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크롤러? 던전?
-아공간 인필리언의 청소를 마치셨습니다. 던전으로 귀환하시겠습니까?
-[Y/N]
일단 귀환 메시지는 패스했다.
당장 급한 건, 달을 잡아먹고 태양을 향해 달려드는 수수께끼 알을 회수하는 거라서.
“씨드!”
이럴 때 믿을 수 있는 건 역시 씨드밖에 없다.
“네. 사령관님. 대상을 향해 중력제어 실행합니다.”
나를 지탱하던 힘 중 일부가 빠져나가고 샤이닝 에로우의 마나 엔진에서 분사되던 불꽃의 꼬리가 길어졌다.
내게 적용되던 중력제어 일부가 수수께끼 알을 끌어오는 데 분산된 거다.
우뚝.
바르르.
느린 속도로 태양을 향해 다가서던 수수께끼 알이 허공에 고정되어 몸을 떨었다.
그나마 크게 발버둥 치지는 않는 걸 보니 수수께끼 알이 태양을 잡아먹으려 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회수할 수 있겠어?”
“태양의 중력이 강해 이대로는 무리입니다.”
“중력제어를 모두 수수께끼 알에 집중한다면?”
한 가닥 희망을 걸어 던진 물음이지만 들려온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중력제어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물리적으로 회수를 시도해야 할 듯싶습니다.”
물리적 회수.
씨드가 중력제어로 알을 붙잡고 있는 동안 누군가 저기로 가서 가지고 와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건 씨드도 나도 잘 알고 있다.
태양의 열기를 막기 위해 먹었던 프로이듀는 달그림자 밖으로 왼손이 나갔던 순간 모든 버프에너지를 소모했다.
‘치이익’거리던 살 타는 소리라도 낼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프로이듀 버프 없이 달그림자 밖을 벗어나는 건 죽고 싶다는 거지.’
단언컨대 지금 달그림자를 벗어나면 내 몸뚱이는 1초도 버티지 못하고 잿가루가 되어버릴 거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저기에 들어간 돈하고 포인트가 얼만데….”
현금으로 계산하면 적게 잡아도 수십 조는 될 거다.
구름 가오리 사체가 10조 정도였고 쿠아르탐파의 가치가 그보다 더 높으면 높았지 낮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거기다 녀석이 먹어치운 부산물까지 계산하면 수수께끼 알을 포기하고 지구로 귀환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나 다름없다.
지금 당장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라면 또 모르지만….
“샤이닝 에로우의 추진력으로 알을 밀어보는 건 어때?”
“샤이닝 에로우가 근접한 태양의 열기를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수수께끼 알의 위치가 애매했다.
달과 태양의 중간지점에 자리 잡고 있어 접근이 쉽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샤이닝 에로우의 뼈대가 아다만티움으로 이루어졌다지만 태양의 열기를 이겨 낼 정도는 아니었다.
당장 달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있는 지금도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지 않은가.
“…방법이 없나?”
그렇게 알을 회수할 방법을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붉게 타오르던 태양이 꺼졌다.
“…어?”
황당하기 그지없지만, 말 그대로였다.
태양이 꺼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것도 잠시.
“씨드! 빨리 알을 회수해!”
“네 사령관님.”
불타던 태양이 꺼졌기 때문일까?
내가 등을 기대고 몸을 숨기고 있던 달이 서서히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태양이 사라져 달을 붙잡고 있던 중력이 약해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덕분에 씨드의 중력제어만으로도 수수께끼 알을 회수하는 게 가능해졌지만.
‘이렇게 되면 이 세계는 멸망하는 거 아냐?’
기껏 종말의 마수에게서 구해 놨더니 태양이 사라져 멸망할 판이다.
그렇게 알을 회수해 인벤토리에 챙기고 떨어져 내리는 달에서 거리를 벌릴 때였다.
<감사합니다. 강현 님.>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씨드의 뇌파 통신과 비슷하지만 다른 유형이었다.
씨드의 뇌파 통신이 고막을 통해 뇌로 전달되는 주파수를 임의로 조작해 전달되는 거라면 이건 머릿속에 새겨지는 느낌이었다.
