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경매 (1).
경기도 이천.
대현 그룹 왕회장 강산호가 머무는 저택에도 아침이 찾아왔다.
“오늘따라 새소리가 좋군.”
정겹게 지저귀는 까치를 보자니 까치가 울던 날 찾아왔던 한 청년이 떠올랐다.
“5개월 만에 S급이라니. 내 기대치를 훌쩍 넘어섰어. 허허.”
고작 F급에 불과했던 강현이 S급으로 올라서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5개월.
초창기 혼란의 시대를 지나 각성자의 정보를 데이터화하기 시작한 이후. 그 누구도 강현보다 빠른 승급을 한 이는 없었다.
지금은 큼직한 이슈들에 묻혀 매스컴에 노출되지 않았지만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강현을 주목하고 있었다.
각성 5개월 만에 S급에 이른 헌터.
세간의 관심을 받는 마나의 묘약을 만들어낸 네 사람 중 한 명.
더는 자신만 알던 흙 속에 묻힌 다이아몬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경쟁이 더 심화될 수밖에.
대청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는 강산호의 등 뒤로 황 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장님.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그래. 태웅이는 어쩐다고 하던가?”
“준비를 마치고 이미 각성자 센터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첫째가 잘해야 할 텐데 걱정이군.”
강산호의 목소리에 짙은 근심이 어려 있었다.
은퇴하고도 왕회장이랍시고 그룹 일에 관여하는 건 내키지 않지만, 그저 지켜보기엔 맏아들인 강태웅이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이미 환갑을 넘은 아들임에도 물가에 내놓은 애를 보는 것처럼 불안했다.
“잘 해낼 겁니다. 여태 그룹을 잘 이끌어 오지 않았습니까.”
황 집사의 말에 강산호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 경매는 전초전 같은 거야. 내년에 벌어질 싸움을 앞두고 툭툭 건드려 보는 거지. 그리고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내년에 물어뜯길 거야. 그런 싸움을 하기엔 큰놈은 너무 물러.”
태평성대와 같은 세상이지만 속을 보자면 난세와 다름없다.
당장 길산 분리법이 폐기되기까지 남은 시간이 석 달이 채 되지 않으니까.
100대 그룹에 속하는 재벌이라면 누구나 자체적으로 길드를 만들고자 할 테고 길드도 마찬가지로 자신들만의 사업체를 꾸리려 할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보다 경쟁이 심해지고 각성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다.
이미 쓸 만한 인물들은 모두 스카우트가 끝난 상황이다.
그런데도 사람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마나의 묘약이 가지는 가치는 더욱 높아진 상황이다.
마나의 묘약만 있다면 새로 만들 길드에 어중이떠중이를 받을 필요 없이 믿을 만한 사람을 각성시켜 키우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명목상으로나마 남아 있던 길드와 산업의 분리가 사라지는 거니 지금껏 암중으로 견제해 왔던 것이 표면 위로 떠 오를 테고 결국 많은 돈과 피가 흐를 것이다.
“내가 그렇게 가르치긴 했지만, 난세에는 어울리지 않는 놈이지.”
대현 그룹 임직원 20만.
하도급까지 합하면 10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대현 그룹의 밥을 먹는다.
그런 왕국이 일거에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 테지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큰 타격을 입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길드 설립은 어떻게 진행돼 가고 있나?”
“비현의 인원 모두 내년부턴 대현 길드의 이름으로 활동할 겁니다.”
“자네에겐 미안하게 됐어. 또 큰 짐을 떠넘겼으니 말이야.”
“제가 원해서 하는 일입니다. 회장님.”
보이는 칼보다 보이지 않는 칼이 무섭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 칼보다 보이는 칼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비현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렸다.
그럴싸한 칼이라도 한 자루 들고 있지 않으면 개나 소나 달려들어 물어뜯으려 할 테니 말이다.
“마나의 묘약은 여전히 지지부진한가?”
“아쉽지만 그렇습니다.”
대현의 연구원들이 근 한 달을 매달렸지만, 마나의 묘약 개발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이번 경매가 더욱 중요하겠구먼.”
10대 길드는 물론이고 재벌들도 마나의 묘약 경매에 달라붙을 것이니 낙찰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그 대상이 강현이든 마나의 묘약이든 말이다.
“그 친구에게 건넬 선물은 준비됐나?”
