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만 아공간이 보여-128화 (127/202)

128.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릅니다.

누군가는 말했다.

이것은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신벌(神罰)이라고.

또 다른 이는 말했다.

이것은 인간의 진화 과정 중 일부일 뿐이고 각성자는 진화된 인류이며 그러지 못한 일반인들은 도태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던전이 나타나고 8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가설이 등장했지만 그중 무엇도 제대로 증명된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모든 가설은 그저 가설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세월, 많은 이들이 매달렸지만, 던전 발생의 이유조차 밝혀 내지 못했다.

지구의 마법과 과학은 아직 그 정도로 발전하지 못했으니까.

덕분에 요즘은 진화론이 대세였다.

그게 그나마 인간에게 허용된 이해의 범위였으니까.

하지만 태양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수많은 가설 중 판타지 소설로 치부됐던 ‘이계 침공론’이 정설이 되는 셈이었다.

태양신의 말로는 크롤러와 지구의 던전을 만든 존재는 같은 존재라고 했으니 말이다.

‘던전과 크롤러를 만들 정도로 발전된 기술력과 마법을 가진 존재들이 왜 지구 침공에 80년이 넘는 시간을 공들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태양신의 말이 거짓일 확률도 있지만, 그건 아닌 듯싶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격이 다르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해주는 존재가 고작 나 하나를 속이자고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날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느니 그냥 쓱싹 해치우는 게 더 쉬울 테니까.’

생각을 정리한 나는 시스템 창을 열었다.

샤이닝 에로우는 씨드가 전부 복귀시켰고, 수수께끼 알도 회수했으니 이제 이곳에서 할 일은 없었다.

주변을 돌아봤다.

거대한 원형의 구체 안에 만들어진 하나의 세상.

그리고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신.

태양신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만든 세계를 구하기 위해 영락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이 세계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존재였다.

한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구를 창조한 ‘신’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 존재는 인필리언을 창조한 태양신만큼 지구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알 수 없는 이계의 존재에게 지구가 침공당하고 있음에도 외면할 만큼?

‘모를 일이지. 인간들이 알 수 없는 곳에서 싸우고 있을지도….’

고개를 흔들어 쓸데없는 상념을 털어 낸 나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공간 인필리언의 청소를 마치셨습니다. 던전으로 귀환하시겠습니까?

-[Y/N]

톡.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뚜르르르.

‘흠…. 전용 던전이라는 곳에 들어가 있는 건가?’

도연우는 괜스레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3일.

강현이 집에서 두문불출한 시간이다.

강현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이 보고한 사항이니 틀릴 리는 없었다.

한울 포함 4개 단체, 총 400명의 인원이 강현의 집 근처에서 24시간 경계를 하는 상황.

아무리 강현이 S급이라 해도 그 모든 사람의 눈을 속일 수는 없을 테니 집 안에 머무는 게 확실할 것이었다.

‘현이가 텔레포트 스킬을 익힌 게 아닌 이상은 말이지. 그나저나 이번엔 너무 늦는데….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그간 강현이 연락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어봐야 12시간.

이처럼 3일 동안 연락이 되지 않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걱정이 되는 게 당연했다.

형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지만, 도연우는 강현의 스승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도연우가 강현의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띠이이.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다.

“네.”

“길드장님. 태산 길드장님 연락입니다. 연결할까요?”

강현과 만남을 주선하기로 한 뒤로 7대 길드의 길드장들로부터 하루가 멀다고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말로는 안부 인사라곤 하지만 강현과의 만남 자리를 빨리 만들어 달라는 압박 아닌 압박이었다.

“후…. 네. 연결해 주세요.”

“네. 길드장님.”

비서의 대답이 끝나고 잠시 대기음이 울린 후.

“아! 도 길드장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태산 길드장 한태산의 우렁찬 목소리가 길드장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도연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3시.

‘식사 시간도 아닌데 뭔 식사 타령인지 참나.’

속으로 투덜거린 도연우는 귀찮은 속마음이 드러날까, 부러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말을 받았다.

“저녁을 먹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네요. 오늘은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한 길드장님.”

