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테러 (6).
쿠웅!!
콰과과광!
퍼-펑!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둔중한 울림이 건물을 흔들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져내릴 듯 흔들리는 진동에 두려워할 만도 하건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의외로 침착했다.
“오랜만이네. 신 회장. 그간 잘 지냈는가?”
“허허. 걱정해 주신 덕에 잘 지냈습니다. 강 회장님은 어째 못 본 새 더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좋은 거라도 드셨습니까?”
가까운 거리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고 있건만 덕담을 나누는 두 사람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마치 서로 담력시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객쩍은 소리 말게. 이 나이 먹고 죽지 못해 사는 늙은이가 더 좋아질 게 뭐 있다고…. 그저 아들놈에게 회장 자리 물려주고 나니 마음이 편해 그리 보이는 게지.”
강산호의 말에 신만철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그럼 저도 얼른 아들놈에게 회장 자리 물려주고 은퇴해야겠습니다. 그려.”
“그래. 자네 나이 정도 되면 이제 내려놓을 때도 되었어.”
경매에 참여했다가 난데없이 일어난 각성자들의 싸움에 대피하던 신만철을 이곳으로 이끈 것은 강산호의 심복이라 불리는 황 집사였다.
그렇게 오게 된 싸울아비 길드장실.
이곳에서 신만철은 대현의 늙은 호랑이가 아직 정정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몇 년 전 경제인 모임에서 봤을 때보다 얼굴빛이 더 좋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노인네가 뭐 좋은 걸 혼자 챙겨 먹는 것인지 혈색이 더 좋아졌네.’
아흔둘인 강산호의 낯빛이 일흔둘인 자신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본심을 숨긴 채 강산호와 대화를 나누던 신만철이 이내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그러셨습니까?”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귓가를 울리는 폭음과 몸을 흔드는 진동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A급 각성자인 신만철의 본능은 저 SSS급의 괴물들이 만들어 내는 굉음에서 멀어지라 소리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그가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그의 정신력이 범인(凡人)을 뛰어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그와 마주 앉아있는 강산호의 정신력 또한 평범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런. 바쁜 사람 불러놓고 늙은이가 말이 많았구먼. 별다른 일은 아니고, 내 신 회장에게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 보자고 했네.”
그렇게 서두를 연 강산호는 전에 없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요즘 차기 후계자 경쟁이 한창이라고 들었는데. 잘 진행되고 있나?”
강산호의 말을 들은 신만철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왜 물으시는지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재계의 거두라 불리는 강산호지만 다른 그룹의 후계자 문제를 거론한다는 건 선을 넘은 것이었으니까.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목소리.
강산호는 불쾌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신만철의 얼굴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미안하네. 내 질문에 오해의 여지가 있었나 보고만. 신성 그룹 후계자 경쟁에 관여하려는 건 아니니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말게.”
강산호는 여전히 굳어 있는 신만철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 말을 꺼낸 이유는 자네가 후계자로 밀고 있는 신유빈 때문이 아닐세.”
그 말을 듣는 순간 신만철의 머릿속엔 후계경쟁의 불공평함을 토로하며 앙칼진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던 손녀가 떠올랐다.
‘유빈이 녀석이 아니면 아연이 때문이라는 건데. 아연이가 강 회장과 인연이 있던가?’
20대 중반인 손녀딸과 아흔이 넘은 강산호 회장.
머리를 굴려봐도 도통 연결고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강상호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 장손과 후계자 경쟁을 하는 신아연이라는 아이 말일세. 자네 손녀가 맞나?”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
드드드. 펑!
공간이 울리고 수많은 빛이 떠올랐다가 사그라든다.
도연우와 인형사.
두 SSS급 각성자의 싸움은 강현의 눈으로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르고 파괴적이었다.
‘고수들의 싸움을 보면 뭔가 배울 게 있다고들 하는데, 이건 뭐 뭐라도 보여야 배우든가 하지….’
두 사람의 신형이 사라지고 나타나면 허공에서 빛이 폭발하며 스킬들이 분쇄되어 흩어졌다.
그야말로 찰나에서 벌어지는 과정들.