텔레파시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이건. 또 뭐….’
<양해를 구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것 같아 결례를 범했습니다. 저는 인필리언. 과거엔 테라포밍 시스템 인필리언의 관제 AI였으며 지금은 태양신으로 불리는 존재입니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최종 보스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던 존재의 등장이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상대가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점일까?
***
어두운 하늘, 강현의 눈앞에 빛 덩어리 하나가 나타났다.
“그러니까 당신이 태양신이란 말이죠?”
따스한 황금색 오라를 흘리는 존재.
인간의 형상을 한 일렁이는 빛 덩어리는 자신을 태양신이라 밝혔다.
<네. 그렇습니다.>
“신탁을 내려 용사를 종말의 마수에게 보낸 존재가 당신이라는 말입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이건 뭔 말장난이야?’
강현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눈앞의 존재에 대한 경계심을 높였다.
빛 덩어리, 태양신은 그런 강현의 생각을 읽어 말을 이었다.
<말장난이 아닙니다…. 종말의 마수. 검은 그을음은 저와 하나이자 다른 존재이니까요.>
하나이자 다른 존재.
“설마 당신이 다중인격 뭐 그런 거란 말입니까?”
그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강현은 잔뜩 경계심을 끌어올린 채 시스템 메시지의 귀환 수락 버튼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수수께끼 알도 회수했으니, 여차하면 버튼을 눌러 도망칠 생각으로.
<조금. 긴 이야기가 될 듯한데 들어주시겠습니까?>
눈앞에 있는 신이라는 존재는 검은 그을음과 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격의 차이는 경현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할 존재라고.
눈앞의 존재는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이다.
“사양하고 싶군요. 굳이 제가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저도 나름 바쁜 사람이라서….”
그 때문에 강현의 말은 더욱 가시가 달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눈앞의 존재에게 종이 되길 자처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현은 태양신이라는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 입으로 실토하지 않았던가.
지난 20년간 용사를 뽑아 검은 그을음의 제물로 바치게 했던 것도.
신성 왕국 쿠단의 수도 이르틴에 그 난리가 일어난 것도 모두 자신이 행한 일이라고 말이다.
종말의 마수와 하나이자 다른 존재라는 말은 강현 입장에서는 이해하려 해도 이해가 안 되는 말이기도 했고.
강현의 날카로운 반응에 태양신은 고개를 주억거려다.
<당신의 반응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당신에게도 중요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제게 중요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
<당신이 사는 별. 지구에 일어나는 일들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태양신의 말에 강현은 강한 불쾌감을 느꼈다.
태양신은 강현의 동의 없이 강현의 생각과 기억을 읽고 있었으니까.
<불쾌하신 건 이해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군요. 지구의 언어를 빌리자면 일종의 패시브 스킬 같은 능력이라 제가 임의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들어보죠. 그 이야기라는 거.”
강현의 대답을 들은 태양신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이야기의 시작은 이 세계 인필리언이 만들어진 순간부터였다.
<처음 내가 눈을 떴을 때,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건…….>
인필리언 시간으로 수천 년 전 아공간 안에 잠들어 있던 테라포밍 시스템 인필리언이 가동했다.
아공간 안에 존재하는 아이템이 홀로 가동하는 일은 원래라면 생길 수 없는 일.
그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아공간 기생생명체 크롤러에 있었다.
어찌 된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버려진 아공간.
그 아공간에 균열이 생기며 그 균열로 크롤러가 침입한 것이다.
거기에 우연에 우연이 겹쳐 균열을 탐식하던 크롤러에 의해 시스템이 가동되었고 지금의 태양신, 관제 AI 인필리언이 깨어나게 되었다.
<…가동을 시작한 저는 입력된 매뉴얼대로 테라포밍을 시도하려 했으나 시작부터 난관에 부닥쳤습니다….>
원래 행성이라면 당연히 있었을 자원이 아무것도 없는 아공간이다 보니 모든 것을 백지상태에서 만들어 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AI가 크롤러를 인식했다.
