

지하 7층, 6층, 5층….

계단을 오를 때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피의 강과 시체의 산.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해당한 일반인들과 각성자들의 시체였다.

참혹하다는 말이 부족한 그 광경을 본 구정철은 분노했다.

“피 한 방울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이 세상에서 지워주마!!!”

그리고 상층으로 올라가지 못한 채 1층에 머물고 있던 테러리스트들은 투왕의 분노를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했다.

죽음으로.

퍼어억!!

“으아아악!”

잡혀도 죽고.

서거걱!

철퍽!

스쳐도 죽었으며.

“빌어먹을!! 도망쳐!”

“밀지 마! 여기도 막혔다고!”

퍼퍼펑!

“끄아아아악!!”

도망쳐도 죽었다.

1층을 점거하고 있던 테러리스트는 약 1천여 명.

“으으으…. 오, 오지 마! 이 괴물아!!”

단 한 명의 생존자만을 남긴 채 그들 모두가 쓸려나가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0여 분에 불과했다.

철퍽. 철퍽.

핏물이 고인 로비를 지나 마지막 남은 1층의 생존자에게 다가가는 구정철의 얼굴에 무언가가 날아왔다.

퍽! 주룩….

끈적이는 붉은 핏물을 흘리며 구정철의 얼굴에 들러붙은 그것은 인간의 것이었을 무언가였다.

“제발 오지 마!! 오지 말라고오옥!!”

이성을 잃고 공포에 잠식되어 발작적으로 고함을 질러대는 생존자의 손에 들린 것은 조금 전까지 자신의 동료였을 누군가의 것이었다.

휙- 휙-!

손에 잡히는 대로 구정철을 향해 집어 던지던 테러리스트는 붉게 충혈된 구정철의 눈을 마주하고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으으으으…. 제,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제발 살려주세요. 흐으으으.”

이제 겨우 스물이 넘었을까 싶은 앳된 얼굴.

텁.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삶을 구걸하는 테러리스트의 머리 위로 구정철의 두툼한 손이 얹어졌다.

“살고 싶었으면 애초에 이딴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퍼억!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구정철은 손아귀에 힘을 줘 테러리스트의 머리를 박살 내곤 걸음을 움직였다.

“잠시 기다려라. 곧 네 동료 놈들도 네놈 곁으로 보내줄 테니.”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엔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

투왕 구정철.

이제는 투신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그가 보여준 위용은 SSS급 각성자가 어떤 존재인지 모두의 뇌리에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파죽지세.

1층부터 4층까지.

물경 7천에 달하는 인원이 제대로 된 반항 한번 못하고 쓸려나갔으니까.

털썩.

마지막 적이 쓰러지자 구정철은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후우-. 이제 좀 힘에 부치는군.”

패시브 스킬에 가까운 백야투로만 사용했지만 7천에 가까운 놈들을 상대하고 나니 마나포션이 거덜 나 버렸다.

이젠 더 싸우라고 등을 떠밀어도 마나가 없어서 못 싸울 판이었다.

“참. 혼자서 거창하게도 일을 치렀구먼.”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구정철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변의 마나로 마나홀을 채우고 있을 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0대 길드 장들과 함께 5층을 점거하고 있던 테러리스트들을 정리하고 내려온 서태촌이었다.

“왔냐? 굼벵이처럼 느려 터져서는…. 일이 이리될 때까지 서가 네놈은 뭘 했던 게냐?”

애꿎은 민간인들의 죽음을 말하는 거였다.

핀잔 어린 구정철의 타박에 서태촌의 얼굴이 굳으려는 찰나.

“아버지. 서 어르신도 바쁘셨습니다. 대회의실에 나타난 SSS급 각성자가 저번에 아버지께서 갇혔던 그 결계를 설치했던 결계 술사라고 하더라고요.”

구정철의 아들 구지석이 아버지를 만류하며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사혼 감옥을 설치했던 그놈이었다고?”

“그래. 도가 애송이가 놈이 펼친 결계에 빨려 들어가 고생 좀 했다. 이쪽 상황을 인지하는 게 늦기도 했고.”

애꿎은 목숨이 스러진 것에 마음이 좋지 않은 서태촌이 쓰게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강현 군 덕에 놈을 사로잡았으니, 나중에 심문해볼 수 있을 게다.”

“강현 군이 놈을 사로잡았다고? 어떻게?”

“그건 강현 군 오면 직접 물어보고, 구가, 네가 갔던 일은 어떻게 됐는지나 말해봐라.”

서태촌의 말에 구정철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허무하게 죽어버린 욱일회주를 떠올렸다.

“지하 8층에서…….”

구정철은 지하 8층에서 욱일회주를 만났다는 사실과 저간의 상황을 설명하며 마지막으로 욱일회주가 유언처럼 남긴 말을 모두에게 전달했다.

“뭐 그런 미친놈이….”

“고작 복수 때문에 80년이 넘게 이런 짓을 했다고요?”

“미친놈이니 이런 짓을 하지 제정신이면 이런 짓을 하겠어?”

“그나저나 마지막 말이 좀 의미심장하네요. ‘나의 복수는 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라니….”

그렇게 저마다 의견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저 결계, 원래 색깔이 저랬나요? 원래는 푸른색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오나연의 말에 대화를 나누던 이들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붉은색 오로라처럼 일렁이는 결계.

“설마 이거….”

불길함을 느낀 구정철의 시선이 서태촌을 향하는 순간, 서태촌도 구정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색으로 물든 결계와 그 안에서 흘린 수만 명의 피.

“…사혼 감옥?”

구정철의 경험상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아니, 그건 아닐 거야.”

하지만 서태촌은 고개를 저었다.

“사혼 감옥이라면 이미 결계가 줄어들었어야 했어. 하지만 색은 변했지만, 결계의 크기는 그대로야. 사혼 감옥이 아니라는 뜻이지.”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붉은색 오로라처럼 일렁이던 결계의 빛이 점점 연해졌다.

“음?”

“저거 바닥으로 흡수되는 것 같은데요?”

길드장들이 결계의 변화를 감지하고 놀라는 동안 서태촌은 또 다른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피가…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붉은색으로 바닥을 물들이고 있던 핏물이 모조리 사라졌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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