강현이 볼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눈먼 스킬에 맞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기 바빴다.
퍼펑!
검을 휘둘러 튕겨 나온 스킬 파편을 처리한 오나연이 말했다.
“여기 있어 봐야 도움도 안 될 것 같은데, 우리도 아래로 내려가는 게 어때요?”
강현은 오나연의 말에도 눈앞의 싸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번-쩍!
꽈르르릉!
퍼퍼펑!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싸움이 이러할까?
강현은 이 거대한 싸움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아직은.
저들과 같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으니까.
“뭐해요? 여기 계속 있을 거예요?”
“네…. 네?”
“여기서 싸움 구경하는 것보다 내려가서 한 손이라도 거드는 게 좋지 않겠어요?”
“하지만, 연우 형 혼자서 괜찮을까요?”
“하긴…. 아까 같은 결계가 다시 발동될지도 모르니까. 강현 씨는 여기 남는 게 좋겠네요.”
강현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 오나연이 헌터 와치를 조작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저 오나연이에요. 네. 다른 게 아니라….”
튕겨 나오는 스킬 파편을 쳐내며 어찌어찌 통화를 마친 오나연이 강현에게 말했다.
“어르신이 바로 올라오신대요. 아래층 일은 길드장 선에서 정리가 될 것 같다고…. 아무래도 이쪽이 이번 사건의 핵심일 것 같다고 하시네요.”
“서 영감님이 올라오시면 확실히 끝을 낼 수 있겠네요.”
도연우와 접전을 펼치고 있는 인형사.
여기에 서태촌이 더해진다면 인형사에겐 승산이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행여 다시 아공간 결계를 펼칠 수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미 강현에게 흡수돼 버린 아공간이 복구될 리는 만무했다.
성물이라고 불리는 아이템이 흔할 리도 없고.
이따금 튕겨 나오는 스킬의 파편을 쳐내며 서태촌이 오길 기다리던 오나연은 옆에서 둘의 싸움을 눈으로 좇고 있는 강현을 흘끗 쳐다봤다.
각성한 지 5개월 만에 S급 승급을 마친 각성자.
서태촌, 구정철, 도연우, 이름도 쟁쟁한 SSS급 각성자 세 명으로부터 제자라고 불리는 청년.
거기에 더해 마나의 묘약이라는 희대의 아이템을 만들어 낸 장본인.
이게 그녀가 알고 있는 강현의 정보였다.
그리고 오늘 오나연은 그 정보에 두 가지를 더 추가할 수 있었다.
하나는 서태촌조차 파괴할 수 없다고 했던 결계를 파훼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강현의 몸속에 자리하고 있는 뇌기(雷氣)였다.
‘쓰읍…. 제자가 되라고 한번 꼬셔볼까?’
‘두 어르신과 도연우가 스승이라는데 받아들이려나?’
‘언제까지 제자도 없이 이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 내 나이도 낼모레면 환갑인데.’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한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 못 먹는 감 찔러보는 셈 치고 얘기나 꺼내 보자. 본인이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또 모르잖아.’
그녀가 이토록 고민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뇌기.
그 특수한 기운을 지닌 각성자를 찾는 것은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보다 힘들었으니까.
그런데 뇌기를 지닌 강현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어찌 욕심이 나지 않겠는가.
“강현 씨.”
전투를 지켜보던 강현이 오나연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런데. 혹시….”
미묘하게 말끝을 흐리는 오나연의 모습에 강현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때였다.
“저놈. 제법 잘 싸우는군.”
“내. 제…. 꺅!!”
“아. 오셨어요. 영감님.”
갑작스럽게 옆에서 들려온 서태촌의 목소리에 오나연의 입에서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새된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런 오나연을 일별한 서태촌은 무심하게 전장의 한가운데로 걸음을 움직였다.
오른손에 시퍼렇게 날이 선 환두대도를 들고서.
“어르신 오셨으니 나도 내려가 봐야겠네요. 우리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이건 제 명함. 꼭 연락해요.”
자기가 비명을 질렀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건지 오나연은 강현의 손에 명함 한 장을 쥐여 주고는 빠른 걸음으로 대회의실을 벗어났다.