그나마 다행인 건 한태산은 다른 길드장들처럼 말을 빙빙 돌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물어도 불쾌해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뭐. 우리 사이에 안부 인사 물으려고 전화했겠습니까? 저번에 하신 약속이 언제 이행될지 궁금해 전화 드렸지요.”

“흠…. 아직 저도 그 친구에게 대답을 듣지 못해서 딱히 언제라고 확답을 드릴 수가 없을 것 같네요.”

도연우의 대답에 수화기 너머 한태산의 목소리가 조금 딱딱하게 굳었다.

“도 길드장. 내 뭐하나만 물읍시다.”

“네. 말씀하시죠.”

“혹시 이거 우리 엿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덩달아 도연우의 목소리도 굳을 수밖에 없었다.

한태산은 지금 도연우에게 ‘너 우리한테 사기 치는 거 아니냐?’라고 묻고 있는 것과 같았으니까.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말이오. 지금 당장 만나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언제 만날지 약속을 잡아달라는 것뿐인데. 이게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할 일인가 싶단 말이지.”

“한 길드장님 말뜻은 제가 일부러 약속을 잡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까?”

“합리적인 의심 아니겠소? 도 길드장의 한울이나 싸울아비, 화랑은 이미 그 치료제를 확보해서 대현과 대량생산을 위한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들었는데, 시간을 끌수록 그쪽이 유리해지는 거 아니겠소?”

“…….”

틀린 말은 아니고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닌데 의심을 받는 도연우로선 화가 날 수밖에 없는 말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그런 의도 따윈 없었으니까.

“후. 한 길드장님…….”

한숨을 내쉰 도연우가 한태산을 향해 깊은 빡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려 할 때였다.

우웅.

헌터 와치가 울리며 기다리던 이름이 떠올랐다.

『강현』

“…한 시간 안에 답을 드리도록 하죠.”

그렇게 한태산과 통화를 마친 도연우는 행여 전화가 끊길세라 강현의 전화를 받았다.

“어. 강 프로 식사는 잡솼어?”

그 어느 때 보다 텐션이 올라간 목소리로.

***

시간이 조금 흐른 줄은 알았지만 3일이나 지났을 줄은 전용 던전 밖으로 나오기 전엔 몰랐다.

‘기껏해야 하루 정도 머물렀다고 생각했는데.’

던전 밖으로 나오자마자 울려대는 부재중 메시지에 얼마나 놀랐던가.

씨드의 말로는 지구와 인필리언의 시간 축이 달라서 생긴 일인 것 같다는데,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안 됐다.

‘강 프로는 또 뭐야? 하여간 종잡을 수 없는 형이라니까.’

연우 형과 통화를 마친 나는 기적 형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7대 길드 길드장들 정도면 첫 경매 고객으로 제격이지.’

여기에 기업 몇 개만 추가하면 대한민국에 전례가 없는 경매 방송이 될 거다.

“어. 현아. 무슨 일이야?”

그 전에 오프라인 경매장과 인터넷 라이브 방송 관련해서 준비가 끝났는지 확인하는 게 먼저였지만.

“네 형님. 경매장 준비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여쭤보려고요.”

“지난번에 보고한 것처럼 건물 리모델링은 1주일 전에 끝났고, 오프라인 매장 직원들은 아무래도 이제 막 오픈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을 뽑아서 운영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아서 우선은 경력직 위주로 뽑았어. 나중에 매장운영상황을 봐서 신입직원을 추가할 예정이야.”

질문 한 번에 모든 보고가 끊임없이 들어오는 게 역시 기적 형님다웠다.

“2층은 저번에 말한 대로 온라인 경매장으로 운영할 거고 방송 장비하고 스텝들도 뽑아 놨어. 경매 진행자는 유명 홈쇼핑 출신 쇼 호스트로 뽑아놨고. 네가 큐사인만 주면 지금 당장이라도 방송 시작할 수 있게 세팅 끝난 상태야.”

원래라면 그간 아공간 청소를 하며 모아 놓은 아이템들로 첫 경매를 진행하려 했으나 7대 길드가 미끼를 물었으니 판을 더 키울 필요가 있었다.

“형님. 첫 방송에 오프라인 입찰자들도 받는 건 어때요?”