“네. 확실하게 검증까지 마쳤습니다.”
“잘 챙기게 그 선물이 돌파구가 될지도 모르니.”
말을 마친 강산호는 찻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가 보세나. 늙은 호랑이들을 상대하러.”
***
각성자 센터 154층.
항상 한가하기 그지없던 그곳은 전에 없이 많은 인파로 인해 소란스러웠다.
10대 길드 길드장들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100대 그룹에 속하는 회장들이 무거운 걸음을 움직여 친히 행차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환담을 나누는 회장들 속에서 불쑥 불퉁한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누가 보면 전경련 모임인 줄 알겠네. 제기랄.”
태산 길드 길드장 한태산.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대회의실을 울렸지만, 재벌 회장들은 그다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지금이야 10대 길드네 뭐네 하며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지만 당장 내년만 돼도 그게 바뀌리라는 것을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알고 있으니까.
지금까지는 길산 분리법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따로따로 그들만의 리그를 펼쳐 왔다면 내년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100대 그룹.
사람을 부리는 데 이골이 난 기업집단.
재벌에게 길드라는 건 그저 조금 힘센 머슴을 부리는 것이었다.
거기에 조금 더 의미를 부여하자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왕국을 지키기 위한 사병집단일 뿐이고.
국민들이 괜히 대한민국을 재벌 공화국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100대 재벌 그들은 하나하나가 자신만의 왕국을 가진 왕이었다.
그에 비하면 고작 맥시멈 3천의 길드원들과 사무직 직원 1, 2천 명이 전부인 10대 길드는 작은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급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10대 길드의 한 축을 담당하는 태산 길드의 한태산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괜히 시선 끌지 말고 앉으시죠. 저분들 눈에 우리가 보이기나 하겠어요?”
“끙….”
현월 길드장 우지영의 말에 한태산이 앓는 소리를 내며 앉았다.
“태산 길드에서도 꽤 많이 빠져나갔죠?”
“현월도 마찬가집니까?”
“우린 20%가 계약 해지하고 나갔네요. 더 좋은 조건에 다른 길드로 스카우트 되어 간다는데 말릴 수도 없고…. 그냥 위약금 조금 받고 보내줬죠.”
탄식 어린 우지영의 말에 한태산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태산 길드는 거의 30%에 가까운 인원이 계약을 해지하고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산지가 대부분인 강원도에 둥지를 튼 태산 길드다 보니 인구밀도가 낮아 인원 수급도 어려운 판에 길드 전력의 30%가 유출되자 허리가 휘청거렸다.
길드가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선 보유하고 있는 던전을 빠르게 많이 클리어하는 게 중요한데 30%의 인원이 빠져나가자 로테이션에 구멍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월과 태산 길드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불과 두어 달 전 싸울아비와 화랑 그리고 한울 길드에서 일어났던 길드원들의 탈퇴 러시가 지금 다른 7대 길드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한울과 싸울아비 그리고 화랑은 사망한 줄 알았던 SSS급 헌터의 귀환과 묘약이라는 신의 한 수로 지금은 오히려 길드 가입을 원하는 이들이 넘쳐난다고 하니.
상황이 역전된 셈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번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나의 묘약인지 마나 중독 치료제인지 그거 낙찰받아야 합니다. 아니면 멀쩡한 던전도 놀려야 할 판이니까.”
한태산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명백한 비웃음.
한태산의 목소리가 워낙 큰 탓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지막한 소리였지만 SS급 각성자의 귀에 들리지 않을 리가 만무한 일.
“이익!”
발끈한 한태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덜컥.
대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일단의 무리가 안으로 들어섰다.
***
154층 싸울아비 길드장실.
“이제 시작하려는 모양입니다.”
구정철의 목소리에 대화를 나누던 이들의 시선이 홀로그램 TV로 쏠렸다.
「즈믄나래 경매장을 찾아주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 경매의 진행을 맡은 쇼호스트 정혜영이라고 합니다.」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여성의 모습을 비추던 화면은 이내 탁자 위에 놓인 아이템으로 향했다.
「저희 즈믄나래 경매는 오프라인과 온라인 앱을 통해 참여할 수 있으며 콜팡의 텔레포트 시스템을 통해 배송됩니다.」
경매의 진행과 아이템 테스트 진행을 맡은 업체 그리고 배송에 관한 전반적인 설명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경매가 진행됐다.