“흠…. 뭘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거지?”
손에 들린 명함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강현은 이내 전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래에서 위로.
후웅.
콰아아앙!
가볍게 휘두른 칼 한 자루가 만들어 낸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접전을 벌이던 두 사람을 떨어트린 것은 물론.
퍼퍼퍼펑!
쩌저저적!
도연우와 인형사.
두 SSS급 각성자의 공격도 버티던 대회의실과 각성자 센터의 건물 일부가 터져 나갔다.
후두두둑.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는 건물 잔해 사이로 서태촌을 본 인형사의 얼굴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사자성어로 뭔지 알아?”
반면 도연우에게는 여유가 생겼다.
“넌 좆 됐어.”
실없는 농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
각성자 센터 지하 8층 통합관제실.
이제는 관제실이라 부를 수도 없이 파괴된 그곳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쿨럭.
밭은 기침을 하자 검붉은 빗물과 함께 내장 조각이 섞여 나와 얼굴을 적셨다.
하지만 회주는 그것을 닦을 수가 없었다.
달려 있어야 할 양팔은 어깻죽지부터 찢겨 나갔고 하반신은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짓이겨져 있었으니까.
초재생도, 불사도 마나홀의 마나가 떨어진 지금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게 길고 길었던 삶의 끝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허망한 것 같기도 하군.”
말은 그랬지만 회주의 목소리는 삶을 향한 미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여유로웠다.
자신이 죽어가는 와중임에도 말이다.
차가운 눈으로 그런 회주를 내려다보던 구정철이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80년이다. 네놈들 더러운 짓거리에 목숨을 잃은 이들이 수만이 넘어. 그들의 죽음은 허망하지 않을 듯싶더냐.”
“그런 천한 것들과 나의 목숨이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천하다고?”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네. 종놈이 내 어머니의 등에 칼을 꽂고 내 땅에서 소작을 부치던 것들이 내 것을 탐해 담장을 넘었어.”
회주는 82년 전 세상이 바뀌던 그때를 떠올렸다.
“내 부모를 해하고 내 아내와 아이를 죽인 것들이 내 것을 가지고 주인인 양 행세를 하더군. 그게 천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 천한 것인가?”
칼에 찔려 죽어 가는 부모와 아내 그리고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아이의 죽음이 떠올랐다.
그때 각성을 하지 못했다면 자신도 가족들과 같은 꼴을 당했으리라.
“그래서! 그 복수를 하고자 이런 개 같은 짓을 80년이 넘도록 벌여 왔다는 거냐?!”
“복수? 아니지. 아니야. 난 단지 내 것을 되찾으려 했던 것뿐일세.”
“그것은 네놈들이 우리로부터 약탈해 간 것들이었다! 온당한 너의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네 것을 되찾겠다고?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이야?!”
구정철의 외침에 회주는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자넨 그렇게 생각하나 보군. 그런데 말일세. 내가 막 걸음마를 떼고 생각이란 것을 할 때부터 그것은 내 것이었다네. 그러니 자네가 분노하는 것처럼 나도 분노하고 내 것을 되찾을 자격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괴변이었다.
나라를 도둑질해 가고 그것을 제 것이라 우기던 놈이 내뱉는 괴변.
8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고한 목숨을 수만, 수십만을 해한 살인마가 내뱉는 괴변.
“뭐. 이젠 그것이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는걸 나도 잘 알고 있으니 그리 열 낼 필요 없다네. 허허허.”
그렇게 괴변을 토해낸 도적놈이 이젠 득도한 고승처럼 너털웃음을 흘렸다.
구정철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 죽음이 오히려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즐거워하는 것이.
“곧 죽을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나?”
생의 마지막 촛불을 불태우듯 또렷한 눈으로 구정철을 올려다보는 회주.
그의 입에선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 늙은 몸뚱이가 새 시대의 거름이 될 수 있다니 어찌 웃음이 나지 않겠는가.”
“…새 시대?”
“아까 복수냐고 물었었지? 틀렸어. 내 복수는 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