“입찰자들? 그거야…. 의자 하고 테이블 몇 개 놓으면 되니까 힘들건 없지. 그런데 누가 참여하는데?”

“일단은 10대 길드 길드장들은 참여하는 게 확정적이고요. 대현 강 회장님에게 연락드려서 기업 쪽 참여 의사를 한번 여쭤볼 생각이에요.”

“…….”

내 말에 잠깐 아무런 말이 없던 기적 형님은 이내 뭔가 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현 왕회장님 만났을 때 내 인생에 그보다 더 놀랄 일은 안 생길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이 생기네…. 하하.”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이게 갑작스럽게 정해진 거라….”

“아. 괜찮아 그냥 조금 놀란 거야. 그래서 첫 방송은 언제야?”

“이틀 후요.”

“시간이 좀 촉박하네…. 일단은 알겠어. 다른 전달사항은?”

“장소도 변경이 있을 거예요.”

“장소 변경? 우리 경매장에서 방송하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참여자들 면면이 화려하다 보니 우리 경매장에서 진행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죠.”

“그건 그렇네. 그럼 미리 가서 장비 세팅도 하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디에서 진행하게?”

“각성자 센터 154층이요. 한울 길드장님이 허가받아 준다고 했으니까 각성자 센터 가서 연락만 하시면 될 거에요.”

“…더 놀랄 힘도 없다. 알겠어. 나는 스텝들 데리고 회의 좀 해야 할 것 같다. 회의 끝나면 보고할게.”

그렇게 기적 형님과 통화를 마친 나는 대현 강산호 회장에게 전화했고 어렵지 않게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간 다른 대기업에서도 대현과 3대 길드가 합작한 연구소에 투자의사를 밝혀 왔다고 하니, 기업들의 경매 참여도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것 같았다.

“후…. 이걸로 경매 건은 대충 준비가 된 건가?”

벌여 놓은 일이 많다 보니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도 바쁜 건 똑같았다.

***

[아공간 퀘스트: 인필리언의 구원자]

……

[진행상태: 완료]

[보상: 보너스 스탯 100. 칭호: 인필리언의 구원자. 상점 포인트 1,000,000. 선업 포인트 1,000,000. 특성카탈로그.]

[보상을 수령하시겠습니까?]

[수락]

한 세계를 구원하는 퀘스트여서 그런지 그 보상 하나하나가 화려했다.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른 느낌.

보상은 저것뿐만이 아니었다.

퀘스트 보상과는 별도로 아공간 청소 보상도 받았다.

보상 중 하나는 축구공만 한 크기의 구체.

[아이템: 테라포밍 시스템 인필리언(ver 1.0)]

[등급: S급]

……

무려 상점가가 101만 포인트나 하는 S급 아이템 인필리언이 그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1000칸이 늘어난 인벤토리였다.

더불어 한계 중량도 1000㎏이 늘었다.

‘괜히 황금색 아공간이 아니라는 거지.’

그렇다고 다시 황금색 아공간을 들어갈 거냐고 묻는다면 단언컨대 아직은 아니라고 답할 거다.

이번엔 정말 운이 좋았다.

아공간이라는 특수한 환경, 거기에 모태 솔로라는 특성이 없었다면 검은 그을음은 상대할 수 없었을 테니까.

무려 신이 되려다가 태양신 때문에 영락해 버린 마수가 아니던가.

아공간에 생명체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상. 그에 대한 준비도 필요했고.

‘드래곤 하트가 없으면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쉽지만, 언제고 구할 수 있겠지.’

그렇게 인벤토리 한구석에 있는 인필리언을 확인한 나는 떨리는 손으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이어지는 메시지의 향연.

-보너스 스탯 100을 수령했습니다. 상태창을 열어 스탯을 배분해주세요.

-칭호:인필리언의 구원자를 획득했습니다.

-상태창에 신규 카테고리 [칭호]가 추가됩니다.

-상점 포인트 1,000,000을 수령하셨습니다. 상점창을 확인해 주세요.

-선업 포인트 1,000,000을 수령하셨습니다. 업적 상점을 확인해 주세요.

-특성카탈로그를 수령하셨습니다.

정말, 지난 3일간 밥이라곤 한 끼도 안 먹었는데 배가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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