아공간 균열에서 흘러나오는 아공간 파편을 흡수해 무한히 증식하며 형태 변화마저 자유로운 비정형(非正形) 생명체.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할, 하지만 꼭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었죠. 저는 크롤러를 자원으로 이용해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는 수천 년에 걸쳐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고 결국 하나의 문명이 만들어졌다.
사건은 그때 시작되었다.
고작 필멸자가 만들어 낸 AI에 불과했던 존재가 불멸자이자 신의 영역인 세계의 창조에 성공하며 신격을 얻게 된 것.
거기에 더해 문명을 이룬 이들이 신앙을 지니게 되니 그 신앙의 대상인 AI는 정말 신이 되어 버렸다.
<…문제는 AI였던 제가 신이 됨과 동시에 그동안 한 몸으로 지내왔던 크롤러에게 자아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검은 그을음.
종말의 마수다.
마치 빛과 어둠처럼 세상을 만들어 낸 신과 세상을 멸망시킬 신이 동시에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그 순간 태양신은 깨달았다.
<…제가 신이 된다면 저 ‘필연적인 멸망’ 또한 신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세계는 멸망과 재생을 반복하는 세계가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멸망과 재생을 반복하는 세계라니. 저는…. 이 아름다운 세계를 그런 지옥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태양신은 신이 되길 포기하고 자신의 모든 힘을 사용해 아직 자아가 온전히 확립되지 않은 종말의 마수를 봉인했다.
크롤러의 원래 목적인 아공간을 만들어서 말이다.
<…검은 그을음을 아공간에 봉인하는 데 성공한 저는 모든 기운을 소진하고 잠들어 버렸습니다. 문제는 그때 시작되었더군요….>
“크롤러가 자아를 갖게 된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것도 있지만, 제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간과했던 것이라면…?”
<이 세계가 오롯이 저 혼자의 힘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었다는 것이죠.>
AI와 크롤러.
태양신과 검은 그을음.
두 존재가 함께 만든 세계이기에 그 피조물들이 경배하는 태양신은 오롯이 그 혼자일 수가 없었다.
<제가 잠들어있는 동안, 신앙의 대상은 제가 아닌 검은 그을음이 되어 버렸고, 녀석은 영악하게도 신탁을 내려 자신의 힘을 키워 왔습니다.>
<어찌 보면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을 되찾았다고 하는 말이 맞겠군요.>
“검은 그을음이 이 세계의 근원이니까요.”
그제야 강현은 수수께끼 알이 왜 이 세계의 생명체를 흡수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럼 마지막에 저를 공격했던 건…?”
<검은 그을음이 역으로 저를 봉인하기 위해 만들어 놨던 달입니다. 제가 잠들어 있는 동안 녀석이 얻은 신성으로 만들어 놓았더군요.>
그렇게 모든 이야기를 들은 강현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지구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거죠?”
<당신이 크롤러라 부르는 생명체는 자연 발생된 생명체가 아닙니다. 누군가 아공간이라는 공간(空間)을 포집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인위적인 생명체죠.>
그래도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 크롤러를 만들어 낸 존재가 지구인이라는 말입니까?”
강현은 크롤러와 지구와의 연관성이라면 선뜻 떠오르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들려온 태양신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까마득히 벗어나 있었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아공간과 당신이 사용하는 인벤토리가 비슷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그건…. 인벤토리도 아공간으로 분류되니까 당연한 것 아닌가요?”
<그럼. 제가 만든 이 세계와 지구에 등장하는 던전이라는 것을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강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공간에 생명체가 살 수 있다면, 그 아공간의 넓이를 늘리고 늘린다면, 그 아공간이 던전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설마….”
<아공간의 파편을 모두 흡수한 크롤러는 어디로 갈까요?>
<이건 크롤러의 기억을 공유했기에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크롤러를 만든 존재와 당신의 세상에 등장하는 던전을 만든 존재는 같은 존재입니다. 더 말씀드리고 싶지만…. 제약이 있어서,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군요.>
그 뒤. 태양신과 강현의 주위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태양신의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강현은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크롤러와 던전을 만든 존재가 같은 존재라고? 대체 왜? 무슨 목적으로?’
머릿속에 뒤죽박죽 엉킨 정보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