“오. ‘대현 토털 아이템’에서 검증을 맡으셨군요.”
대현 토털 아이템.
대현 그룹에서 개발하는 마나 기반 아이템들을 테스트, 검증하는 계열사다.
대현 토털 아이템에서 이번 경매에 나오는 아이템들의 검증을 맡았다는 것은 대현 쪽에선 경매에 나오는 아이템들의 정보를 미리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어떻습니까? 강 회장님. 쓸 만한 아이템들이 좀 있던가요?”
은근하게 물어오는 구정철의 목소리에 강산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허허. 아시겠지만 거래처의 정보는 함부로 발설할 수 없습니다.”
강산호의 대꾸에 구정철의 얼굴이 시무룩해졌고, 옆에 있던 서태촌이 그런 구정철을 쏴붙였다.
“이 영감탱이 나이를 거꾸로 먹나. 왜 점점 더 철이 없어지누? 강 회장님이 여기까지 친히 오실 정도면 그만한 아이템이 경매 물건으로 나올 텐데 왜 주접을 떠는 건지. 쯧쯧.”
“…아?”
“이런 놈이 어떻게 정치를 했나 몰라. 그때 내가 대통령이 됐어야 했는데. 에잉-.”
“패자 무언이라는 말도 몰라? 너 그때 100만 표 넘는 표 차로 졌어! 이놈아.”
여든이 넘은 노인들이 투덕거리는 것을 웃는 얼굴로 지켜보던 강산호가 TV를 가리켰다.
“시작부터 마나의 묘약이 나오는군요.”
「첫 번째 경매품은 요즘 이슈의 중심에 있는 아이템이죠. 바로 마나의 묘약입니다.」
그와 함께 단상 위의 화면에 마나의 묘약에 대한 아이템 정보가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아이템: 마나의 묘약]
[등급: 없음]
[설명: 마나 중독 치료제 및 각성제.]
[추가설명: 전량 복용 시 효과가 발생함. 복용 시 마나홀의 크기가 확장되며 미약한 마나 회복 효과가 있음. D급 이상의 각성자에게는 마나홀 확장 효과가 없으니 사용에 주의 요망.]
[아이템 검증: ㈜대현 토털 아이템.]
「마나의 묘약 10개들이 한 세트. 경매시작가는 1억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경매 시작합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올라가는 경매가.
호가는 순식간에 10억을 넘어섰다.
“허…. 서가야. 그때 우리가 건네받은 묘약이 모두 몇 병이었지?”
“2만 개.”
“그중 2천 개는 기부했었지?”
서태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급이 많아지면 가격이야 떨어지겠지만, 지금 당장은 어마어마한 금액일 텐데. 저놈은 아깝지도 않나?”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강산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마 알고 그리 한 것일 겁니다.”
서태촌과 구정철의 시선이 강산호에게 향했다.
“덕분에 세 길드의 평판과 이미지는 상승했고 거기에 더해 광고 효과도 톡톡히 봤지 않습니까.”
“강 회장님 말씀은 설마 저 녀석이 그것까지 계산하고 기부를 진행했다는 말씀입니까?”
“그 기부 한 번으로 전 세계의 시선이 마나의 묘약으로 쏠렸습니다. 해외 매체들은 마나의 묘약을 기적의 치료제 혹은 인생을 바꿀 기회라고 떠들어 대더군요. 그런 상황에서 진행하는 경매니 모든 이목이 쏠리는 게 당연합니다. 그 첫 시작을 10대 길드의 수장들과 대한민국 100대 기업의 회장들을 모아놓고 시작하는 거니 이만한 홍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 제자가 똘똘한 모양이다. 서가야.”
“저놈 원래 똘똘했어. 너만 모르고 있었던 게다. 구가야.”
그렇게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10억에서 주춤하던 경매가는 다시 무서운 속도록 치솟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20억을 돌파하는 호가창 옆으로 미소 띤 얼굴로 앉아있는 강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오늘 대한민국 부자 순위가 바뀔지도 모르겠군요.”
나직한 강산호의 목소리가 길드장실을 울리고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강현이 준비한 게 마나의 묘약 하나만은 아니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의 신경이 오로지 경매로 향해 있을 때, 거대한 위협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